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갈죄? 판사들도 갑론을박
신 씨는 2007년경부터 윤 씨에게 매달 500만 원의 생활비를 줬고, 가임기를 피해 한 달에 2번 정도 성관계를 가졌다. 혼외 자식을 원하지 않았고, 훗날 자녀들 간의 상속분쟁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씨는 신 씨의 아이를 갖고 싶어 했고, 신 씨에게 알리지 않고 아이를 갖기로 마음먹었다.
윤 씨는 2008년 5월부터 산부인과에 다니며 난포의 크기를 재고, 배란기를 확인했다. 결국 6개월 만에 신 씨의 아이를 갖는 데 성공했다. 이후 신 씨에게 프랑스 여행을 간다고 말하고 유산 방지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임신이 안정기에 접어든 이듬해 1월 윤 씨는 신 씨에게 “아이를 가졌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갈등이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신 씨는 윤 씨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종용했고 윤 씨는 그럴 수 없다고 맞섰다. 화가 난 윤 씨가 “100억을 주면 아이를 지우겠다”고 말하자, 신 씨는 금전 보상으로 달래야겠다고 마음먹고 두 사람을 잘 아는 중개인을 내세워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과정에서 “아이를 낳아 회사 앞에서 시위하겠다” “아이를 낳아도 절대 돌보지 않겠다” 등의 험한 말도 오갔다. 협상 금액이 ‘20억→20억+20억 빌라→40억→50억’ 등으로 올라가는 등 지루한 줄다리기 끝에 두 사람은 50억 원에 낙태를 하기로 합의했다.
통장에 입금된 현금을 확인한 윤 씨는 임신 5개월 만에 낙태를 했으나 신 씨가 갑자기 돌변했다. ‘50억 원을 돌려주지 않으면 공갈죄로 고소하겠다’고 나온 것. 윤 씨가 돈을 돌려주지 않자 신 씨는 윤 씨를 공갈 혐의로 고소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윤 씨의 행위가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돈을 갈취하기 위해 협박했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또 “임신은 협박 의도와 무관한 자연스러운 본능의 발로로 볼 수 있다”며 “신 씨가 먼저 돈을 조건으로 낙태를 요구하기 전까지는 임신을 이유로 돈을 요구한 적이 없는 점도 감안했다”고 말했다. 이어 “50억 원의 합의금은 신 씨가 혼외자 부양과 수천억 원대에 달하는 재산에 관한 분쟁을 우려해 임의로 준 것으로 볼 여지가 크고, 18세 연상의 유부남인 신 씨와 독신 여성인 윤 씨가 4~5년에 걸쳐 맺어온 연인 관계의 청산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 사건은 법원 내부에서도 관심이 매우 높았고, 해당 사건의 부장판사와 젊은 판사들이 따로 공갈죄 성립 여부를 두고 논의를 거듭했을 정도로 이례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부장판사들이 “수천억 원대의 자산가가 혼외정사로 임신 사실을 통보받은 것 자체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며 공갈죄 성립 여부를 면밀히 따져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반면, 젊은 판사들은 “아이에게 해를 끼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낳겠다는 건데 이를 공갈죄로 볼 수 있느냐”며 “법원 내에서 의견이 엇갈리는 것 자체가 공갈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반증”이라고 맞섰다.
조남문 법무법인 서정 변호사는 “강도죄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항거불능의 위협 상태에서 금전을 갈취하는 것이라면 공갈죄는 상대에게 공포심을 갖게 하는 해악의 고지이긴 하나 협상, 타협 등을 통해 요구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며 “이 사건의 경우 신 씨가 합리적으로 숙고한 후 가정불화 및 상속 분쟁을 피하기 위해 금전을 주는 것이 낫겠다고 여겨 협상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즉 신 씨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항거하기 어려운 위협 상태에서 협박에 따라 재물을 갈취당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상미 기자 sh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