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흥행 이면 국내에선 이주민·장애인 배제 논란 여전…‘가치의 성숙’ 뿌리내려야 진정한 문화강국 도약

하지만 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질문 하나가 조용히 따라붙었다. '우리는 과연 우리 사회 안에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가.' 이 질문이 불편한 이유는 명확하다. 타인의 차별에는 즉각 반응하면서도, 정작 우리 사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혐오와 배제에는 무감각하거나 때로는 동조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물음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K팝, K드라마, 한국 영화와 게임은 세계 시장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글로벌 차트 1위, 해외 시상식 수상, OTT 플랫폼 흥행은 이제 낯선 일이 아니다. 정부는 문화산업 예산을 확대하며 이를 국가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그렇게 K컬처는 유행을 넘어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핵심 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분명히 짚어야 할 점이 있다. K컬처의 성공이 곧 한국 사회의 성숙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콘텐츠의 인기와 사회의 품격은 자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세계는 이제 "무엇을 만들었는가"뿐 아니라 "어떤 사회에서 만들어졌는가"를 함께 본다. 문화는 결국 그 사회의 가치관과 태도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 안에도 혐오와 배제의 장면은 적지 않았다. 코로나19 시기, 방역이라는 위기 상황 속에서 특정 국적을 향한 적대감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일부 업소에는 '노차이나 존'과 같은 문구가 등장했고, 외국인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한 검사 의무화 조치는 차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최근까지 이어진 혐중 시위 역시 정치적 갈등을 빌미로 혐오의 감정을 손쉽게 동원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성소수자 축제를 둘러싼 공공 공간 갈등,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향한 냉소, 피부색을 언급하며 이어지는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에 대한 낙인과 멸시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세계를 향해 다양성과 자유를 말하면서도, 정작 국내에서는 '다름'을 불편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이 질문에 하나의 힌트를 주는 도시가 있다. 말레이시아의 멜라카(Melaka)다. 말레이 반도 남쪽에 자리한 이 작은 도시는 15세기 무역 항구로 번성하며 동서양의 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이 되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일본의 식민지배를 차례로 거치면서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스며들었고, 그 과정에서 독특한 혼합 문화가 형성되었다.
역사적 갈등의 흔적도 남아 있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문화를 위협이 아닌 자산으로 받아들여 왔다. 존커 스트리트(Jonker Walk)를 걸어보면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문화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한자와 아랍어, 타밀어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고, 향신료 냄새와 한약 냄새가 뒤섞인다. 음식과 건축 양식은 서로의 전통을 흡수하며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정체성을 빚어냈다. 조금 더 걸으면 하모니 스트리트(Harmony Street)가 나온다. 한 블록 안에 힌두 사원과 이슬람 모스크, 기독교 교회가 나란히 서 있다. 서로 다른 신앙이 물리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공존하는 이 거리는 단순한 관광 명소를 넘어 멜라카라는 도시가 지향하는 가치를 그대로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이 공존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멜라카 역시 민족 간 갈등과 역사적 상처를 안고 있음에도, 다양성을 '관리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자산'으로 받아들이는 방향을 택했다. 그 결과 공존은 이 도시의 브랜드가 되었고, 다문화의 역사와 현재를 존중하는 운영 철학은 관광과 경제, 국제적 신뢰를 함께 키워냈다.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역시 이러한 다층적 문화 자산을 인정받은 결과다.
멜라카가 보여주는 가치는 DEI라는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DEI는 다양성(Diversity)·형평성(Equity)·포용성(Inclusion)의 약자다. 각각은 분리된 덕목처럼 보이지만, 함께 작동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다양성은 서로 다른 존재를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국적, 인종, 성별, 성적 지향, 장애 여부, 세대·계층의 차이를 전제로 제도와 문화를 설계하는 일이다. 형평성은 출발선의 차이를 외면하지 않는 태도다. "모두를 똑같이 대하면 공평하다"는 생각은 얼핏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구조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인 이들에게는 오히려 불공정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차이를 인식하고, 필요한 지원을 제공해 실질적으로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다. 포용성은 이 두 가지를 실천으로 연결하는 문화다. 공공 공간과 정책 결정 과정, 문화 생산의 현장에서 다양한 주체가 실제로 참여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DEI는 점차 국가 문화 경쟁력의 핵심 지표가 되고 있다. 이제 세계는 콘텐츠의 완성도뿐 아니라 그 사회의 태도까지 함께 본다. 다양성과 포용성을 갖춘 사회인지, 차별과 배제를 방치하는 사회인지에 따라 문화의 신뢰도는 달라진다. K컬처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어떤 가치를 실천하는지가 K컬처의 지속 가능성과 직결되는 시대가 되었다.
#K컬처의 다음 단계는 '가치의 성숙'이다
포용적인 사회에서 자란 이들은 더 넓은 세계를 이해하고, 다양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나눌 때 창의성은 깊어진다. 산업 역시 내부의 갈등과 리스크를 줄이며 안정적으로 성장한다. 반대로 혐오가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상상력마저 위축된다. 아무리 화려한 콘텐츠를 생산해도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닫힌 나라"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K컬처는 단순히 조회 수나 매출로 측정되지 않는다. 얼마나 다양한 삶을 존중하고, 제도적으로 형평성을 보장하며,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문화를 구축해왔는지가 중요하다. 그 가치가 콘텐츠에 스며들고 세계와 소통할 때 비로소 K컬처는 유행을 넘어 보편적 공감을 얻는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K컬처를 어떻게 더 확장할 것인지가 아니라, K컬처를 떠받치는 사회를 어떻게 더 포용적으로 만들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K컬처의 다음 단계는 규모의 확대가 아니라 가치의 성숙이다. 다양성·형평성·포용성이 사회 시스템 안에 깊이 뿌리내릴 때 우리는 비로소 문화강국이라 말할 수 있다. 그때의 K컬처는 단순한 산업 브랜드가 아니라, 공존을 설계할 줄 아는 사회의 이름이 될 것이다.
진형우. 예술단체, 세종문화회관, 문화도시센터장을 역임한 문화예술 기획자다. 문화에는 ‘동기, 방법, 움직임, 강렬함, 행동’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모습으로 정의돼야 한다고 믿으며 하루를 가치 있게 사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 중이다.
진형우 문화예술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