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도 밥도 굿바이…‘서민층의 몰락’
▲ 지난해 11월 당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인이 부인, 두 딸과 함께 시카고의 한 교회 앞뜰에 마련된 푸드뱅크에서 수백 명의 저소득층 주민에게 닭고기와 감자 등 식료품을 나눠주는 자원봉사 행사를 가졌다. EPA/연합뉴스 | ||
아프리카 최빈국 얘기가 아니다. ‘세계 최고 부국, 글로벌 경제리더’라는 자부심이 살아있는 미국의 현재 모습이다. 실직한 가장이 가족들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잇따르는 등 지난해 하반기 이후 본격화된 경제위기 속에 현재 미국인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30년대 공황 때와 비견할 만하다는 게 현지 전문가들 분석이다.
미국에서는 최근 굶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 미국 전역에서 푸드뱅크(빈곤층을 돕기 위해 설립된 일종의 긴급식량지원 보급소) 200여 개를 운영하고 있는 비영리시민단체 ‘피딩 아메리카’(Feeding America)의 1월 통계에 따르면 지난 연말 푸드뱅크를 찾는 방문객 수가 6개월 전인 지난해 여름보다 두 배가량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숫자로 보면 대략 3500만 빈곤층 중 연인원 2500만 명이 푸드뱅크를 통해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문제는 푸드뱅크를 찾는 빈곤층이 워낙 급증하다 보니 제대로 식량 보급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푸드뱅크 중 72%는 식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고 있어 결국 푸드뱅크를 찾은 일부 서민들은 끝내 굶주림을 해결치 못한 채 허탈한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푸드뱅크들도 고육지책을 내놓고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혜택을 주기 위해 개인별 방문 횟수를 제한하거나 1인당 급식량을 이전보다 축소하고 있다고 한다.
전 세계 금융위기의 근본 원인이 됐던 주택시장 붕괴 사태도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많은 시민들이 정든 자기 집이 경매로 넘어가는 것을 눈물로 지켜보고 있는 형편이다. 은행 대출금을 갚지 못한 시민들의 주택은 헐값에 경매장에 나오기 일쑤. 그런데 경매에 나온 물건은 많지만 실제 사겠다는 매수세가 실종되면서 ‘1000달러’(약 140만 원)대에 경매가 이뤄지는 주택까지 등장했다. 부동산업체 리알터닷컴에 따르면 1월 초 현재 미시간주 플린트시에서 18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22채, 클리블랜드에서 46채, 디트로이트에서 709채가 1000달러대 경매주택 리스트에 올라 있다.
디트로이트에서 초저가 경매주택이 다수 등장한 것은 이 지역이 미국 자동차 산업의 본고장으로, 자동차업체가 몰락하면서 지역경제가 완전히 죽었기 때문에 주택가격도 붕괴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 주택들은 주택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2000년대 초중반, 시민들이 은행대출을 끼고 구입했다가 대출금을 못 갚아 소유권이 은행으로 넘어온 집들이다. 경매로 넘어온 이런 주택들은 오랫동안 방치된 경우가 많아 대부분 내부수리가 필요하고 각종 관련비용 등이 추가적으로 1만 5000∼2만 달러 정도 든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이를 감안한다고 해도 한때 7만 달러를 호가하던 주택이 이제는 3만 달러 미만의 반값에 팔리고 있는 셈이다.
각 기업들이 대량해고를 실시하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직업훈련학교, 평생교육원을 찾는 해고자들도 늘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정부도 직업훈련학교에 다니는 실직자 27만 명을 지원하기 위해 경기부양법안 항목에 10억 달러를 별도로 포함시켰다. 그럼에도 이들이 실제 재취업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숙련된 노동자들까지 해고하고 있는 기업들이 많은데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 기술을 취득한 타 분야 출신을 선뜻 채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각 지방정부들도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미국은 연방정부이기 때문에 각 주정부가 실제 독립국가에 버금가는 규모로 재정운용을 한다. 그러나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으면서 주정부 곳간들도 바닥을 보이고 있는 위급한 실정이다. 미국 내 최대 주이자, 개별 국가로 따져도 세계 8위권 경제대국인 캘리포니아의 경우 이미 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지사가 지난 연말 비상사태를 선언한 상태다.
주정부들의 ‘실탄’이 바닥나면서 당장 주정부 및 산하 시청 소속 공무원들, 소방공무원이나 경찰 같은 민생 관련 공무원들 임금이 체불되는 상황까지 우려될 정도다. 또 일부 학교들도 운영자금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스쿨버스 운행을 줄이거나 수업에 필수적인 교보재까지 사들이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월 28일에는 한국의 우체국과 같은 US포스털서비스 존 포터 대표가 상원에 출석, “경기 후퇴 여파로 우편물이 급격히 줄면서 수입도 줄어들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현재 주 6일 실시하고 있는 우편물 배달을 주 5일로 줄일 수도 있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현재 미국 법률은 우편을 주 6일 동안 배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포스털서비스에 따르면 2008회계연도(2007년 10월∼2008년 9월) 미국 사회 우편물은 그 이전 회계연도보다 4.5% 줄어들었으며, 이에 따라 포스털서비스 측은 28억 달러(약 3871억 원)에 이르는 손실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 기업 지방정부들이 모두 고통을 겪으면서 이제 유일하게 남은 희망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신 뉴딜정책’이 얼마만큼 약발을 발휘할 수 있느냐로 쏠리고 있다. 그러나 819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퍼붓는 만큼의 경기 부양효과는 얻기 힘들 것이라는 비관론도 만만치 않다. 경기 후퇴라는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지만 대규모 재정적자로 인해 달러화가 폭락하거나 인플레이션 비율이 급등하는 등 부작용이 클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미국 경제의 ‘나비효과’를 톡톡히 겪는 한국으로서는 향후 예상되는 여러 상황 변화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