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때나 통하던 전략 아닌가요?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정치평론가는 박 대통령이 일파만파로 커져가고 있는 국가정보원 선거 개입 의혹 등 정치 현안에 대해 언제까지 침묵을 지킬지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지금까지 박 대통령의 정치역정을 돌이켜 보면 시시각각 터져 나오는 현안과 쟁점들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기보다는 말을 최대한 아끼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는 얘기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정보원 선거 개입 의혹 등 정치 현안에 대한 입장을 내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진은 박 대통령이 10월 24일 청와대에서 제프리 이멀트 제너럴일렉트릭 회장과의 접견을 앞두고 시간을 확인하는 모습. 연합뉴스
‘대통령이 나서야 풀린다’는 주장이 야권과 정치학자, 사회 원로는 물론 여당인 새누리당 중진 의원들에게서까지 나오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이 평론가의 진단은 너무 한가한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청와대와 새누리당 관계자들이 전하는 박 대통령과 그 주변의 기류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국정원 직원들과 군 사이버사령부 직원들이 대선 기간 중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논란이 될 만한 글을 올린 것에 대해서는 검찰 수사와 재판, 자체 조사 등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입장을 내놓는다면 그게 더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수사가 진행되는 민감한 시기에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수사 가이드라인처럼 비칠 수도 있기 때문에 차라리 아무 말 하지 않는 게 낫다는 얘기다.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지금 대통령에게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측의 의도가 절대로 순수하지 않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 관계자는 “야당들의 요구는 결국 국정원 직원들의 선거 개입 의혹에 대해 대통령이 사과하라는 것인데, 이건 한참 잘못된 얘기”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선거 개입이 맞는지, 맞는다면 그게 조직적이었는지 일부 직원들의 일탈이었는지 하나도 규명되지 않은 상황이고, 더욱이 진상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이 모든 건 전 정권의 일이지 박근혜 정부가 책임져야 할 일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이 관계자는 “박근혜 정부가 마치 엄청난 부정선거를 통해 출범한 것처럼 꼬리표를 붙이겠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청와대 내부의 이런 강경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새누리당 지도부와 친박계 핵심 인사들도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고 있다. 정몽준 이재오 이인제 의원 등 비박계 중진들이 정부·여당의 자성을 촉구하면서 청와대를 우회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는 당내에서 큰 힘을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 새누리당 관계자는 “당 지도부가 원칙적인 수준이라도 대통령의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청와대에 전달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실제 청와대 기류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싸늘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9월 4일 G20정상회의와 베트남 국빈 방문을 위해 서울공항에서 전용기를 이용해 출국하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하지만 ‘당 대표 박근혜’와 ‘대통령 박근혜’는 달라야 한다는 주장도 날로 거세지고 있다. 당 대표 시절에는 야당의 공세를 효율적으로 막아내고 제압하면 그만이었지만, 대통령이 된 현 시점에는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 정치학 교수는 “박 대통령과 청와대가 소위 민생 제일주의를 내세워서 현재의 난국을 돌파하겠다는 생각인 모양인데, 민생이라는 게 말로만 챙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대통령이 아무리 민생정치를 펴고 싶어도 관련 법안과 정부 예산안이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민생정치를 하기 위해서라도 야당과의 관계를 풀어내기 위해 대통령이 성의를 보여야 한다”며 “특히 국정원 직원 등의 선거 개입이 전 정권의 일이었지만, 박근혜 정부의 검찰과 국정원이 이를 축소하고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치 현안에 대한 대통령의 침묵이 진실 회피로 비칠 경우 여론의 역풍을 맞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실제로 지난 10월 25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10월 넷째 주 여론조사 결과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는 53%에 그쳤다. 전주보다 3%포인트 낮아진 결과로, 이 기관의 조사에서 67%까지 치솟았던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이제 50%선 붕괴를 우려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음을 보여준다.
지난해 대선 당시 박 대통령 선거캠프에서 일했던 한 관계자는 “대통령 지지도가 50% 밑으로 떨어질 경우 여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책을 펴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우려를 표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