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억대라더니… 알맹이 다 어디갔어”
전재국
한 미술평론가는 “조선시대 도자기 등 몇몇 고미술 작품을 빼놓고는 눈에 띄는 것이 없다”며 “목록을 보니 죄다 판화더라. 200억대 미술품이라던 언론의 보도는 솔직히 오버”라고 감상을 전했다.
전재국 씨가 1990년대 중반 <아르비방> 시리즈를 출간하는 등 젊은 작가들을 후원해오며 미술 애호가를 자처하고, 미술계에서 그를 두고 미적 취향이 높다는 평가를 했던 것에 비하면 초라하고 소박한 반응이다.
검찰이 지난 7월 중순 압수수색을 통해 수백 점의 미술품을 찾아냈을 때만 해도 언론은 일제히 박수근과 천경자의 작품이 발견됐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막상 공개된 컬렉션엔 이들의 작품이 한 점도 없다. 천경자의 <여인>은 유화가 아닌 판화로 판명됐으며, 박수근의 작품도 찾아볼 수 없다.
김환기의 유화 걸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는 오보는 해당 작품이 동일 작가의 ‘무제’와 흡사해 오해를 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K옥션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무제’는 종이에 과슈로 그린 작품으로 유화작품보다 가격이 낮다.
전재국 컬렉션에 공개된 미술작품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종학의 ‘설경’, 데이비드 살르의 ‘무제’, 탕즈강의 ‘Chinese Fairytale-Bladder Stones 1’, 변종하의 ‘꽃나무’. 전영기 기자
데미안 허스트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기괴하고 충격적인 이미지로 연출해온 작가로, 최근 해외 경매에서 3점 한 세트가 1500억 원에 거래됐을 정도로 인정받는 영국 출신의 설치 미술가다. 이번 경매에 선보인 허스트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는 추정가 1500만 원선의 판화작품이다.
그러나 전재국 컬렉션이 미술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일반 대중을 전시장에 끌어들임으로써 침체됐던 미술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K옥션 홍보팀 손이천 과장은 “원래 경매 고객도 있지만 전 씨 일가의 압수 미술품이라는 이슈 때문에 일반인도 많이 몰렸다. 지난주 토요일엔 10시 오픈 전부터 와서 기다리는 고객도 있었다”며 “수요일(11일) 경매에도 열기가 이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사실상 이번 전재국 컬렉션이 호객용 ‘미끼 상품’에 불과하며 각 경매사가 함께 내놓은 ‘겨울 경매’ 미술품이 더 투자가치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K옥션의 12월 겨울 경매에 나온 박수근 작 ‘노상의 사람들’의 경우 11x24cm에 불과한 이 작품이 추정가 4억~6억 원대에 달한다. 박수근 작가의 경우 A급 작품이라면 호당 3억 원을 호가한다. 사실상 현재 가장 높은 가격대가 형성된 작가다. 그 외 장욱진, 이중섭, 홍경택, 이우환 등이 미술시장에서 활발히 거래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K옥션 ‘전재국 컬렉션’을 찾은 한 관람객이 김환기의 ‘24-VIII-65 South East’를 감상하고 있다. 전영기 기자
실제로 미술계엔 1990년대부터 전재국 씨가 구매대리인을 내세워 박수근 장욱진 이중섭 등 일류 작가들의 작품을 구매했다는 풍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이번엔 공개된 작품 목록엔 이들의 작품이 없다. 지난 8월 중순 검찰은 전 씨 일가의 150억 원대 비밀 미술품 거래장부를 찾아내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이 거래장부에 의하면, 현재 공개된 600여 점은 전체 규모의 30%에 불과하다. 나머지 70%의 미술품은 그동안 언론이 점쳐온 것처럼 미술시장이 호황이었을 때 되팔았거나, 제3의 수장고에 은닉했을 가능성이 있다. 미술계 복수의 관계자에 의하면, 전재국 씨는 1990년대 초반부터 미술품을 사들인 후 5∼10년 정도 보관하다가 가격이 오르면 경매회사에 되팔아 수익을 올린 것으로 전해졌다.
한 미술계 인사는 전재국 씨의 비밀 장부에 대해 “만약 그림을 팔았다면 미술품의 특성상 역추적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언제고 해당 그림이 시장에 나온다면 매매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실상 이번 경매에서 가장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들은 김환기의 ‘24-VIII-65 South East’ 탕즈강의 ‘Chinese Fairytale-Blad-der Stones 1’, 이대원의 ‘농원’, 오치균의 ‘가을정류장’ 정선, 심사정을 비롯해 강세황 최북 김수철 등 18~19세기에 활동한 9명의 대가들의 그림 총 16폭을 하나의 화첩으로 구성한 조선시대 화첩 등으로 압축해 볼 수 있다.
앞서의 평론가는 이대원의 ‘농원’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다. 그는 “살아생전에 이대원 작가가 직접 일군 과수원을 그린 것으로 가로가 긴 독특한 변형사이즈”라며 “시원하고 추상적인 점묘법과 맑고 명쾌한 색감이 특징적이다. 전체적으로 진득하고 차분한 느낌을 전해주는 남다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미술계에서는 이번 경매가 침체된 미술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는 컬렉션 총평을 부탁하는 기자에게 “개성 있게 좋은 작품이 별로 없는 것 같다”며 “전문가가 수집한 작품은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반면 한 유명 미술사학자는 컬렉션 중 데미안 허스트와 프란시스 베이컨의 판화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원화는 아니지만 좋은 것들이다. 특히 프란시스 베이컨의 판화는 나라도 샀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당 작품은 거래가격이 1000만 원선에 책정돼 있다. 미술품이 소유자에게 주는 감정적 만족 같은 순수한 가치에 더 높은 점수를 매긴 것이다.
권력자의 압수 미술품이 경매시장에 나오는 것은 국내 미술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미술계뿐 아니라 대중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양대 경매사의 경매 리스트를 보면, 평소 아껴뒀던 굵직한 소장품과 위탁품이 앞다퉈 나온 것이 잘 드러난다. 경매사는 정부와 구매자 양쪽에서 평균 10~13%의 커미션을 받을 수 있다. 전재국 컬렉션을 기회로 투자 가치가 높은 미술품 매매를 통해 그간의 어려움을 만회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서의 미술계 인사는 “이번 경매 덕분에 침체됐던 미술시장이 좋은 영향을 받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며 “적지 않은 이득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을 따르던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이 경매에 참여할 수도 있다”고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신상미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