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계 향한 ‘초강력 사정’ 칼갈고 있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가운데)의 자진 사퇴를 두고 정치권 외압 여부가 논란이 될 전망이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조선일보>의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 아들 의혹 보도가 나가자 사실여부뿐만 아니라 취재 정보의 출처에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채 전 총장의 ‘혼외 아들 의혹’ 보도는 우연찮게도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내란음모·선동 등의 혐의로 전격 구속된 다음날 터져 나왔다. 또 채 전 총장 취임 이후 CJ그룹 해외비자금 사건,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의 대선·정치개입 사건, 4대강 입찰·담합 의혹 등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 되거나 소강상태에 접어든 상황이었다.
대형사건이 마무리된 직후 검찰총장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한 내용이 특정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자 청와대와 국정원이 그 배후로 지목됐다.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74)이 임명 직후부터 한 달간 민정수석실 등을 동원해 채 전 총장의 뒤를 캤다는 의혹이었다. 채 전 총장의 과거사에 대한 추적을 누가 지시했는지는 아직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국정원이 어떤 식으로든 개입했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다. 경찰 고위간부 출신으로 국내정보 수집·분석을 담당하는 서천호 국정원 제2차장이 직원들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헌정사상 최초로 검찰총장후보추천위원회의 천거를 받아 임명된 채 전 총장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 등 청와대 측에서 ‘신뢰할 수 없는 인물’ ‘야당과 가까운 인물’ 등의 이유로 임명장 수여를 꺼렸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내용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의 대선·정치 개입 의혹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특별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검사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적용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윤 검사의 의견을 신뢰한 채 전 총장은 법무부 청와대 등과 마찰을 빚었다. 특히 채 전 총장 취임 이후 검찰의 국민적 신뢰회복에 결정적 단초가 된 사건은 CJ그룹 해외 비자금 사건이다. 이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장을 맡고 있는 윤대진 검사가 주도했다. 윤석열 검사와 윤대진 검사는 각각 ‘대(大)윤·소(小)윤’으로 불리며 채 전 총장과 가까운 특수통 검사들로 손꼽힌다.
청와대의 지시 여부를 떠나서 국정원이 채 전 총장의 의혹을 캐고 이를 언론사에 흘린 배경에 대해서도 말이 무성하다. 이 중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야당인 민주당과의 ‘내통설’이다.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혐의가 3년간의 내사 끝에 공개수사로 전환할 무렵 민주당은 국정원 개혁과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특검 수사 등을 주장하며 정국의 유리한 고지를 향해가고 있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장외투쟁 카드를 꺼내들면서 새누리당은 수세로 몰리는 듯했다. 30여 년 만에 ‘내란음모’라는 단어가 역사에 다시 등장하자 민주당은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해 통합진보당과 같이 ‘국정원의 날조 사건’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대선·정치 개입 사건의 특검 수사를 더 강하게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예상과 달리 신속하게 통합진보당과의 ‘선 긋기’에 나섰다. 국정원 개혁 등을 주장하며 시민단체의 참여를 독려해 오던 ‘촛불집회’도 통합진보당이 참석한 자리에는 가지 않았다. 이석기 의원의 RO 활동 등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잇달아 내놨다. 이어 이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처리에 합의하고 본회의를 통과시키는 것도 ‘일사천리’였다.
왼쪽부터 박근혜 대통령, 김기춘 비서실장, 황교안 법무부 장관.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청와대와 국정원은 채 전 총장 관련 의혹을 터뜨리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와 국정원은 이번 사건과 자신들의 연관성을 모두 부인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임 씨가 “채 총장의 이름을 내가 임의로 사용해 학생기록부에 올렸다”는 취지의 해명을 내놨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우연히 아들의 아버지도 ‘채’씨이고 채 전 총장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해명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채 전 총장이 소송과 유전자 감식 등의 강수를 둔 것도 이 때문이다.
혼외 아들 사건의 ‘키’는 법원이 쥐고 있다. 또 혼외자로 지목된 아들 채 군과 어머니 임 씨가 유전자 감식에 응할 것인지 여부도 또 다른 쟁점이다. 채 전 총장과 관련한 의혹이 잦아들지 않고 계속 확전 양상을 띤다면 검찰로서는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채 전 총장은 바로 이 대목에서 자신을 흔드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항하기 위해 정재계에 대한 대대적 사정 카드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채 전 총장이 사퇴하기 직전 검찰의 한 고위 관계자는 “여론의 추이를 지켜본 뒤 검찰이 갖고 있는 모든 첩보를 동원해 정·재계에 대한 총력 수사를 할 것”이라며 “수사를 진행하다 보면…”이라는 묘한 말을 꺼냈다. 검찰 본연의 임무인 비리 수사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검찰총장 흔들기’ 시도도 차단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채 전 총장이 검찰의 기획수사에 대한 역풍을 무릅쓰면서까지 초강력 사정 카드로 난국을 수습하려 했지만 결국 실행도 하기 전에 그 저항 계획이 청와대 권력에 진압당한 셈이 됐다.
법조계 주변에서는 채 전 총장의 사퇴에 대해 ‘청와대 김기춘 비서실장이 각본을 쓰고 황교안 장관이 계획을 마련해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처리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검찰 사상 최초로 그 수장이 감찰을 받는 것이 법무부 장관의 개인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박근혜 정권이 혼외 아들 논란 과정에서 보여준 채 전 총장의 ‘정치적 저항’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보고 즉각 처리에 나섰다는 것이다. 더구나 채 전 총장이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해 민주당과 ‘내통’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더 이상 컨트롤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내렸을 수 있다.
한편 채 전 총장은 이번 사건을 통해 거물 정치인 채동욱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먼저 민주당은 채 총장 사퇴에 대해 법사위 소집을 요구하며 청와대의 검찰 흔들기를 규명하겠다고 나섰다. 이는 채동욱-민주당 내통설에 힘을 실어주는 대목이다. 더구나 채 전 총장이 권력에 항거하다 부당하게 희생당한 검찰총장으로 인식되면서 민주당이 영입 1순위로 거론하고 있다는 얘기가 벌써 나오고 있다. ‘제2의 안대희’라는 평가도 있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채동욱 전 총장 사퇴에 대해 “청와대가 악성 후폭풍을 만날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국가기관의 수장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멋대로 바꾸는 선례를 남기고 있다. 양건 감사원장을 물러나게 할 때만 해도 여론이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국정원 댓글 사건을 기소하는 등 국민 지지를 받고 있는 채 전 총장까지 물러나게 한 것은 상당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총장 후임을 찾기도 어려울 뿐더러 청문회 통과도 가능할지 의문스럽다. 민주당과의 관계도 더 꼬일 가능성이 있다. 박근혜 정권이 감정만을 앞세워 갈등 정국을 증폭시키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승희 언론인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