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사망후 한동안 상상속 남편과 ‘동거’
마가렛 대처가 지난 8일 오랫동안 앓던 뇌졸중으로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사진은 2010년 11월 대처의 모습. 이 당시에도 뇌졸중 증세가 심각한 상태였다. EPA=연합뉴스
다우닝가를 떠날 무렵 이미 환갑을 넘긴 64세였던 대처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었으며, 또한 정력에 넘쳐 있었다. 총리 시절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도 그녀가 이렇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운동보다는 건강하게 먹는 식습관 덕분이었다.
대처는 퇴임 후에도 국정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곧 나이와 병 앞에 서서히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문제는 육체적인 쇠퇴보다는 정신적인 쇠퇴였다. 정신적으로 쇠락한다는 것은 대처와 같은 자부심 강한 정치인들에게는 슬프고 굴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대처의 경우에는 그 쇠락의 정도가 눈에 띌 정도로 심했기에 더욱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날이 갈수록 건망증은 더 심해졌고, 때로는 방금 했던 말을 잊고 또 다시 반복하거나,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쉽게 이해를 못해 동문서답을 하는 일이 잦았다. 어떤 때는 집안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퇴임 직후만 해도 대처의 이런 상태를 눈치 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치명적이지도 않았을뿐더러 특히 공개석상에서는 워낙 완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귀가 잘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는 점 역시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가 지능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청력 때문이지 정신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급격히 떨어진 청력 때문에 한때 보청기를 착용하기도 했었지만 결국 불편하다는 이유로 사용하지 않았다. 때문에 대처에게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여야 했기 때문에 마치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비치곤 했다. 또 이마저도 귀찮은 사람들은 그냥 대처의 말을 무시하거나 혹은 바보처럼 대하기도 했다.
이렇게 귀가 멀고 정신적인 능력이 떨어지자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일도 많았다. 이에 그녀에게 앙심을 품고 있거나 적대적인 사람들은 그녀가 술에 취해 있다며 비아냥거리곤 했다.
기억력 감퇴로 인한 불편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만 겪는 것은 아니었다. 2001년 대처는 자신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외교 관련 책을 저술하고 있었다. 단기 기억력을 거의 상실했던 그녀는 초고의 한 페이지를 골라서 읽을 때면 맨 아랫줄까지 읽은 다음 앞서 읽었던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아 첫줄부터 다시 읽어야 하곤 했다. 또한 어떤 때는 한밤중에 침실에서 나왔다가 그만 방향 감각을 잃어서 다시 방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때문에 항상 복도에는 경찰관이 지키고 있었으며, 하루 24시간 가정부들과 비서들이 집안에 상주하고 있었다.
대처의 건망증과 의부증이 심해지면서 잉꼬부부로 알려졌던 남편 데이스 대처와의 사이도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당시 대처의 남편인 데니스는 나이에 비해 매우 정정한 데다 은퇴한 후에도 꾸준히 사교활동을 할 정도로 건강한 상태였다. 은행 거래 내역 가운데 혹시 잘못된 부분은 없나 꼼꼼히 살필 정도로 정신 상태도 멀쩡했다. 퇴임한 후에도 아내를 따라 해외순방길에 동행했는가 하면, 비싼 요금을 내고 택시를 타는 대신 버스를 타고 다닐 정도로 건강했다.
그럼에도 대처는 늘 자신보다는 남편의 건강을 걱정했으며, 항상 “남편은 어디 있죠? 괜찮나요?”라고 묻곤 했다. 하지만 이런 염려와 달리 결국 건강을 잃은 것은 남편이 아닌 대처 본인이었다. 그녀가 처음 뇌졸중 증상을 보인 것은 2001년 마데이라 제도에서 부부가 함께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당시 산 위에 위치한 야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대처는 갑자기 단어만 나열할 뿐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서 말하지 못했다. 이는 뇌졸중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흔한 증상이었지만 대처 본인은 한사코 고산병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런던으로 돌아온 직후 정밀검사를 받은 결과, 경미한 뇌졸중 진단을 받았던 대처는 이미 뇌에 손상이 간 상태였으며, 앞으로 스트레스 가득한 생활을 계속할 경우 뇌가 더 손상될 가능성이 크다는 경고를 받았다. 다시 말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미한 뇌졸중 증세는 계속해서 나타났다. 뇌졸중 증상이 간헐적으로 일어나자 얼굴 한 쪽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으며, 아침에 집에서는 멀쩡했다가도 사무실에 도착해서는 갑자기 말을 어눌하게 하는 증상이 종종 나타나곤 했다.
대처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자연히 다른 노부부들이 그러는 것처럼 부부 싸움도 증가했다. 대처의 건망증과 했던 말을 또 하는 습관은 데니스의 신경을 건드렸으며,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또한 대처가 갑자기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이상한 상상을 하면서 집착하기 시작하자 부부 사이는 더욱 소원해졌다. 아마 과거의 기억이나 의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데니스는 불륜을 저지르지 않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대처의 의심이 뇌질환이나 약물에 의한 것으로 추측했다.
아내에게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이 무렵 데니스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됐으며, 2002년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던 중 갑자기 악화된 증상 때문에 심장 바이패스 수술을 받고 말았다. 수술 후 잠시 호전되는가 싶던 병세는 결국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다시 급속도로 악화됐으며, 결국 그는 대처가 지켜보는 가운데 6개월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이 떠난 후 대처의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메릴 스트립 주연의 <철의 여인>에서도 잘 묘사됐듯이 대처는 남편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며, 상상 속의 남편과 대화를 나누면서 비현실적인 생활을 이어 나갔다. 7개월 동안 일을 할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이 혼란한 생활을 해나가던 대처는 결국 2004년이 돼서야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후 남편을 떠나보낸 슬픔에서 거의 벗어난 그녀는 다시 런던 공원에 주기적으로 산책을 나가거나 파티를 여는 등 사교 활동을 시작했다. 이 무렵에는 상대의 입술 모양을 읽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에 더 이상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대화를 할 필요도 없었으며, 과음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기 기억상실증은 여전했다. 남편이 떠난 후 부쩍 외로움을 탔던 그녀는 길 잃은 고양이 한 마리를 분양 받아 키우면서 애정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건강 악화로 병원에 잠시 입원했다가 돌아온 그녀는 이미 그 고양이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2005년 엘리자베스 여왕과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참석했던 80세 생일 파티 역시 대처에게는 다소 낯선(?) 자리였다. 당시 막힘없이 술술 축하 답례 연설을 하긴 했지만 그곳에 있던 극히 일부만이 그날 밤 대처가 그 자리가 무슨 자리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다.
2011년이 됐을 무렵에는 공개석상에서도 눈에 띄게 말을 어눌하게 했던 대처는 종종 한 문장을 완벽하게 말하지 못했으며, 때문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진지하게 요점을 말하려고 해도 늘 이야기는 딴 데로 새곤 했다. 말이 막힐 때마다 대처는 입을 다물고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 이럴 때마다 사람들은 대처의 말을 다 이해했다는 듯 밝게 대답을 할 것인지, 아니면 대처의 말을 앞뒤가 맞게 고쳐줄 것인지를 두고 늘 고민을 해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첫 번째를 택하곤 했다.
정신 건강에 비해 신체적인 건강 상태는 죽기 전까지 대체로 양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고령이었던 그녀에게 마지막 고비가 찾아온 것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직전이었다. 당시 심한 복통을 호소했던 대처는 방광의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후 퇴원했고, 그 후 갑자기 발병한 심각한 뇌졸중 증세로 결국 세상과의 끈을 놓고 말았다. 몇 번의 경미한 증상 후에 찾아온 한 번의 심각한 증상은 그야말로 무자비했던 것이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대처와 핸드백 길쭉하거나 각지거나… 겸손한 스타일’ 이런 점에서 대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영화 <철의 여인>에서 대처로 분했던 메릴 스트립 역시 영화 속에서 다양한 핸드백을 들고 나왔으며, 이는 대처의 스타일을 가장 잘 드러낸 소품이라는 평을 들었다. 이와 관련, 미국의 웹사이트인 <데일리 비스트>는 1979년부터 1990년 총리로 재직하던 시절 대처가 들고 다녔던 핸드백의 스타일에 대해서 한마디로 ‘겸손하다’고 말했다. 화려하거나 눈에 띄는 스타일 대신 여성스러우면서도 강인한 대처의 이미지를 그대로 나타내는 길쭉하거나 각지거나 혹은 여성스러운 디자인이 주를 이뤘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타일은 대처가 평소 즐기던 품위 있는 정장과 다분히 영국스러운 모자와도 잘 어울렸다. 특히 대처가 생전에 가장 아꼈던 핸드백은 검정색 가죽으로 된 ‘아스프레이’ 핸드백(사진)이었다. 각지고 심플했던 이 핸드백은 지난해 여름 경매에서 3만 9000달러(약 4400만 원)에 팔린 바 있다. 대처에게 핸드백은 비단 액세서리만은 아니었다. 대처는 자신의 파워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도구로도 곧잘 핸드백을 사용하곤 했었다. 테이블 위에 핸드백을 올려놓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그곳에 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으며, 이로 인해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좌중을 압도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핸드백으로 자신의 영역을, 즉 권력을 나타냈던 것이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