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가 왕노릇? 리모컨은 호랑이 손에
한화 김승연 회장, CJ 이재현 회장, SK 최태원 회장(왼쪽부터 차례대로).
CJ그룹은 손경식 그룹 공동회장, 이미경 CJ E&M 부회장, 이채욱 CJ대한통운 부회장, 이관훈 CJ(주) 사장, 김철하 CJ제일제당 사장으로 구성된 이른바 ‘5인 그룹경영위원회’가 구속(형집행정지)된 이재현 회장을 대신하고 있다.
한화그룹도 김연배 한화증권 부회장, 홍기준 한화케미칼 부회장, 홍원기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사장 등이 비상경영위원회를 구성해 부문별 경영의 책임을 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룹 경영은 오너의 영향력 하에 놓여있다. 후계구도가 가족 내 상속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집단경영을 하고 있는 대리인들은 기업투자 결정이나 인사권을 행사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나마 현상유지가 이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다.
재계 관계자는 “그룹 오너가 자리를 비울 경우 오히려 경영진들 간에 충성경쟁이 벌어지기기 십상”이라며 “대개 총수에게 경영상황을 알리는 채널이 여러 개 가동되고 있을 것이고, 오너가 경영에 복귀했을 때 그에 대한 평가와 문책이 이뤄지는 게 상례”라고 말했다. 그는 “황제가 유고상태가 되면 제후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호시탐탐 노리는 정치권력의 세계와는 판이하다”고 설명했다.
SK그룹의 경우 김창근 의장이 대내외적으로 최 회장의 공식 대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중국 방문 때마다 경제사절단 일원으로 수행했고 그 때마다 현지에 진출해 있는 현지 사업장을 방문해 격려하는 등 최 회장이 역점을 둬온 글로벌 경영의 빈자리를 메우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김 의장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지난 2분기에 사상 최대 실적을 내는 ‘어닝 서프라이즈’로 그룹의 경영 안정에 크게 기여한 SK하이닉스도 박성욱 사장의 공로가 크지만, 안팎에선 “최태원 회장이 과감하게 결단해 인수와 투자를 했기 때문에 결국 성공을 거둔 것”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모든 공은 오너에게로 돌려지는 셈이다.
그룹 경영의 핵심 인물은 최 회장의 동생인 최재원 수석부회장이다. 그는 최근 최 회장의 재판에 결정적 증인인 김원홍 전 SK해운 고문을 대만에서 만나 귀국을 종용하다 어설프게 현장에서 함께 연행되는 바람에 김 전 고문에 대한 ‘기획체포설’까지 불거지게 했다. 이 일로 최태원 회장은 동생 최재원 부회장에게 “자숙하라”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변론 재개로 연기된 항소심 선고가 나올 때까지 최 부회장으로선 ‘조용한 행보’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렸지만, 항소심 결과에 따라 최 회장의 유고상태가 장기화될 경우 그룹 내 힘은 그에게로 쏠릴 수밖에 없는 구도다. SK의 한 관계자는 “최 회장의 말은 단순히 조심하라는 뜻이지 모든 일에서 손을 떼라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지금도 일상적인 국내 업무는 그대로 최 부회장이 처리하고 있다”고 전했다.
CJ그룹에서 이 회장의 경영공백을 메우고 있는 경영위원회는 일단 손경식 회장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CJ가의 ‘대모’로 불리는 이 회장 모친 손복남 고문의 동생으로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까지 내던지고 그룹 경영에 복귀한 손 회장은 경영안정을 위해 무게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집단경영체제라지만 사실상 가족경영의 틀이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주력사인 CJ제일제당 김철하 대표는 실적 악화로 고전하고 있는데, 침체된 회사 분위기를 살리는 것이 그의 주된 임무로 한정돼 있다.
이 회장의 공백 중에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최고경영자는 그의 누나인 이미경 부회장이다. 그동안 CJ E&M을 독자적으로 경영해왔는데, 최근 직접 투자·배급을 한 영화 <설국열차>가 관객 1000만 명을 넘볼 정도로 대박을 터뜨리면서 화제의 중심에 서 있다. 다른 계열사들까지 시너지 효과가 날 것이란 기대를 받고 있다.
더욱이 이 회장은 지난 20일 법원으로부터 3개월간의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석방됐다. 구속 전부터 앓아온 만성신부전증을 치료하기 위해 신장이식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이 회장의 거주지는 서울 중구 장충동 자택과 서울대병원으로 제한돼 있다. 이 회장은 이 병원에서 부인 김희재 씨의 신장을 이식받을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CJ그룹 사정을 잘 아는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이 워낙 꼼꼼한 스타일이어서 어찌됐건 ‘병상경영’이 가능한 상태가 됐다”면서 “사실상 경영공백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보다 먼저 ‘병상경영’을 하는 곳이 한화그룹이다. 김 회장은 지난해 8월 16일 1심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수감 후 조울증과 호흡곤란이 심해져 지난 2월부터 구속 집행정지를 연장, 재연장을 거듭하며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다만 건강이 악화되면서 정상적 판단이 힘들다고 판단한 지난 6월, 그룹 내 원로경영인들을 중심으로 비상경영위원회를 꾸려 경영안정을 도모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너 부재 상황이 1년을 넘기면서 최근 그룹의 글로벌 사업과 투자 부문에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지난해 80억 달러 규모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개발의 경우, 지난 7월 김연배 비상경영위원장이 직접 이라크를 방문해 정부 고위 관계자들을 접촉했지만 사업 추가 수주 확답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의 오너십을 대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집단경영체제는 경영안정과 함께, 자연스럽게 후계작업 준비를 관장하는 역할을 겸하는 쪽으로 탄력을 받고 있다. 지난 1일 김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전 한화솔라원 기획실장을 독일에 있는 한화큐셀의 전략마케팅실장으로 임명해 내보낸 것이 신호탄이다. 그는 태양광산업의 실적개선이라는 임무를 맡았는데, 해외 신시장 개척 경험을 통해 조속히 그룹 경영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평가받으라는 취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호랑이’가 없는 기업에서 ‘여우들’이 저마다의 역할과 위상을 떠맡아 활약하고 있지만, 그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은 공통적인 운명인 듯하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