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처럼 서명하면 외환위기 재연, 미-EU 방식이 유리…“위험분산 구조 붕괴” 글로벌 금융시장 충격 예고도

9월 4일 일본은 5500억 달러를 미국이 원하는 곳에 투자하되, 원금 회수 때까지는 미국과 50 대 50으로 원금 회수 이후에는 10 대 90으로 이익을 나누기로 약정했다. 미국이 투자처를 정하면 일본은 45일 이내에 자금을 집행해야 한다. 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 미국은 관세를 추가로 부과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내에 일본에서 5500억 달러를 모두 투자 받으려 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 입장에서는 5500억 달러를 단기간에 준비해야 한다. 기업 단위로는 어렵다. 정부가 외환보유고를 털어서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일본에 이어 한국에도 같은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의 외환보유고는 1조 3000억 달러로 한국(4150억 달러)의 3배가 넘는다. 일본은 미국과 무제한 통화 스와프(Swap) 협정을 맺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서 무제한으로 엔화를 달러로 환전할 수 있다. 한국은 미국과 이 같은 협정을 맺고 있지 않다. 단기간에 외환보유고 80%를 털어서 미국에 넘기면 달러 부족 우려가 커지며 환율이 급등할 수 있다. 자칫 1997년 외환위기가 재현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최근 우리 정부는 미국에 무제한 통화 스와프 협정 체결을 요청했지만 성사 가능성은 낮다. 미국이 통화 스와프 협정을 체결한 통화는 유로, 영국 파운드, 일본 엔, 캐나다 달러, 스위스 프랑이다. 국제 외환시장에서 24시간 활발히 거래되는 일명 기축통화들이다. 달리 표현하면 언제든 쉽게 환전이 가능한 통화다. 한국의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이지만 원화는 거래시간이 제한돼 국제 외환시장에서는 잘 거래되지 않는다.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 정부가 외환관리를 엄격히 한 탓이다. 스와프 체결 주체도 정부가 아닌 중앙은행, 즉 연준이다.
미국-일본 모델의 치명적 단점이 부각되며 주목받는 방법이 미-EU 모델이다. EU 기업들은 향후 3~4년간 미국 내 인공지능, 에너지, 고급 제조업 등 전략 부문에 6000억 달러 추가 투자를 약속했지만, EU가 직접 투자금 지급을 약속하거나 구체적 세부 투자계획을 명시하지 않았다. EU의 특성상 회원국 별로 투자액을 나누고 이를 다시 기업 단위로 배분하는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은 이행 수준이 부족할 경우 추가 관세를 다시 적용할 방침이지만 EU로서는 상당한 시간을 번 셈이다.

한편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무리한 투자 요구가 글로벌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도 우려된다. 대미 투자자금 마련을 위해 EU, 일본, 한국이 단기간에 해외자산을 대규모로 처분하면 자산가격이 급락할 수 있다. 특히 EU와 일본은 미국 국채 최대 투자자다. 현금화가 쉬운 미국 국채를 대규모로 매각하면 장기금리는 상승압력을 받게 된다. 동시에 대규모 달러가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면 단기금리는 하락하고 물가는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중앙은행(ECB), 모건스탠리 등도 “정상적인 위험분산 구조가 붕괴될 수 있다”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최열희 언론인 mast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