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파 순이 묘사 힘들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정 박사는 “순이(주인공)가 죽는 장면을 묘사할 때 너무 힘들었다. 왜 시작했을까 후회가 들었다”며 “함께 작업한 일러스트 작가도 불과 8컷을 그리는 데 1년이 걸렸다. 마음이 아파 그릴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봄날>은 징용에 희생된 소녀 3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을 읽으면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큰 공장의 기계를 돌리고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12세 남짓의 순이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순이는 어른들의 전쟁이 없었다면 군복을 만들러 동원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정과 공동체가 아이들을 누에고치처럼 단단히 감싸서 보호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이다.
정 박사가 강제징용을 연구하게 된 데에는 특별한 가족사가 숨어 있다. 그의 큰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경제경찰로, 징용과 공출 등에 관여했다고 한다. 결국 큰아버지는 해방 후 대일협력자 혐의로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갔다. 이 과정에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그의 아버지도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역사의 심판을 받는 것이 맞다. 4개 국어를 할 정도로 지식인이었는데, 권력의 손을 잡고 경찰 노릇을 했으니 죗값을 치러야 하지 않겠나?”라고 담담히 말했다. 그는 이러한 가족사를 배경으로 일본 내 재일조선인의 노동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년 가까이 일제하 강제징용을 연구해왔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전쟁책임이 과거의 일이고, 현재를 사는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고 애써 외면해 버리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지를 묻자, 정 박사는 “일본을 규탄하고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생할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가, 어떤 일이 있었는가 이야기할 수 있어야 건강한 사회다. 유골봉환도 과거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경대학살은 아직까지 피해 신고를 받고 있다. 기념관도 지었다. 피해가 규명돼야 당당히 일본에게 요구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상미 기자 sh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