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만에 일본 실사 흥행 1위…낯선 전통극 ‘가부키’를 보편적 감동으로 풀어낸 175분 서사시
더 놀라운 건 이 성과의 주역이다. 올해 갓 50세를 넘긴 재일 한국인 이상일 감독(51)이다. 그는 최근 내한해 “일본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일본 문화와 친숙하다. 가부키 또한 마찬가지”라면서도 “저의 뿌리는 한국이고, 저는 한국인”이라고 당차게 말했다.

11월 14일 서울 강남에 위치한 ‘국보’의 배급사 NEW 사무실에서 만난 이 감독은 “일본에서도 누구나 가부키를 알지만 정작 잘 보지는 않는다”면서 “가부키가 주는 재미를 발견하는 것과 더불어 인간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을 통해 마음을 정화시키려 했다. 가부키 그 자체보다 가부키 배우들, 또 그를 지지하는 가족들에 대한 휴먼 드라마”라고 설명했다.
가부키는 지극히 일본적인 소재지만 이 감독은 그 안에 담긴 보편성에 초점을 맞췄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일본 전통극인 가부키 무대에는 성인 남성만 설 수 있다. 그래서 여성 역을 맡는 남자 배우인 ‘온나가타’는 오랜 수업을 통해 배출된다. 게다가 가부키는 ‘세습’이 전통이자 법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보’ 속에서 가부키 명문가인 하나이 한지로 가문의 아들인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 분)와 견습생이지만 출중한 실력을 가진 키쿠오(요시자와 료 분)의 관계는 애달프고 처연하다. 그렇게 ‘국보’는 두 사람을 축으로 내세우며 혈통과 세습, 경쟁과 우정, 그리고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이 감독은 “가부키는 의상이나 화장 등 외적인 부분으로 많은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복수, 에도시대 시민의 일상 등 보편적 삶을 다루고 있다”면서 “혈통으로 계승되는 예술이라는 특수성도 있지만, 이를 계승하려고 노력하는 인간 본연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분석에 대해 이 감독은 “물론 일본 사회에서 한국 이름으로 사용하고, 한국인이 일본에서 영화를 찍는 것에 대한 남다른 시선도 있다”면서도 “다만 한국인이 가부키를 소재로 영화를 찍었기 때문에 어색하다는 시선은 없다. (영화사적으로) 일본에서 22년 만에 1200만 관객이 본 실사 영화가 나왔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사람들이 이런 작품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 수치”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국보’는 빼어난 미장센과 완성도 높은 메시지 못지않게 긴 러닝타임으로 화제를 모았다. 무려 175분이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 쇼츠(Shorts) 시장이 득세하며 ‘더 짧게’를 외치는 트렌드와 등지고 있다. 이는 이 감독의 소신이 담긴 결정이다. “원작 소설이 길어서 그렇다”고 너스레를 떤 이 감독은 “키쿠오의 인생을 특별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마지막 황제’(162분) 같은 작품도 그렇듯이 한 사람의 인생을 담기에 2시간은 곤란하다. 3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그 시간 동안 지루하지 않게 몰입해서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보’의 성공은 일본뿐 아니라 충무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 영화 시장에서는 오랜 기간 애니메이션이 강세를 보였다. ‘국보’ 역시 실사 영화 중에서는 1위에 등극했지만, 애니메이션까지 포함한 일본 역대 흥행 순위에선 11위다. 올해 한국 극장가에서도 ‘귀멸의 칼날’ 시리즈가 연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체인소맨’ 시리즈가 인기를 끄는 등 쏠림 현상이 강해지고 있다. 20대 때 무섭게 성장하던 한국 실사 영화 시장을 보며 감독의 꿈을 키웠던 이 감독 입장에서는 흔들리는 충무로의 현실이 달갑지 않다.

재일 한국인 3세인 이 감독은 ‘훌라걸스’(2003) ‘용서받지 못한 자’(2013) ‘분노’(2016) 등으로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국보’는 올해 칸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받은 데 이어 일본 영화 대표로 2026년에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출품됐다.
안진용 문화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