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씨 “서로에게 첫 번째 남편, 첫 번째 부인” 그 누구보다 신혼은 달콤했다
나훈아의 부인 정수경 씨가 <일요신문>과 만나 둘의 결혼생활에 대해 털어놨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일요신문] 끝이 있으면 시작도 있는 법이다. 나훈아 정수경 부부는 대법원까지 가는 이혼 소송을 벌이고 그 과정이 매스컴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됐지만 이들의 만남은 여느 부부 못지 않게 로맨틱했으며 행복이 넘쳐났다.
이들 부부의 결혼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지난 1983년 7월이다. 당시 이들은 법적 부부가 아닌 동거 상태였다. 동거 중인 이들의 열애 사실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정 씨가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결혼식은 그해 연말 비밀리에 진행됐다. 당연히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결혼 소식이었다.
우선 나훈아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다. 상대 정 씨 역시 촉망받는 신예 가수였다. 게다가 나훈아에겐 세 번째 결혼이었다. 73년 배우 고은아의 사촌 이숙희 씨와 결혼했지만 2년 만에 이혼한 나훈아는 76년 배우 김지미와 두 번째 결혼했지만 6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세간의 시선은 ‘과연 나훈아와 정 씨가 얼마나 오래갈까’ 점치는 데 집중됐다. 이미 나훈아가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한 터라 이번 결혼 역시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게다가 예비역 장성인 정 씨의 아버지 역시 결혼에 강하게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대중의 시선과는 달리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32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이혼에 이를 뻔했지만 대법원까지 가는 이혼 소송에서 정 씨가 패소하면서 이들은 법적인 부부 관계를 지속하게 됐다. ‘법’까지 이들의 이혼을 말리고 있는 상황이 연출된 셈이다.
더욱 눈길을 끄는 부분은 나훈아에게 법적인 부인은 정 씨가 유일하다는 점이다. 비록 두 번의 결혼이 세간에 알려져 있지만 나훈아가 혼인신고를 한 사람은 정 씨가 처음이며 그의 아이를 낳은 것도 정 씨가 유일하다. 나훈아와 정 씨 부부는 1남 1녀를 두고 있다.
― 우선 나훈아 씨와의 결혼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궁금합니다.
▲ 내가 신인 가수로 활동하던 시절 처음 만났어요. 연애 시절에는 남편이 내게 정말 잘했죠. 세간에는 이미 남편이 나를 만나기 전에 두 번 결혼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정식 결혼이 아닌 동거였어요. 혼인신고를 하고 정식 부부가 된 것은 내가 처음이었죠.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것도 내가 처음이었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첫 남편이자 첫 부인으로 부부가 됐고 행복한 신혼 생활을 시작했어요.
― 당시 기사를 보면 결혼 조건으로 나훈아의 가수 은퇴를 요구했다고 하던데.
▲ 사실이에요. 내가 남편에게 결혼 조건으로 가수 활동을 그만두라고 부탁했어요. 나 역시 가수로 연예계에서 활동했었는데 남편이 가수 활동을 계속하면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거든요. 당시 남편도 가수 활동을 그만두고 단란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계속 연예계에 있다 보면 그런 생각이 변질되고 잊히기 싶다고 생각해 가수 은퇴를 부탁했어요. 그래서 연애 시절 남편에게 그런 부탁을 했고 그러겠다는 약속을 받았죠. 물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아들 딸과 함께 단란했던 나훈아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는 내 사랑아.’ 나훈아의 히트곡 ‘사랑’의 가사다. 이 노래는 나훈아가 부인 정 씨를 위해 만든 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이들의 신혼 생활은 매우 행복했다. 정 씨는 나훈아의 첫 아들에 이어 딸을 출산하며 행복한 신혼 생활을 이어갔다. 지난 1993년 정 씨가 두 아이의 공부를 위해 하와이로 떠날 때까지 이런 행복한 부부 생활이 이어졌다.
물론 나훈아가 기러기 아빠가 된 93년 이후에도 이들 가족은 행복하고 단란한 모습을 이어갔다. 하지만 정 씨는 그 당시부터 조금씩 불협화음이 생겼다고 한다.
― 신혼 생활은 매우 행복했다고 들었습니다.
▲ 정말 내게 잘해줬어요. 나를 위해 만든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던 로맨틱한 남편이었으니까요. ‘사랑’이라는 노래가 그렇게 만들어진 곡이에요. 부부니까 종종 부부싸움을 한 적도 있지만 크게 싸워 본 적은 없어요. 남편이 워낙 불 같은 성격이라 남편이 화를 내면 내가 그냥 참고 받아주곤 했거든요.
― 나훈아 씨가 두 아이에게는 어떤 아빠였나요?
▲ 정말 좋은 아빠였어요. 특히 둘째 딸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는데 딸이 어렸을 때에는 남편이 머리를 빗어주고 매니큐어도 직접 발라줬어요. 매니큐어를 발라준 뒤 빨리 마르라고 미니 선풍기를 동원할 정도였죠. 또 아이들은 아빠 배 위에서 장난감을 갖고 놀았답니다.
― 93년 정수경 씨가 두 아이와 함께 하와이로 떠나면서 나훈아 씨는 ‘기러기 아빠’가 됐다. 왜 하와이로 떠나게 된 것인지.
▲ 기본적인 이유는 두 아이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내가 아이들을 돌봐주려고 함께 떠났어요. 그렇지만 이는 절반의 이유일 뿐이죠. 이미 그 즈음 우리 관계는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어요. 내가 계속 한국에서 남편과 함께 살면 힘들겠다 싶었어요. 어쩌면 견디기 힘들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아마 그때 심정이 결혼할 때 남편에게 가수 은퇴를 부탁할 당시와 비슷했죠. 남편 역시 가수 생활을 그만두고 외국으로 나가 기반을 닦고 거기서 살고 싶다는 얘기를 종종 했어요. 난 그 말을 믿었죠. 내가 미국으로 떠나는 것을 계기로 남편도 한국에서 가수 생활을 접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오지 않을까, 그래서 진정한 새 출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죠.
― 그 당시엔 이혼을 생각하진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 결혼 당시 아버지가 많이 반대 하셨어요. 또 대중들의 시선 역시 ‘둘이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나’였죠. 그래서 그 누구보다 더 잘 거라고 결심했었죠. 아니 잘 살 수 있다는 교만이 있었던 것도 같아요. 내가 더 기다리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죠
―하와이에선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사셨네요. 하와이에서 13년 동안은 어떻게 지냈나요?
▲ 우리가 하와이에 온 뒤에는 정말 잘 지냈어요. 남편 역시 기러기 아빠지만 한 달에 한 번은 하와이로 왔고 여름 방학 때마다 제가 두 아이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어요. 겨울 방학이면 온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났죠. 또 하와이에서 지낼 당시엔 남편이 생활비를 붙여주거나 하와이에 올 때 직접 갖다 주곤해서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운 편이었어요. 하와이에서 친하게 지내던 교포 분들이 다들 부러워 할 정도로 행복했어요.
― 보스턴으로 이사를 결정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 사실 남편이 그러길 원했었어요. 아들이 보스턴에서 대학을 다닌 뒤 거기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렇지만 하와이에서 보스턴으로 떠나면 더 남편과 멀어질 거라는 불안감이 있었어요. 아무래도 하와이에는 보는 눈이 많아서 자주 와야 했지만 내가 딸과 함께 보스턴으로 이사 가면 우리에게 오는 횟수를 줄여도 될 거라 여긴 것 같아요. 같은 미국이지만 하와이에 비해 보스턴은 한국에서 정말 멀어요. 하와이야 8시간이면 올 수 있지만 보스턴은 18시간이나 걸리니까요. 서서히 우리에게 오는 횟수를 줄일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잖아요. 사실 2004년 무렵부터 남편에게 이상한 낌새가 있긴 했어요. 사실 저는 하와이가 좋았어요. 주위에 친하게 지내는 지인들도 많았으니까요.
― 그래서 결국 나훈아 씨의 요구로 보스턴에 가게 된 것인지.
▲ 그건 아니에요. 내가 딸이랑 단둘이 하와이에서 지내는 것을 아들이 계속 걱정했어요. 아무래도 남편과 떨어져 미국에서 두 아이와 지내다 보니 사이가 많이 각별했어요. 특히 내게 아들은 때론 남편 같고 친구 같은 존재예요. 정말 서로에게 아무런 비밀이 없을 만큼 사소한 얘기까지 다 하며 지내거든요. 그래서 결국 아들 곁으로 가게 된 거예요.
― 보스톤으로 떠난 뒤 실제로 나훈아 씨의 방문이 줄어들었나요?
▲ 2006년 여름에 보스턴으로 이사했는데 이후 남편은 네 번 이곳에 온 뒤 발길을 끊었어요. 그렇게 7년 동안 얼굴을 못 보게 된 거죠.
― 구체적으로 ‘이상한 낌새’란 뭐죠?
▲ 2004년 무렵 남편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어요. 이제 노래를 그만하고 떠나고 싶다, 여행 다니며 쉬고 싶다는 얘길 자주 했거든요. 여자의 육감으로는 노래만 그만하는 게 아니라 우리 가족과도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게 느껴졌어요. 남편이 우리 가족으로부터 떠나려고 하는구나, 그런 느낌을 계속 받았어요.
나훈아가 세간에 엄청난 화제를 뿌린 것은 2007년이다. 잠적설로 시작된 나훈아 관련 소식은 아쿠자가 등장하고 신체 주요 부요 부위가 절단됐다는 등 각종 악성루머로 변질됐으며 결국에는 여자 연예인 한두 명이 연루돼 있다는 얘기로까지 발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2008년 1월 나훈아는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기자회견에서 나훈아는 악성루머만 남겨둔 채 잠적해 있던 1년 동안에 대해 “지난 1년 동안 국내 산행, 해외 유학, 해외여행 등의 시간을 가지며 가수 활동을 위해 필요한 ‘꿈’을 충전했다”고 “내 가슴에 꿈이 없으면 나는 (공연을) 못한다. 내가 못한다. 내가 힘들다. 꿈이 떨어져 충전을 하기 위해 1년 동안 떠났던 것인데 더 힘들어졌다”고 밝혔다.
나훈아가 아내에게 간접적으로 밝힌 가족의 곁을 떠난 이유 역시 비슷하다. 나훈아는 아내에게 ‘이제 노래를 그만하고 떠나고 싶다, 여행 다니며 쉬고 싶다’고 자주 이야기했다. 과연 나훈아는 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일까. 왜 그의 가슴에서 꿈이 사라진 것일까. 이로 인해 나훈아는 대중뿐 아니라 가족의 곁에서도 멀어졌다. 과연 나훈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2007년 한 해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
김다영 기자 lata1337@ilyo.co.kr
(정수경 씨 인터뷰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