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 최서비·주장 김채영 맹활약, 9년 만에 2번째 통합우승…꼴찌 후보에서 ‘지난해 멤버 그대로’가 신의 한 수로

운명의 최종 3차전, 초반 분위기는 삼척이 주도했다. 삼척의 주장 김은지 9단은 2국(속기)에서 부광약품의 신예 이나현 2단을 상대로 171수 만에 백 불계승을 거두며 선취점을 따냈다. 정규리그와 포스트시즌을 합쳐 압도적인 무력을 과시해 온 김은지다운 승리였다.
그러나 부광약품에는 기적을 쓰는 신예 최서비 2단이 있었다. 1국(장고)에 출전한 부광약품 3지명 최서비 2단은 삼척 2지명 권효진 8단을 상대로 패색이 짙던 바둑을 뒤집었다. 인공지능(AI) 승률 그래프가 1%까지 떨어졌던 절망적인 상황에서 상대의 상변 대마를 포획하며 255수 만에 흑 불계승, 승부의 균형을 맞추는 대역전극을 연출했다. 최서비는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권효진 8단을 두 번이나 잡아내며 팀 우승의 일등공신이 됐다.

김채영 9단은 우승 확정 후 인터뷰에서 “결과가 좋아서 너무 기쁘다. 올해 타 기전에서 성적이 좋지 않아 힘들었는데, 여자바둑리그에서의 활약이 큰 동기부여가 됐다”며 “이번 시즌은 개인적으로도 정말 많은 의미가 있는 시즌”이라며 감격의 미소를 지었다. 김채영은 이번 포스트시즌 내내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김채영과 아이들’이라 불리던 팀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삼척으로서는 용병 리허 5단의 공백이 뼈아팠다. 중국 여자바둑 랭킹 상위권자인 리허는 1차전 패배 후 자국 내 일정 문제로 2, 3차전에 출전하지 못했다. 에이스 김은지를 뒷받침해 줄 확실한 카드가 사라진 삼척은 결국 결정적인 순간 전력 누수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 대목에서 한국 바둑계의 고질적인 문제인 ‘용병 리스크’가 도마 위에 올랐다. 국내 최대 규모 기전인 KB국민은행 바둑리그에서도 중국 용병들이 자국 갑조리그나 국가대표 일정 등을 이유로 포스트시즌 등 중요한 경기에 불참해 승부에 김을 빼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번 여자바둑리그 챔피언결정전 역시 명승부가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허점으로 인해 챔피언결정전에 오른 팀이 100% 전력으로 맞붙지 못한 점은 오점으로 남았다. 바둑계 관계자들은 “리그의 흥행과 공정성을 위해서라도 용병 계약 시 최소한 포스트시즌 만큼은 출전을 의무화하거나, 일정 중복 시 조율할 수 있는 제도적 안전장치가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 이번 부광약품의 우승은 사령탑 이상훈 감독의 리더십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부광약품은 용병 없이 지난 시즌과 동일한 선수 구성을 유지했는데, 지난 시즌 성적은 7위였다. 전력 보강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맞이한 새 시즌이었기에 개막 전 전문가들은 부광약품을 최약체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훈 감독은 선수들을 믿었다. 시즌 전 선수 선발을 앞두고 주장 김채영이 “지난해 멤버 그대로 가고 싶다”고 요청하자, 이 감독은 고심 끝에 이를 수용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신의 한 수가 됐다.
이 감독은 “우승할 줄은 정말 몰랐다. 선수들이 너무 잘해줬다”며 공을 돌렸지만, 중요한 승부처마다 적재적소에 선수를 배치하고 하위권 팀의 패배 의식을 걷어낸 그의 지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우승이었다. 특히 최종전 3국에 김채영을 배치하며 “부담감이 큰 자리를 신예들에게 맡기는 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힌 대목에서는 베테랑 감독의 품격과 선수 보호 본능이 돋보였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한편, 2025 NH농협은행 한국여자바둑리그의 우승 상금은 6000만 원, 준우승 상금은 4000만 원이다. 지난 7월 개막해 5개월간 쉼 없이 달려온 여자바둑리그는 오는 12월 15일 열리는 시상식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언더독의 반란을 완성한 서울 부광약품의 우승은 기록과 데이터가 지배하는 승부 세계에서 팀워크와 신뢰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증명한 사례로 남게 됐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