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조한 박근혜 이젠 속도 낸다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부적절한 언행으로 경질됐다. 지난 1일 윤 장관이 원유 유출사고로 인한 기름띠가 밀려온 전남 여수시 신덕마을을 방문해 코를 막고 있는 모습. “피해자들 앞에서 기름 냄새 때문에 코를 막을 수 있느냐”는 여론의 질타에 윤 전 장관은 “기침이 나서 손으로 가렸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연합뉴스
더욱이 총리가 자신이 제청한 장관의 해임을 건의하다니…. 총리가 현직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건의를 입에 올린 건 지난 2003년 당시 고건 총리가 최낙정 해수부 장관의 해임을 건의한 후 꼭 11년 만의 일이었다. 또 총리의 건의로 국무위원이 해임된 사례는 최낙정 전 장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정 총리가 윤 장관에 대한 해임을 건의할지, 박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일지 등을 둘러싼 혼선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날 오후 7시 박 대통령이 청와대 민경욱 신임 대변인을 통해 윤 장관 해임 사실을 공표했다. 정 총리의 ‘해임건의 검토’ 발언에서 해임건의, 박 대통령의 건의 수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불과 2시간 30분 만에 속전속결로 이뤄진 것이다. 이 와중에 정 총리는 윤 장관을 총리공관으로 불러들여 해임건의 방침을 통보했다고 한다.
현직 장관이 제청권자인 총리의 해임건의와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수용으로 낙마하게 된 극히 이례적인 이번 사태를 두고 ‘박 대통령의 조바심’을 반영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 연말과 연초 새누리당까지 포함해 광범위하게 개각론이 일었을 때에도 “개각은 없다”며 꿈쩍도 안했던 박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윤 장관을 해임한 이유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윤 장관 해임이 정 총리가 아닌 박 대통령의 뜻이라는 분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실제로 정 총리는 지난 6일 오전까지만 해도 윤 장관에 대한 해임을 건의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민주당 의원들이 윤 장관의 부적절한 언행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면서 “이런 사람이 국무위원으로 있어야 하느냐”고 따져 물었을 때에도 정 총리는 “죄송하게 생각하고 (윤 장관) 본인도 죄송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개각은 없다는 기존 입장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은 정 총리가 오후 들어 갑작스레 ‘해임건의 검토’ 의사를 밝히자 질문자였던 김도읍 의원조차 잠시 어리둥절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새누리당의 한 초선의원은 “당내의 모든 사람들이 윤 장관 경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대통령이 그 요구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전했다.
박 대통령이 상황을 보통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이처럼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장관 경질을 단행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는 윤 장관이 경질된 이유를 박 대통령의 경고를 새겨듣지 않은 데서 찾는 시각과는 일정 정도 거리가 있다. 박 대통령은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금융사 개인정보 유출 사건 관련 부적절한 언행으로 비난을 자초하자 지난 1월 27일 “앞으로 부적절한 언행으로 국민 마음에 상처를 주는 공직자는 반드시 문책하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한 청와대 인사는 이에 대해 “대통령이 단지 자기 말을 안 들었다고 누구를 경질했다는 건 지나친 단견”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대통령의 머릿속은 온통 경제 재도약과 통일기반 구축 등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내기 위한 구상으로 채워져 있다”면서 “윤 장관 거취가 정치적 쟁점으로 남아 국정 운영에 큰 차질이 빚어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설명은 박 대통령의 최근 발언과 맞닿는 구석이 많다. 박 대통령은 2월 임시국회에서 그동안 처리되지 못했던 투자 활성화 및 일자리 창출 관련 법안, 창조경제 관련 법안 등이 반드시 처리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올해에 6·4 지방선거가 예정돼 있는 점을 감안하면 2월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한 법안은 9월 정기국회에 가서야 기회가 생길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이는 2월 국회가 성과 없이 끝날 경우 자칫 2014년 국정 농사를 망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반영한다. 게다가 2월엔 박 대통령 취임 1주년 ‘잔칫날(25일)’이 있는 달이기도 하다. 이처럼 마음이 바쁜 박 대통령 입장에선 국정 운영 성과를 내기 위한 총력전에 걸림돌이 되는 문제를 과감하게 치고 나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박 대통령의 초조함, 다급함을 보여주는 사례는 또 있다.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올해 들어 부쩍 ‘애드리브’가 늘었다고 한다. 각종 회의에 앞서 참모들이 모두 발언과 마무리 발언을 위해 사전에 원고를 작성해 보고하는데, 박 대통령이 즉석에서 말을 더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이전에도 참모들이 올린 사전 원고를 꼼꼼히 읽어보고 자신의 언어로 바꿔 발언해 왔다. 하지만 ‘수첩 공주’라는 별명이 보여주듯 미리 준비한 원고에 충실한 편이지, 현장에서 청중이나 상대방의 반응을 봐 가며 말을 더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박 대통령의 ‘애드리브’는 주로 비유법을 사용해 부연설명을 하거나 자신의 메시지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5일 국무조정실 등의 새해 업무보고를 받은 자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비정상적 관행의 정상화 개혁’을 끈질기게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진돗개 정신’을 언급했다. 박 대통령은 “진돗개는 한 번 물면 살점이 완전히 뜯어져 나갈 때까지 안 놓는다고 한다. 아예 진돗개를 하나 딱 그려 놓으시라. 우리는 진돗개 정신으로 일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규제 개혁과 관련해서는 “경제 재도약을 이루기 위해선 기업 활동을 제약하는 각종 규제를 확 풀어야 한다. 규제 개혁, 이것은 우리 정부에서 올해에는 꿈속에서, 꿈을 꿀 정도로 생각을 하고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또 국회에서의 법안 처리 지연을 비판하면서는 “국수는 따끈따끈 할 때 먹어야 소화가 잘 되고 맛도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나면 탱탱 불어터지고 텁텁해 맛도 없어진다”고 했다.
이 같은 박 대통령의 초조한 마음, 그로 인한 스타일의 변화는 그동안 지켜보지 못했던 새로운 변화가 앞으로도 나타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물밑으로 사그라졌던 개각론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가능성에 주목하기도 한다. 일을 하는데, 성과를 내는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다면 박 대통령이 개각이든 뭐든 가리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새누리당 지도부에 속한 한 의원은 “당내에서 박 대통령이 개각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개각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며 “대통령 스타일상 보여주기식 전면 개각을 단행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일에 방해가 되는 문제성 인사를 교체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