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함’과 ‘오묘함’ 속 여성 서사 조력자로 활약…“장승조에게 악역 선배로 공감”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명확했으니까요. 또 그걸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님의 의지도 너무나도 명료하게 느껴졌어요. 그런 걸 보고 난 뒤에 진소백이란 역할이 이 드라마 안에서 어떻게 맞닿아 있을 지가 궁금해지더라고요. 캐릭터를 떠나서 출연 의지가 저절로 생기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죽였다’는 극심한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죽이기 위해 살인을 공모하게 된 두 절친 은수(전소니 분)와 희수(이유미 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극 중 이무생은 은수와 희수의 계획을 알아채고 그들을 도와주는 조력자이자 중화식자재 도소매업체 진강상회의 대표 진소백을 연기했다.
중국계로 추정되는 진소백은 이야기가 진전되는 동안에도 100% 아군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미스터리함을 갖춘 인물이다. 가정폭력 남편을 죽이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두 여자의 말도 안 되는 계획에 팔을 걷고 뛰어드는 그를 보며 시청자들은 ‘저렇게까지 타인을 믿을 수 있다고?’라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이 지점에 대해 그를 연기한 배우로서 이무생은 “만일 제가 진소백의 의도를 모두 이해하려고 하고, 파고들려 했다면 이 역할을 맡아선 안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청자들이 진소백을 의심하는 데엔 이미 악역으로 정평이 나 있는 배우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진소백의 외양이 더 큰 몫을 했다. 자르기 귀찮아서 대충 기른 것 같은 단발머리에 목깃이 넓게 펼쳐진 독특한 정장 스타일까지 누가 봐도 믿음을 주지 않는 스타일을 하고 있다. 이무생으로서는 실험적인 도전이기도 했던 이 ‘진소백 스타일’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그는 이정림 감독에게 그 공을 돌렸다.
“그 단발 머리 모양은 감독님이 제안해주신 거예요. 저도 처음 해보는 느낌인지라 저한테 잘 어울릴지 고민했는데 감독님이 괜찮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이제까지 머리카락을 길러본 적이 없어서 어색했는데, 의상까지 입고 세팅을 다 하고 나니 너무 진소백같더라고요. 제 개인적으로 진소백의 키워드는 ‘오묘함’과 ‘모호함’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결과도 스타일이 잘 맞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그 모습을 하고 나갈 용기가 났고요(웃음).”
철두철미하면서도 그만의 정의를 잃지 않는 ‘조력자’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법자’를 오가며 진소백을 연기한 이무생은 현장에서 누구보다 마음이 가던 배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악역으로서의 그 역시 겪어봤던 어려움을 혼자 앓고 있었던 장승조였다. 희수에게 극심한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겉으로는 로맨틱한 남편인 양 구는 노진표를 연기한 장승조는 지독한 열연을 펼치면서도 카메라가 꺼지고 나면 미안해 어쩔 줄 몰라했다는 게 출연진들의 공통된 이야기였다.
“저도 그런 역할을 많이 맡아 봐서 그 심정을 알죠. 진짜 너무 힘들거든요(웃음). 그런데 우리 (장)승조 배우는 현장에서 단 한 번도 힘든 내색을 안 비치더라고요. 진짜 프로예요. 저도 말로는 안 했지만 눈빛으로, 어깨를 토닥이면서 응원해 줬고요. 마음을 쓰다듬어 줬다고 할까요? 같이 악역을 해 본 사람으로서 동질감을 가지고 ‘우리 열심히 살자’하며 훈훈하게 마무리했죠(웃음).”

“은수와 딱 맞닥뜨린 순간부터 전소니 배우에게서는 대본에서 제가 본 은수의 느낌이 바로 나왔어요. 착 붙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제가 그린 진소백의 여백을 채워주는 은수로 있어줘서 전소니 씨에게 너무 고마웠어요. 그리고 희수 역의 이유미 씨한텐 사실 처음엔 정말 조심스러웠습니다(웃음). 맡은 역이 그렇다 보니 한마디하는 것조차 망설였는데, 보니까 이 친구는 온 앤 오프가 정말 확실한 친구더라고요. 너무 아무렇지 않게 재미있게 놀다가도 촬영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열연을 펼치죠. 진정한 프로예요. 저도 이번 작품을 통해 이 친구들을 통해서 정말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선과 악의 모호한 얼굴로 새로운 연기 변신을 보여준 이무생은 최근까지 넷플릭스에서만 ‘고요의 바다’, ‘더 글로리 파트 1, 2’, ‘경성크리처 시즌2’, ‘당신이 죽였다’까지 네 편의 작품에서 활약했다. “네 작품에서 나와서 ‘넷플릭스’인 것 같으니까, 다섯 번째 작품이 나오면 ‘오플릭스’가 되겠다”는 농담을 던질 정도로 넷플릭스랑 궁합이 잘 맞는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올해 데뷔 20주년을 맞은 그의 다음 작품 행보에도 눈길이 모이는 가운데 이무생은 연차와 상관없이 신인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마음가짐을 끝까지 유지해 나가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사실 그런 부분에 크게 의미를 두진 않아요. 그냥 내일이 항상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걸어와서 그런지, 20주년이라고 해서 제 연기가 더 달라지거나 하진 않는 것 같아요. 그런 것보다 어떤 캐릭터를 맡든 ‘편견을 갖지 않는다’는 제 나름대로의 초심을 잃지 않는다는 게 가장 중요해요. 스스로 재단해서 역할을 이해하는 순간 이걸 바라보는 시야의 크기가 작아질 수밖에 없거든요. 저는 최대한 캐릭터를 스펀지처럼 받아들이고 싶어요. 캐릭터든, 작품이든 편견 없이 바라보는 눈을 잃지 않는 게 제게는 가장 중요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