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박자 행보가 되레 ‘대세 상승’ 전조?
▲ 지난 9일 코스피지수가 올 들어 두 번째로 높은 상승률을 보이며 54.28포인트(4.30%) 오른 1316.35를 기록했다. 4월 들어 외국인이 국내증시에서 매수 공세를 펼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국내 증시는 외국인에게 완전 개방된 1998년 이후‘천수답 증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천수답은 어촌이나 산간지대에 위치해 빗물에 의해서만 벼를 재배할 수 있는 논. 순우리말도 ‘하늘바라기 논’이다. 천수답에 농사를 짓는 농부가 하늘만 바라보듯, 그동안 외국인 매매를 따라했던 국내 주식투자자는 짭짤한 수익으로 백전백승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외국인이 국내 증시를 쥐락펴락한 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런 현상은 최근 들어 더 심해졌다. 올 들어서도 외국인 매매동향과 코스피지수는 며칠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림자처럼 똑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향후 시장은 외국인의 매수 여부에 달렸다’는 보고서를 공공연히 내놓는 증권사가 한둘이 아니다.
사실 국내 증시의 외국인 주식보유 비중은 2004년 42%로 고점을 찍은 후 지속적으로 축소됐다. 연초에는 28%로, 2001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지난해 외국인들은 한국 증시에서 35조 원이 넘는 금액의 주식을 팔아 치웠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국내 증시의 시가총액은 지난해 5월에 1050조 원을 넘어섰지만 연말에는 500조 원대로 주저앉았다. 7개월 만에 500조 원가량이 공중으로 사라진 것이다.
물론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전 세계 주식시장도 폭락했다. 하지만 국내 증시의 하락세가 상대적으로 컸던 이유가 외국인 매도세 때문이라는 점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이런 상황에서 4월 이후 외국인의 국내 증시 귀환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외국인은 올 들어 한국 증시에서 4조 원대를 순매수하면서 애틋한 ‘애정’을 보이고 있다. 외국인들은 유가증권시장에서 4월 중 4일을 제외하고 매일 평균 2000억 원에 가까운 금액의 주식을 사고 있다.
특히 코스피지수가 1300p 선을 넘어선 지난 9일 이후에도, 매도세를 보이고 있는 기관과 달리 지난 23일까지 매수우위를 기록하면서 지수 상승을 이끌고 있다.이 같은 외국인들의 적극적인 매수 공세의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삼성전자 LG전자 포스코 등의 2009년 1분기(1∼3월) 실적발표에서 알 수 있듯이 기업들의 실적개선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강도가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의 한국지수 기준 1년 후 주당 순이익(EPS) 전망치는 4월 이후 하향세를 멈추고, 상향 조정되기 시작했다. 신흥시장(이머징마켓) 전체 전망치는 1.3% 상향 조정된 데 반해 우리나라 시장의 전망치는 1.9%나 상향 조정된 것.신중호 우리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그동안 외국인들은 국내 기업들의 실적개선에 대한 기대를 바탕으로 매수 강도를 높여왔다”면서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신흥시장과 선진시장 대비 실적개선이 강도 높게 진행된 것이 외국인들의 매수세를 자극한 주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실적을 따져 ‘사자’에 나선 외국인들은 실적 안정성이 높은 ‘경기방어주’보다는 운수장비(자동차·조선) 철강금속 전기전자(반도체·가전) 등 글로벌 경쟁력이 확보된 업종 위주로 매수하고 있다.
과연 이와 같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적극적인 주식 매수가 대세상승의 전조가 될 수 있을까. 외국인의 매수에도 불구하고 기관은 이달 들어 3조 원에 가까운 주식을 팔아치워 증시의 추가 상승을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다.
기관의 순매도는 프로그램 차익거래의 매도 물량과 함께 개인들이 연일 주식형 펀드에서 자금을 빼내면서 펀드 환매를 위한 현금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외국인과 기관의 엇갈린 행보를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지적했다.
역대 대세상승 시기에 외국인의 주식 매수가 항상 기관보다 앞서 이뤄졌고 기관은 뒤늦게 동참했던 것으로 미뤄 이번에도 비슷한 행적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외환위기 시절에 외국인은 코스피지수가 300p대에 머무르던 1998년 9월부터 주식을 사들여 다음해 4월 지수가 700p 선을 넘어설 때까지 순매수 기조를 이어갔다. 하지만 기관은 1999년 2월까지 순매도 행진을 벌이다 같은 해 3월부터 뒤늦게 주식 매수에 합류하는 모습을 보였다.코스피지수가 2000p를 넘어 한국 증시 사상 최고의 대세상승 시기였던 2007년에도 비슷한 모습이 연출됐다.
외국인은 코스피지수가 1400p 선 부근이었던 2006년 12월부터 순매수 행진을 시작해 지수가 1700p를 넘은 다음해 5월까지 대체적인 매수 기조를 유지했지만 기관은 2007년 6월에야 동참했다. 이수진 하나대투증권 애널리스트는 “과거의 대세상승 국면을 보면 상승 초반은 외국인이 주도하고 후반은 기관이 주도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외국인의 순매수가 오는 6월 한국 증시의 MSCI 선진국지수 편입을 겨냥한 행보라는 분석도 있다.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에서 운용하는 MSCI 지수는 글로벌 펀드가 국가별 투자 비중을 정할 때 참고하는 세계적인 벤치마크로, 우리나라는 현재 MSCI 신흥국지수에 편입돼 있다. 이경수 신영증권 애널리스트는 “최근 외국인 투자자들의 적극적인 주식 매수는 한국 증시가 MSCI 선진국지수에 편입될 가능성을 겨냥해 외국인이 미리 주식을 사들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이 지금 씨앗을 뿌려 과실을 맺을지, 아니면 실패의 쓴맛을 볼지 현재로서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2분기(4~6월)의 실물경기 위기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기관의 ‘방패’가 외국인의 ‘창’보다 나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여하튼 삼성전자를 비롯한 외국인 매수 실적우량 블루칩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져볼 만한 시점이다.
류민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