국익 차원 고려와 ESG 등 선제 포석, 재무 부담 설왕설래…대한항공 “장기투자라서 재원 언급은 시기상조”

대한항공이 미국 보잉으로부터 362억 달러(약 50조 원) 규모의 103대의 차세대 항공기를 도입하고, GE에어로스페이스와 예비 엔진 구매·정비 계약을 체결하는 등 총 70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 계약에는 777-9 여객기 20대, 787-10 여객기 25대, 737-10 여객기 50대, 777-8F 화물기 8대가 포함돼 있으며, 2030년대 중후반까지 순차적으로 인도될 예정이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지난 8월 25일(현지시각) 워싱턴DC 윌러드 호텔에서 보잉 및 GE 고위 관계자들과 만나 항공기 도입과 함께 6억 9000만 달러 규모의 예비 엔진 구매, 130억 달러 규모의 엔진 정비 서비스 계약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대한항공의 역대 최대 규모 대미 투자 소식이 전해지자 주가는 하락세를 보였다. 8월 25일 종가 기준 2만 5600원이었으나 9월 3일 기준 2만 3450원으로 8.4% 떨어진 상황이다.
대한항공은 이미 올해 보잉·GE에어로스페이스와 327억 달러(약 48조 원) 규모의 공급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그런데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이재명 대통령의 첫 미국 순방길에 동행하면서 대한항공의 보잉 항공기 추가 구매 가능성이 제기됐다. 트럼프 행정부가 과거 관세 협상 과정에서 동맹국 항공사에 보잉 항공기 구매를 강하게 압박해온 만큼 이번에 발표한 대미 투자가 ‘선물 보따리’ 성격이 짙은 주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항공업계 한 관계자는 “트럼프 정부가 통상 협상에서 480조 원 이상의 직접 투자를 요구하고 있어 국익 차원의 고려가 있었을 것”이라며 “재계 5위권 기업 총수들이 나선 자리에 자산 기준 12위인 한진그룹 총수가 동행한 것은 대규모 투자를 통해 관세 협상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산업적 의미뿐 아니라 대통령실과 긴밀한 스킨십을 통한 정치·외교적 함의가 담긴 투자”라고 말했다.
추가 항공기 구입에 따른 재무 건전성 악화는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16조 1166억 원의 매출과 1조 9446억 원의 영업이익을 거두며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지만, 이번 대미 투자 규모는 지난해 매출의 4배를 웃돈다. 올해 2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0.9% 감소한 3조 9859억 원, 영업이익은 3.5% 줄어든 3990억 원으로 나타났다. 저비용항공사(LCC)와의 경쟁 심화,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압박 여파로 화물 운임이 줄면서 실적이 주춤한 것이다. 팬데믹 기간 채권 발행과 차입 확대를 통해 유동성을 확보했으나, 이번과 같은 대규모 발주는 재무 구조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당장 3분기 실적도 부진 우려가 높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7월 난카이 대지진 우려, 8월 폭염 이슈로 주요 노선 가운데 일본 노선 쪽이 부진했다. LCC의 경우는 모든 항공사가 2분기에 적자를 냈다”며 “원래 방학 시즌인 3분기가 성수기인데 주요 노선에서 매출이 감소하다 보니 올해 이례적으로 성수기 효과가 거의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항공주 전반적으로 3분기 실적에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단거리 노선을 중심으로 LCC들과의 경쟁은 심화되고 있다. 앞서의 항공업계 관계자는 “LCC들이 경쟁 노선에 진입하면 대한한공 같은 풀서비스항공사(FSC)의 운임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한항공이 단독 운항하던 시절 몽골 노선 평균 왕복 운임은 120만~130만 원 정도였는데 현재는 60만~70만 원대까지 내려왔다”며 “티웨이가 유럽 노선, 에어프레미아가 미주 노선에 진출하면서 대한항공이 가격을 많이 낮춘 것으로 알고 있다. 해외여행 수요 자체는 앞으로도 꾸준하겠지만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70조 원에 달하는 투자금이 모두 한 번에 집행되는 것은 아니다. 항공업계에서는 장기 프로젝트 특성상 자금 부담을 분산할 수 있는 금융 구조가 활용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항공업계 다른 관계자는 “아직 양해각서(MOU) 단계라 최종 규모는 변동 가능성이 있고, 항공기 도입도 일시불이 아니라 5~10년에 걸쳐 금융을 일으켜 원리금을 상환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며 “실물 자산을 담보로 한 금융리스 구조를 활용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로 조달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 수출입은행(EXIM)에서 저리 대출을 지원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투입 비용 역시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대신증권 양지환 연구원은 지난 8월 29일에 발표한 리포트를 통해 “통상 공시된 금액 대비 실제 투자되는 금액은 40~50% 수준으로, 정상회담이 열린 8월 25일 구매하기로 한 103대 항공기 도입의 실질 투자 규모는 약 25조 원 내외로 추정된다”며 “연평균 15대 안팎을 인도받는 일정에 따라 2030년 말부터 2045년경까지 순차적으로 도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2032년까지는 연평균 3조 원 이상이 설비투자(CAPEX)로 집행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증권가 다른 관계자는 “아시아나·에어부산까지 통합해 향후 10~20년 항공기 구매 계획을 세워야 하는 만큼 103대 추가 도입은 커진 대한항공 입장에서 무리한 투자는 아니다. 게다가 항공기 구입에 소요되는 50조 원이라는 금액은 공시 기준에 따른 카탈로그 가격 개념이라 실제 투입 비용은 더 낮을 것”이라며 “다만 10년 이상 장기 계약 특성상 가시성이 떨어지고 예측 불확실성이 높아 불안 요인은 있다. 결국 이번 투자에 대한 평가는 한미 정상회담 결과와 맞물릴 수밖에 없고, 협상이 우호적으로 평가되면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양보가 많았다는 인식이 커지면 부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내다봤다.
통합 대한항공은 2025년 상반기 기준 총 301대의 항공기를 운영 중이다. 대한항공은 정상회담 이전에 발주된 191대를 포함해 현재까지 총 297대의 항공기를 발주한 상태인데 이 가운데 80% 이상이 노후 항공기 교체 목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 대한항공 항공기의 평균 기령은 약 24.5년이다. 기령이 20년 이상인 경년 항공기는 국토교통부가 특별 정비대상으로 지정해 정비인력을 추가 투입할 만큼 운항 안전에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교체 수요가 상당했다는 분석이다.
특히 노후 항공기는 탄소 배출이 심해 교체 필요성이 더 크다. 유럽을 중심으로 SAF(지속가능항공연료) 규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연료 효율성이 높아 탄소 배출을 저감할 수 있는 신형 항공기 도입은 불가피한 흐름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대한항공이 이번에 도입을 추진하는 보잉 777, 787, 737 등 차세대 모델은 기존 대비 최소 15%에서 많게는 30%까지 연료 효율성이 높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글로벌 ESG에 부합하는 행보”라며 “전체 기단을 키워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고 글로벌 메가 캐리어로 발돋움하겠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장기 투자 특성상 불확실성 관련 리스크가 있지만 대한항공이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통해 대응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휘영 인하공업전문대 항공경영학과 교수는 “대한항공은 이번 발주에서 여객기뿐 아니라 화물기 777F 8대도 함께 도입한다. 코로나19 당시 전 세계 항공사들이 줄줄이 적자를 기록했을 때도 대한항공만 흑자를 낼 수 있었던 것은 화물 운송 비중이 컸기 때문”이라며 “항공화물은 첨단 재화나 고부가가치 상품처럼 단가가 높고 긴급성이 큰 물품이 주 대상이라 세계 교역 둔화 국면에서도 수요가 유지된다. 대한항공이 리스크를 잘 관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 대한항공 관계자는 “항공기 도입에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에 당장 비용이 들어가는 부분은 아니다. 장기 투자인 만큼 재원 마련과 관련된 부분은 아직 확정되지 않아 말씀드리기에는 시기상조인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향후 규모 조정 가능성에 대해서는 “주문 대수를 줄이는 것은 아니지만 제작사 사정이나 여러 변수에 따라 도입 시기가 지연되는 경우는 많다”며 “구체적 일정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동차·조선·배터리…국내 기업들, 잇달아 대미투자 계획 발표
대한항공 외에도 한국 주요 기업들이 최근 대규모 대미 투자 계획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028년까지 미국 내 투자액을 기존 210억 달러(약 29조 원)에서 260억 달러(약 36조 원)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의 방미 경제사절단 일원으로 참가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8월 26일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직후 투자 증액을 발표했다. 로봇은 물론 자율주행,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 등 미래차 생태계 조성과 관련해 미국 기업들과 협력을 확대하고 첨단 제조 인프라 확충에 속도를 내겠다는 방침이다.
조선업계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삼성중공업과 HD현대가 지난 8월 26일 각각 미국 현지 조선사·투자사와 함께 미 해군 함정 정비와 합작 조선소 설립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며 사업 협력을 공식화했다. 한화는 지난해 말 필라델피아 조선소 ‘필리십야드(Philly Shipyard)’를 인수하며 현지 생산 거점을 확보해 미국 내 조선 협력 확대를 예고한 바 있다.
배터리 부문에서는 SK온이 미국 플랫아이언 에너지와 ESS용 LFP 배터리 최대 7.2GWh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2026~2030년 단계 공급을 목표로, 조지아주 일부 EV 배터리 라인을 ESS 전용으로 전환해 생산한다는 방침이다. ESS 수요 대응을 통한 북미 생산 체계 강화라는 점에서 투자 성격의 확장으로 해석된다. SK온은 내년 10월 미국 조지아 공장에서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양산에도 들어갈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함께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국내 재계는 반도체, 인공지능(AI), 해양, 원자력, 희귀광물 등 전략 산업에서 1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밝혔다. 정부는 정책금융기관을 중심으로 조선·배터리·반도체·제약 등 핵심 산업에 3500억 달러 규모의 전략펀드 조성 방안을 제시하며 미국 시장을 겨냥한 지원을 강화할 방침이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