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끈했던 사제지간이 왜…배신자는 누구인가
안현수의 러시아 귀화 배경을 두고 전명규 빙상연맹 부회장(오른쪽)과의 갈등설이 거론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연합뉴스
박성인 전 빙상연맹 회장은 신목고 1학년 유망주에 불과했던 안현수의 스케이팅을 눈 여겨봤다. 항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안현수를 대표팀으로 추천한 이는 전명규 대표팀 감독(현 빙상연맹 부회장)이 아니라 박 회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전명규 감독은 오히려 처음에는 안현수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랬던 전 감독의 마음이 달라진 건 2002년 1월 춘천에서 열린 세계주니어선수권 대회에서다. 당시 안현수의 우승을 ‘직관’한 전 감독은 안현수를 태릉으로 즉각 불러들인다. 대표팀은 마침 이재경 선수의 부상으로 한 자리가 빈 상태였다. 전 감독은 그 자리에 18세(만 16세) 안현수를 들여보낸다. 별도의 선발전도, 이재경 뒤에 예비 선수도 무시한 ‘파격 중에서도 특별한 파격’이었다.
대표팀은 한 달 후에 있을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서 전 감독은 또 하나의 파격적인 결정을 한다. 1000m 개인전에 출전할 선수로 쇼트트랙 간판 김동성과 안현수를 선택한 것. 모두의 예상을 뒤엎은 ‘신예’의 등장이라 빙상연맹까지도 전 감독의 결정에 반발을 했다. 하지만 전 감독은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빙상계 관계자들은 “한 번 옳다 싶으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전명규식 스타일’이 먹혔다”며 입을 모았다.
하지만 전 감독의 기대와는 달리 안현수는 1000m에서 몸싸움을 벌이다 넘어져 4위를 기록했고, 우연찮게 기회를 얻은 1500m 개인전에서도 실격처리로 물러나게 된다. 전 감독은 그해 10월 모든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사퇴했지만, 그럼에도 안현수를 향한 신뢰는 변함없었다. 전 감독은 “내가 점찍은 선수들 중 가장 오래 선수 생활을 할 사람이 현수다. 김동성처럼 좋은 체격과 화려한 자질을 갖진 못했지만 현수는 성실하다는 게 장점”이라며 안현수를 추켜세웠다. 그만큼 스승과 제자의 정은 굳건해 보였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전 부회장은 한국체육대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이후 대표팀은 김기훈 코치(남자팀), 이준호 코치(여자팀) 체제로 분리됐다. 김기훈 코치는 전 부회장의 직속 제자였다. ‘전명규-김기훈-안현수’로 이어지는 라인은 여전했던 것이다. 특히 김 코치는 안현수에게만 추월 방법, 특별 노하우 등을 전수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2010년 <일요신문>에 실린 안현수 아버지 안기원 씨와의 인터뷰.
갈등의 폭발은 전명규파의 직속인 김기훈 코치를 향한 비 전명규파의 폭로에서 시작됐다. 김기훈 코치가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는 회사의 스케이트날을 선수들에게 강매했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이다. 결국 2004년 김 코치는 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퇴를 하게 되고 이후 ‘비 전명규파’인 윤재명 감독이 남자팀을 맡게 된다. 안현수가 설 땅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지만 그해 한체대를 입학한 안현수는 ‘전명규’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여전히 뒤에 자리 잡고 있었다.
2005년 1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벌어진 ‘폭행 사건’은 안현수를 향한 반대파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다. 안현수는 지난 2011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니버시아드 대회 때 저랑 성시백이가 한 선배로부터 두들겨 맞았다. 그 선배가 경기 전날 우리 둘을 방으로 불러서 금메달을 양보하라고 강요했는데 내가 말을 듣지 않았다. 선배한테 금메달을 양보하지 않았다고 해서 난 천하의 죽일 놈이 됐고 이기적인 선수로 내몰렸다”고 전했다. 당시 여론은 폭행 선수를 서호진 전 국가대표 선수로 지목했다. 하지만 서호진 선수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8시간 구타한 적이 없고 현수에게 금메달을 양보하라고 한 적도 없다”며 “당시 현수에게 한소리 한 건 선후배 사이의 위계질서에 대한 훈계 정도”라고 반박하며 폭행 사건은 진실 공방으로 흐르고 있는 모습이다.
파벌 싸움이 ‘절정’에 달한 2006년 토리노 올림픽 당시 안현수는 여자팀에서 훈련을 받아 논란이 일기도 했다. 비 한체대파가 장악한 남자팀에서 ‘왕따’를 당하자 한체대파 코치가 있는 여자팀에서 훈련을 한 것이다. 안현수는 “숙소도, 밥도 혼자 먹었고, 여자 대표팀에서 훈련할 수가 없으니 친했던 성시백, 이승훈 등이 훈련 파트너를 자처해줬다. 빙상연맹에서 올림픽 1주일 전에 따로 훈련하지 말고 남자대표팀으로 들어가서 훈련하라고 지시했다. 정말 힘들었다. 그 당시 ‘안현수 왕따설’ 등이 떠돌았는데, 왕따를 당했다기보다는 그냥 서로 말을 안 하고 지냈던 것이다”라고 회상한 바 있다.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안현수는 토리노 올림픽 ‘3관왕’에 오르며 화려하게 비상했다. 그러나 비 한체대파와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같은 해 열린 미국 세계선수권대회를 마친 후 귀국장에서 드디어 사단이 나고 말았다. 안현수의 부친 안기원 씨와 김형범 당시 빙상연맹 부회장이 설전을 벌이며 급기야 몸싸움까지 하고만 것이다. 안기원 씨는 “현수가 미국 현지에서 울면서 전화했다. 외국 선수들보다 한국 선수들이 더 심하게 현수를 견제했다. 1000m와 3000m에서 코치의 지시로 다른 파벌선수들이 안현수를 막게 했다”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승국 한국체대 총장이 토리노올림픽 3관왕 안현수에 축하인사를 건네고 있다.
그래도 안현수는 여전히 부동의 에이스였다. 국내에서 선수 생활을 계속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듯 3년간 ‘5억 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2007년 성남시청에 입단하게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이 안현수 귀화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나타나게 된다.
성남시청을 입단하기 전 한체대를 졸업한 안현수는 전명규 부회장으로부터 ‘대학원 입학’ 권유를 받게 됐다고 한다. 안현수 역시 졸업 후 계획을 두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다음에는 실업팀으로 가서 2010년 올림픽을 준비하겠다”고 밝혀 전 부회장의 뜻에 따르는 듯 보였다. 하지만 결국 안현수는 대학원 대신 성남시청을 선택해 전 부회장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 쇼트트랙계의 한 관계자는 “전 교수가 실업팀을 창단하고 스카우트한다고 해서 안현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실업팀이 잘 진행이 안 돼 대학원 다니면서 잠깐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 사이 성남시청이 좋은 조건에 꾸준히 입단 제안을 한 것으로 안다”라고 전했다. 안현수의 성남시청 입단은 곧 전명규 라인에서 본인 스스로 ‘이탈’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번 말을 듣지 않으면 등을 돌려버린다”가 철칙인 전 부회장에게 안현수의 행동은 ‘하극상’처럼 여겨졌을 것이라는 평이 빙상계 안팎에서 자자했다.
이후 안현수는 선수 생활에서 가장 ‘추운 겨울’을 맞게 된다. 성남시청 입단 한 달 뒤 안현수는 훈련 도중 펜스에 부딪히며 무릎을 심하게 다쳤다. 세 번이나 진행된 수술로 안현수는 2010년 밴쿠버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 탈락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같은 해에는 안현수가 소속된 성남시청이 갑작스런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팀이 해체되기도 했다. 잇따른 악재 배후에는 전명규 부회장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따르기도 했다. 안기원 씨는 “전 부회장과 사이가 틀어진 이후에 전 부회장이 불이익을 줬다. 귀화의 결정적 이유도 바로 전 부회장 때문”이라고 언론에서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결국 올림픽행이 좌절된 안현수는 러시아행을 타진하며 2011년 ‘빅토르 안’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소치 올림픽에서 화려하게 재기한 빅토르 안이 귀화를 선택하기까지의 얼룩진 여러 파문은 현재까지 강력한 후폭풍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빅토르 안의 선택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될 전망이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