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들끼리 퇴직 당일 재취업… ‘핵을 품은 도적들’
김제남 진보정의당 의원을 통해 입수한 ‘퇴직당일 재취업한 한수원 2급 이상 직원들의 명단’.
“정말 오만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자신들만의 폐쇄성과 독점성을, 그야말로 즐기고 있다.”
국회 교과위에서 오랫동안 원전 비리에 관심을 두고 활동해온 유기홍 민주당 의원이 ‘핵마피아’를 두고 제일 먼저 꺼낸 말이다. 이미 다수의 핵마피아들을 소환해 수차례 걸쳐 공청회를 개최했다는 유 의원은 그때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용어로 일반 참석자들을 적잖이 농락시킨 핵마피아들의 태도에 분노했다고 한다.
핵마피아들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한국 핵산업계의 규모는 천문학적인 수준이다. 총매출액은 19조 8719억 원(발전 사업 매출 14조 2170억 원, 기타 매출 5조 6549억 원)이며 총 투자금액은 8조 7806억 원 규모다. 국내에서 이에 종사하는 인력은 2만 6200명에 달한다.
대한민국 핵마피아는 ‘정부(공공)기관-산업계-학계’로 이어지는 강력한 ‘철의 삼각’으로 이뤄져 있다. 뿌리이자 공급처는 원자력학계다. 국내 핵공학과가 설치된 대학은 서울대, 한양대, 경희대, 조선대, 카이스트, 고작 다섯 곳. 특히 ‘핵마피아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의 강창순 전 위원장과 이은철 현 위원장을 비롯해 원전업계 헤드쿼터 상당수가 서울대 핵공학과 출신들의 차지다. 비좁은 원전학계 특성상 그들의 폐쇄성은 뿌리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핵마피아의 중심은 단연 산업계다. 최근 문제시되고 있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을 중심으로 삼성, 현대, 두산, 대림 등 원전 건설업체와 불량부품 공급처였던 ‘새한티이피’ 같은 수많은 부품 공급 업체들이 존재한다.
핵마피아들이 분포해 있는 세 번째 꼭짓점은 원전 관련 정부(공공)기관. 원자력안전기술원과 원안위는 원전업계의 안전을 도모하고 규제하는 역할을 하는 정부기관이지만, 반대로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경우, 막강한 재단 자금을 바탕으로 원전산업의 당위성을 홍보하고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철의 삼각’을 이뤄 분포하고 있는 핵마피아들은 학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응집력과 폐쇄성을 특징으로 한다. 저마다 영역은 다르지만, 원전산업의 진흥과 확대를 바라는 마음은 매한가지. 무엇보다 놀라운 건, ‘정부(공공)기관-산업계-학계’의 각 영역 핵마피아들은 폐쇄된 그들만의 세상에서 이동이 활발하다는 것이다. 이는 이해관계와 목적이 달라야 하는 영역 간의 이동도 스스럼없이 발생한다.
<일요신문>은 이와 별개로 김제남 진보정의당 의원을 통해 ‘퇴직당일 재취업한 한수원 2급 이상 직원들의 명단’을 입수했다. 이 명단을 토대로 보면 한수원에서는 지난 2002년부터 최근까지 무려 70명에 달하는 2급 이상 직원들이 퇴직한 당일, 곧바로 관련 업체 사장, 고문, 이사, 연구원 등 간부직으로 재취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한수원 1급 간부였던 오 아무개 씨는 지난해 3월 31일 퇴직하자마자 원전건축업체인 두산중공업 기술자문으로 재취업했으며, 올해 3월 31일 퇴직한 김 아무개 씨는 퇴직 당일 관련 중소기업 부사장으로 들어갔다.
상당수 한수원 간부들이 현직 시절, 이해관계에 얽혀 있던 관련 업체와 이미 퇴직 전 전관예우를 통해 재취업을 약속받고 퇴직 당일 재취업의 기쁨을 만끽했다는 의혹 제기가 가능하다. 이번에 논란이 되고 있는 새한티이피 역시 이 같은 전관예우를 통해 한전기술 등에서 재취업한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요신문>은 유기홍 민주당 의원을 통해서도 한 가지 흥미로운 자료를 확보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원전업계의 안전규제를 담당하는 원자력안전기술원 소속 직원 422명 중 무려 142명이 원전업계의 발전과 진흥을 도모하는 정부기관, 산업체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 중에는 원자력안전기술원의 피검 대상인 한전 및 자회사 등 발전사업자 출신이 37명, 원전산업체 출신이 29명이나 포함됐다. 규제 대상에서 규제의 주체로 많은 이들이 이동한 것이다. 이밖에도 원전업계의 진흥을 도모하고 대변하는 한국원자력산업회 출신 인사들도 명단에 있었다.
유기홍 의원은 “원자력의 진흥과 규제는 명확한 대척점에 서있다”면서 “원자력 진흥에 서 있는 사람들이 갑작스레 규제하는 영역으로 간다면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이는 명확하게 잘못됐고 앞으로는 막아야 하는 것들”이라고 꼬집었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원전신화’의 목소리를 확산시키기 위한 원자력문화재단의 활동은 ‘핵 카르텔’의 한 부분으로 지적되고 있다. 원자력문화재단의 천병태 대표이사는 2007년 원안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원자력을 규제하는 기관에 있던 인물이 하루아침에 원자력 홍보기관으로 옮겨간 것이다. 김제남 의원은 “우리나라는 원자력 진흥(홍보)기구와 원자력 규제기구가 굉장히 불균형한 상태”라고 강조했다.
이렇듯 핵마피아들은 본인들의 영역 내 이동과 교류는 ‘회전문’이라 일컬어질 만큼 무척이나 활발하지만, 반대로 외부의 접근에 대해서는 폐쇄적으로 차단한다. 이러한 현상은 국회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의원들 사이에서 가장 협조가 안 되는 기관 중 하나가 한수원이라는 사실은 정평이 나 있다.
김제남 의원은 “한수원에 인력들의 출신 학교와 학과 등 관련 자료를 수차례 요청했지만, 대부분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며 “다른 국가 발전사업자들의 경우, 자료를 요청하면 대부분 응하는 것과는 달리 무척이나 폐쇄적이고 독점적”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옛 교과위나 현 미래위 소속으로 한수원 등 원전업계를 상대하는 의원들과 보좌관들 사이에서 똑같이 나오는 불만이다.
부산 기장군 장안읍에 위치한 고리 원자력 발전소. 일요신문 DB
최근 여야 협조 하에 비상임위원 4명이 새로이 선임된 원안위를 두고 유기홍 의원은 “규제기관이지만, 핵마피아가 주도하는 이상한 조직”으로 평했다. 원전 규제를 본분으로 삼는 전문위원의 면면을 살펴보면 유 의원의 말도 일면 일리가 있다. 장순흥 위원(서울대 핵공학과 출신, 현 카이스트 교수)의 경우 지난해 언론사 기고문을 통해 “이명박 정부의 아랍 원전 수출을 발판으로 더 많은 원전을 수출하자”며 원전산업 진흥론을 펼친 바 있고, 서균렬 위원(서울대 핵공학과 출신, 현 서울대 교수)은 아예 ‘필로소피아’라는 원전 컨설팅 업체의 대표를 맡고 있다.
유 의원의 말을 빌리자면, 원자력안전위원장 재직시 자기 정체성을 잃고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해 ‘원전계의 현병철’로 불렸다던 강창순 전 위원장(올해 4월까지 재직)은 지난 2004년 서울 관악산에 핵폐기물처리장을 설치하자는 섬뜩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우리 사회에는 ‘사학 마피아’, ‘금융 마피아’ 등 사회악을 야기하는 각종 마피아 집단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핵마피아의 그릇된 카르텔은 직접 국민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른 마피아와 크게 다르다. 핵마피아의 카르텔에서 비롯된 비리로 인한 제2의 후쿠시마 사태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김제남 의원은 무엇보다 한수원의 독과점 구조를 깨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한수원이라는 공기업 조직 하나에 200만 개 가까운 부품이 드나든다. 부품을 납품하는 수천 개의 업체가 오직 한수원 하나만 바라보고 있다”며 “독일처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그리고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다중의 공개 감시·감독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기홍 의원은 지난해 본인이 발의해 상정돼 있는 원안위 개정안을 토대로 “상임위원을 현재의 두 명에서 여섯 명으로, 전체위원을 현재의 일곱 명에서 열두 명으로 늘리고 이들의 인사권도 국무총리와 국회, 시민사회로 각각 분산시켜야 한다”고 지적하며 “원안위원장은 청문회를 통한 철저한 검증을 거쳐 임명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