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배 참가한 우크라이나·헝가리 소년, AI로만 공부해 자국 챔프 꺾어 “이 중 한 명 세계 정상 오를 것”
강원도 태백에서 열린 제20회 국무총리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현장에서 만난 ‘푸른 눈의 바둑집시’ 롭 반 자이스트 네덜란드 대표(64)는 바둑에 대한 애정을 이같이 표현했다. 한국을 15회 이상 방문하며 국내 바둑 팬들에게도 친숙한 그는, 대회 중 잠시 짬을 내 진행된 인터뷰에서 특유의 유머 감각과 40년 넘게 이어진 깊이 있는 바둑 인생을 풀어냈다.

롭 반 자이스트의 바둑 선진국 동아시아와의 인연은 아직 비자가 필요했던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덜란드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그의 인생은 1981년 자국 챔피언에 오르며 송두리째 바뀌었다. 세계 아마추어 바둑선수권 대회 초청장을 들고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은 것이다.
“아버지 생신 바로 다음 날이었는데, 엄청난 선물을 안겨드리고 떠났죠. 제가 집을 떠난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아버지께 드린 선물이었다고 지금도 농담처럼 말하곤 합니다(웃음).”
대회 후, 그는 자신에게 유일한 패배를 안긴 유럽인이었다며 말을 걸어온 한 일본인 아마추어 강자의 초대를 받았다. 프로 기사도 자주 이긴다는 그와의 대국을 통해 롭 반 자이스트는 큰 충격에 빠졌다. 부분적인 전투에서는 연전연승을 거두고도 종국에 이르러서는 항상 패배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는 “모든 전투에서 내가 이기는데도 바둑은 지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며 “그때 포석이나 정석, 그리고 판 전체를 아우르는 대세관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회상했다.
처음에는 3주만 머물겠다던 그의 일본 생활은 여러 사람의 호의와 바둑에 대한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인해 계속 길어졌다. 한 사람의 호의는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졌고, 그는 여러 아마추어 고수들의 집을 전전하며 바둑의 깊이를 탐구했다. 그러던 중 일본의 전설적인 기사 사카다 에이오 9단을 만나 그의 바둑 살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스물한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일본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일본 생활은 무려 34년간 이어졌다.

그는 단순히 바둑을 두는 것을 넘어 유럽에 바둑을 알리는 ‘전도사’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25년 전 출간한 그의 저서 ‘좋은 모양을 만드는 법(Making Good Shape)’은 유럽에서만 2만 5000부 이상 팔려나가며 많은 유럽인들에게 바둑의 묘미를 알리는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자신의 바둑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기사로 ‘우주류’의 창시자 다케미야 마사키 9단을 꼽는 그는, 자신이 부족했던 대세관과 광활한 상상력을 그의 바둑에서 보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케미야 9단의 바둑을 영어로 동시 통역하는 일도 여러 번 맡을 만큼 깊은 존경심을 표했다.
인공지능(AI)의 등장은 그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스스로를 ‘전투적 기풍’이라고 정의한 그는, 나이가 들며 수읽기의 속도가 느려지자 AI의 지혜를 접목해 스타일을 바꾸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AI를 통해 바둑이 좀 늘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판이 짜이고 중반전 혈투가 벌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더군요. 사람이 평생 생각하고 몸에 밴 기풍을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유럽 바둑의 미래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20년 안에는 유럽이 아시아와 대등한 수준에 오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구체적인 근거로 이번 국무총리배 유소년대회에 참가했던 우크라이나의 8세 소년과 헝가리의 11세 소년을 예로 들었다. 이들은 프로 기사의 지도 없이 오직 AI로만 공부해 인터넷 바둑 8~9단에 오르거나, 자국 챔피언을 꺾는 등 놀라운 성장을 보이고 있다.
“이런 어린 재능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기 때문에, 그들 중 한 명은 분명 세계 정상에 오를 겁니다.” 현재 유럽 최강으로 꼽히는 러시아의 일리야 식신 같은 기사와 세계랭킹 1위 신진서 9단의 실력 차이는 두 점 정도로 좁혀졌다고 그는 평가했다.
바둑이라는 언어로 세계인과 소통하며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 온 롭 반 자이스트. 그의 식지 않는 열정과 날카로운 혜안이 유럽 바둑의 밝은 미래를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