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안들으면 듣게 할 것” 장담
포스코 측은 부인하지만 정준양 포스코 회장의 사퇴설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일요신문 DB
여권 내에서조차 KT와 포스코 회장 인사가 정권에 휘둘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이석채·정준양 회장 거취가 남다른 관심을 끌었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둘은 공공연히 “임기를 채울 것”이라는 의사를 나타냈지만 최종 결정은 여권 핵심부 몫이었던 셈이다. 집권 초반 청와대 참모진들과 여권 관계자들은 둘의 교체 여부를 놓고 수차례 논의를 한 결과 ‘시기상조’로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대통령 역시 교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청와대의 한 정무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단행한 인사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던 상황에서 KT와 포스코 회장 교체를 밀어붙일 경우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온건파’로 분류되는 허태열 전 비서실장이 민영화된 기업 인사엔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려 했던 점도 이석채·정준양 회장의 유임 가능성에 무게를 더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 신임을 등에 업은 ‘왕실장’ 김기춘 비서실장이 청와대에 입성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지지부진하던 공기업 인사가 급물살을 타면서 KT와 포스코 회장 역시 교체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검찰이 KT를 겨냥한 대대적인 수사에 나서고, 국세청이 포스코에 대한 강도 높은 세무조사에 착수하자 정치권과 사정당국 주변에선 회장 교체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일 것이란 관측이 확산됐다.
실제로 이석채 회장은 검찰과 국세청이 움직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의를 표명했다. 회사 측은 부인하지만 정준양 포스코 회장의 사의 표명설도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김 실장이 임명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사정라인의 친정체제 구축이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 양건 전 감사원장이 중도하차하지 않았느냐”면서 “역대 정권과 마찬가지로 현 정부도 검찰과 국세청을 동원해 이석채·정준양 회장을 압박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박 대통령 친인척과 관련이 있는 한 비선라인이 이석채·정준양 회장 교체를 여러 번 요구했다는 점이다. 비선라인에 속해있는 한 여권 고위 관계자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정권 초부터 (허태열 전 실장에게) 둘을 바꿔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 실장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 뜻을 둘에게 전했다”라고 귀띔했다.
이는 이석채·정준양 회장에게 직·간접적으로 현 정부의 의중이 전달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발언이다. 이 여권 관계자는 “현 정부 공기업 인사는 비서실장 산하에 있는 인사위원회에서 이뤄진다. 체계상으론 인사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 실장이 정점에 서 있다. 하지만 민간기업인 KT와 포스코 회장은 인사위원회에서 다뤄질 문제가 아니다. 또 정부가 나서기도 곤란한 측면이 있다. 우리가 막후에서 관여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석채 KT 회장은 직원들에게 이메일로 보낸 ‘사의의 변’을 통해 대대적인 인적 구조조정을 예고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A 씨는 또한 박 대통령에게 조언을 하는 원로들과도 친분이 두텁다. A 씨는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도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그는 지난 2009년 초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물러났던 이구택 전 포스코 회장 후임을 놓고 정준양 현 회장과 윤석만 포스코건설 상임고문이 각축을 벌일 당시 윤 고문을 지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윤 고문은 현재 정준양 회장 후임자로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인사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베일에 싸여있던 A 씨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게 된 것은 9월경부터 몇몇 금융공기업과 KT·포스코 회장 인선에 관여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부터다. A 씨는 재계 및 정치권 인사들과 은밀히 접촉하며 적임자를 물색했다고 한다. 지난 10월 초 A 씨를 직접 만났다는 한 재계 관계자는 “강남의 한 고급 한정식 집에서 A 씨를 처음 봤다. A 씨는 KT와 포스코 회장 교체를 기정사실인 것처럼 언급했다. (이석채·정준양 회장이) 말을 안 들으면 듣게 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또 일부 계열사 사장 자리도 특정 인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박 대통령 친인척과 일주일에 한 번은 보는 관계라고 했다”면서 “최근 이석채·정준양 회장이 물러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A 씨가 허풍을 떠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전했다.
A 씨가 인사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막강한 파워를 발휘하고 있다는 얘기가 돌면서 그에게 줄을 대려는 모습들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실제로 한 금융공기업 수장의 경우 처음엔 전혀 후보군으로 거론되지 않다가 막판에 치고 올라온 케이스였는데, 이 과정에 A 씨가 힘을 써줬다고 한다. 이는 A 씨가 비선라인에 속해 있긴 하지만 공식 인사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추론하게 해준다.
정치권과 재계에서는 A 씨를 이명박 전 대통령 평생지기였던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에 견주고 있다. 천 회장은 MB 정권 초반 각종 공기업 인사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정준양 포스코 회장 발탁에도 이름이 거론된 바 있다. 이 전 대통령 최측근 천 회장과 비교된다는 것은 그만큼 A 씨가 현 정부의 실세라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A 씨가 비선라인을 통해 인사에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에 대해 여권 내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친박계 의원은 익명을 전제로 “밀봉인사로 대표되는 박 대통령 인사 스타일에 대해 국민들 시선은 아직도 따갑기만 하다. 비선라인을 통해 이뤄진 인사가 나중에 잘못되면 그 책임은 박 대통령이 져야 한다”면서 “A 씨에게로 인사 권한이 쏠리면 비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미리 주의를 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윤호석 정치컨설턴트 역시 “이런 식으로 KT와 포스코 회장을 바꿀 경우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는 것밖에 더 되겠느냐”고 반문하며 “정부가 왜 민영화된 기업의 회장 인사에 관여하는지 모르겠다.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악습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