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사동 사건 현장은 흉가가 됐다. | ||
지난해 9월부터 올해 7월까지 모두 17차례에 걸쳐 무려 21명을 살해한 엽기 살인 피의자 유영철. 그의 진술이 추가 증거 조사 등으로 하나씩 입증되면서 수사는 일단 중간 반환점에 다다른 상태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실제 다른 5명의 여성도 살해했다는 유영철 진술의 사실 여부가 확인이 되지 않고 있고 그의 일부 행적에 대해서도 몇 가지 풀리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다.
과연 희대의 연쇄 살인극은 ‘완료’된 걸까. <일요신문>은 유영철의 10개월간의 엽기 행각 현장을 발로 직접 하나씩 뒤따라가 봤다. 일명 ‘범죄의 재구성’.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공소 기록, 그리고 유영철이 남긴 사건 현장의 흔적과 그간의 행적 등을 토대로 사건의 X파일을 다시 써본다.
우선 유영철이 범행을 계획한 연유부터 살펴보자. 지난 2000년 3월 경찰관을 사칭, 미성년자를 강간한 혐의 등으로 구속돼 3년간 복역하다 만기출소한 유영철은 9월11일 전주교도소를 나서자마자 ‘세기의 범행’을 계획한다. 그의 연쇄살인은 교도소 출소 후 즉흥적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유영철은 교도소 방 벽면에 출소하면 살해할 사람들의 숫자까지 기재했을 정도로 미리부터 잔인한 살인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계획을 처음 행동으로 옮긴 것은 이른바 신사동 이아무개 교수(당시 72세) 부부 살해사건. 지난 8월21일 기자가 찾은 신사동 이 교수의 집은 이미 주인을 잃은 채 흉가가 되어 버렸다. 아직도 교회를 찾아오는 신도나 소문을 들은 바 있는 행인들은 “바로 이 집이야”라며 몸서리를 치고 지나칠 정도로 당시의 충격이 여전하다.
이미 집은 이 교수의 자제들이 지난봄에 처분한 상태. 주민들 사이에서는 집을 매입한 사람이 주택을 부수고 다른 용도의 건물을 세울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사건 당시의 상황이다. 지난해 9월24일 오전 유영철은 성수대교 남단 사거리에서 신사동 쪽으로 방향을 틀어 첫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 평소 유영철이 지하철을 자주 이용한 점으로 보아 3호선 압구정동역에서 내려 로데오 거리 쪽으로 향하던 도중 고급 음식점과 커피숍이 들어선 신사동 길 안쪽으로 방향을 틀어 주택가로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신사동 주택가로 들어선 유영철은 아마도 S교회 바로 뒷집에서 발길을 멈춰서 정면으로 보이는 이아무개 교수의 주택을 응시했을 것이다. 범행 타깃으로 점찍은 것이었다. 왜 하필 그 집었을까. 여기서 그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 13년 전 일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지난 91년 9월4일 유영철은 서울지방법원에서 특수절도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당시 그는 3년 전 만나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온 황아무개씨와의 정식 동거를 앞두고 있던 상황. 당연히 석방과 새 삶에 대한 집착도 컸다.
실제로 유영철은 검찰 수사에서 이때의 일을 세세히 진술했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던 그는 당시 재판 중 나무 십자가를 손에 쥐고 집행유예가 선고되기만을 학수고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징역 10월의 실형이 선고되자 그는 낙담하면서 법정에서 나무 십자가를 부수고 집어 던졌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믿음이 회의와 원망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는 우연히 교회 뒤편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던 중 교회 십자가를 보자마자 문득 ‘그때 그’ 재판을 기억해내고, 선고 후 반발심에 신의 존재를 부정했던 당시를 떠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검찰도 공소장에서 ‘교회 부근에 살아도 신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부유층에 공포감을 조성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불만과 적개심을 표출…’이라고 그의 범행 동기를 적고 있다.
이런 심리 상태에서 정면으로 마주친 이 교수의 집이 골목에서 유일한 단독주택이라는 점도 그의 살인 충동을 부채질했을 것이다. 장갑을 끼고 범행 준비를 끝낸 유영철은 곧바로 잠입을 시도했다. 이 교수의 집은 담이 1m 정도밖에 되지 않아 건장한 사내라면 쉽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범행 당시 현관문을 연 뒤 살며시 인기척을 느낀 유영철은 먼저 2층으로 올라갔다. 용의주도하게 2층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1층 안방으로 들어가 먼저 이 교수의 목을 칼로 찌른 뒤 해머로 머리를 내려쳤다. 눈앞에서 남편이 실신하는 날벼락을 목격한 부인은 강도다 싶은 생각에 떨리는 목소리로 “돈을 줄게요”라며 뒤로 물러나 장롱 서랍을 열었다. 그러나 유영철은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 것 같냐”며 해머로 부인의 머리를 수차례 내려치고 옆에서 의식이 남은 이 교수의 머리도 재차 내려쳐 살해했다.
“내가 돈 때문에….” 유영철이 수사기관에서 진술했다는 이 말은 공교롭게도 다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주로 ‘비 오는 목요일’ 새벽에 벌어진 서울 서남부 부녀자 연쇄피습 사건의 범인도 “돈을 주겠다”고 했을 때 똑같은 말을 남겼다는 것이 생존자의 증언. 그러나 알리바이 등으로 보아 유씨는 일단 이 사건과는 무관한 것으로 전해졌다. 둘 다 돈이 목적이 아닌, 불특정인을 향한 ‘묻지마 살인범’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같은 말을 남겼던 걸까.
▲ (위)구기동 사건 집 전경. 유영철이 애초에 타깃으로 삼은 곳은 여기가 아니라 장관을 지낸 황산성 변호사의 자택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래)혜화동 사건 집엔 인기척이 없었다. | ||
첫 번째 범행과 동일하게 유영철은 교회 바로 앞집을 범행 타깃으로 삼았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유영철은 원래 Y교회와 바로 마주보고 있는 집을 노렸다. 그러나 대문 앞에 개가 있고 주택가로 들어오는 길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어 그는 반대편 고아무개씨(61) 집으로 범행 대상을 수정했다. 그가 잠입을 포기한 집은 놀랍게도 환경처 장관을 지낸 황산성 변호사 자택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가 다시 선택한 집은 신사동 집보다 훨씬 담이 낮았다. 더군다나 주택가로 들어오는 길과 반대편에 위치했기 때문에 다른 행인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유히 집안으로 잠입할 수 있었다. 가볍게 담장을 넘고 그는 정원으로 다가가 창문으로 방 안 내부를 확인한 뒤 왼쪽 모서리를 돌아 현관문으로 향했다.
코팅한 목장갑을 끼고 손에 칼을 쥔 채 문을 연 유영철은 거실 왼편 화장실에 있던 고씨의 모친 강아무개씨(85)를 보고 주머니에서 해머를 재빨리 빼내 강씨의 머리를 그대로 내리쳤다. 화장실에서 나와 거실 안쪽으로 가려던 유영철은 강씨가 화장실에서 비틀거리면서 나오자 재차 해머로 내려쳐 쓰러뜨렸다.
비명 소리에 놀라 2층에서 1층 거실로 내려오던 고씨의 부인 이아무개씨(60)도 유영철의 손에 이끌려 거실 소파에서 해머로 머리를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거동이 불편했던 고씨의 아들(35)도 1층과 2층 사이 계단에서 유영철의 해머에 맞아 두개골이 부서진 채 숨을 거뒀다.
일주일 후인 10월16일 유영철은 다시 강남에서 세 번째 범행에 나섰다. 이번에도 삼성동에 위치한 H교회 앞집을 노렸다. 세 번째 삼성동 노인 살해 사건이 벌어진 삼성동 ○○번지 주택. 앞의 두 집과는 다르게 세 번째 타깃으로 선택한 집은 제법 큰 골목 주변에 위치해 있고 지나가는 행인도 꽤 많은 편이다. 교회 뒤편 큰 길 너머에는 바로 강남경찰서 삼성지구대가 자리잡고 있어 수시로 순찰차가 지나가는 곳이다. 더군다나 집이 양 옆 건물과 밀착돼 있어 쉽사리 담을 넘기도 어렵다.
왜 난이도가 높은 집을 골라 침입했던 걸까. 두 번의 살인을 저지른 유영철이 점점 대담해진 상태에서 범행에 나섰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당시 주택 뒤편 담장을 넘어 정원에 침입한 유영철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때 피해자 유아무개씨(여·60)는 1층 거실 왼쪽 화장실에 있었다. 유영철은 칼로 유씨를 위협한 뒤 거실과 안방 내 다용도실로 끌고 가다 다시 화장실에서 해머로 유씨의 머리를 내리치고는 도주했다. 오후 1시30분 유씨는 아들에 의해 삼성의료원으로 후송됐으나 30분 후 사망했다.
사건이 벌어진 후 이 집도 신사동 집처럼 ‘흉가’가 됐다. 마당에 있는 나무들을 관리하지 않아 아예 숲이 되어 버렸다. 사건 전에 주인이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지만 사건 여파로 인해 아직 새로운 주인을 맞지 못하고 있다.
한 달 후인 11월18일 유영철은 또 다시 강북에 나타났다. 평창동, 성북동 등 강북 부유촌을 전전긍긍하다 결국 혜화동으로 범행 장소를 택한 것. 유영철은 4호선 혜화역에서 내려 혜화동 주유소를 지나 극단 현대극장 등 소극장이 위치한 골목으로 들어서 주택가로 잠입한 것으로 보인다.
네 번째 사건이 발생한 혜화동 ○○번지 주택. 노인을 상대로 한 네 사건 중 유일하게 주인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살고 있는 집이다. 1층은 어느새 근사한 스튜디오로 탈바꿈한 상태. 그러나 기자가 찾은 날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네 번째 사건은 특히 유영철의 치밀한 수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건이 일어났던 혜화동 주택은 같은 번지수인 ○○번지 주택 중 가장 안쪽 골목에 위치한 집. 더욱이 주택들 사이로 난 골목은 부근 여타 주택가 사이로 뻗은 골목보다 비좁다. 집도 많지 않아 그곳에 사는 주민 외에 다른 행인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담벼락 가스 배관을 타고 집으로 잠입한 유영철은 2층 계단을 내려오다 마주친 파출부 배아무개씨(53)를 안방에 끌고가 침대에 눕혔다가 이를 보고 일어나려던 집주인 김아무개씨(87)의 머리를 해머로 내려쳤다. 이 과정에서 배씨가 침대에 있던 갓난아이를 부둥켜안으려 하자 급히 해머로 머리를 가격했다.
유영철은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거실 소파에 눕혀 놓고 강도 소행으로 위장하기 위해 2층에 있던 금고를 집에 있던 곡괭이, 가위 등으로 내려쳤다. 이때 가위가 튕기면서 손을 베어 피가 흐르자 범행이 발각될 것을 우려, 집 전체에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네 건의 노인 살인 사건을 저지른 후, 유영철은 마포구 신수동 A고시원에서 같은 동 오피스텔로 주거지를 옮겼다. 궁극적으로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져 왔기 때문. 또 자신이 신은 버팔로 운동화 족적이 세 건의 사건 현장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때쯤 잠시 심리적인 안정을 찾고 은신하려던 유영철은 또 다시 손에 피를 묻힌다. 올해 2월6일 저녁 무렵 유영철은 동대문구 이문동 부근으로 향했다. 당시 스캐너 장비 등으로 제작한 서울지방경찰청 모 경찰관의 위조신분증을 소지하고 있던 그는 경찰을 사칭하며 ‘용돈벌이’에 나서곤 했다.
▲ 봉원사 인근 시신 7구가 발견된 곳엔 누군가 벽돌로 '비석'을 세워놓았다. | ||
초저녁쯤 유영철의 시야에 한 여성이 들어왔다. 동대문 의류상가에서 일하는 전아무개씨(24)였다. 전씨는 야간 업무를 위해 출근하던 중이었다. 유영철은 그럴듯하게 경찰 흉내를 냈다. “윤락행위 단속중이다. 신분증을 보여 달라.”
처음에는 돈만 뺏을 목적이었다. 그러나 순순히 자신의 말을 들을 것으로 알았던 전씨가 “당신 미쳤어”라며 의외로 드세게 반항하자 순간 격분한 유영철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는 곧바로 칼을 꺼내 전씨의 목을 찌르려 했다. 그러나 유영철은 발목을 삐끗하며 전씨의 목 밑 가슴을 찌르고 말았다. 사태를 직감한 전씨는 본능적으로 피가 흐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큰 길 버스정류장 쪽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유영철은 버스 정류장을 50여m 남기고 △△△중국음식점 앞에서 전씨를 낚아채 칼을 휘둘렀다.
이때 중국음식점 종업원들이 모두 문 밖으로 달려 나왔다. 전씨가 쓰러지면서 음식점 앞에 세워둔 탁자가 부서지고, 주차해둔 오토바이 네 대가 모두 쓰러지면서 요란한 파열음을 냈던 것.
유영철은 실제 이곳에서 붙잡힐 뻔했다. 큰 길로 도주하는 사이 뒤따라온 한 종업원에 의해 옷자락이 잡힌 것. 그러나 유영철은 중학교 시절 단거리 육상 선수 출신답게 재빠른 몸놀림으로 체포를 모면했다.
전씨가 숨졌던 곳에 위치한 중국음식점은 사건이 있은 직후 주인이 바뀌었다. 건물주는 그대로지만 지하에 옷을 만들었던 공장도 매물로 나온 상태다. 이 음식점의 한 종업원은 “사건이 있은 후 손해가 이만 저만 아니다. 직접 가게를 찾는 손님은 없고 대부분 배달 손님”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영철이 본격적으로 ‘젊은 여성 사냥’에 나서기로 결심한 시점은 올 2월29일. 지난해 12월11일 전화방을 통해 만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출장마사지사 김아무개씨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이날 다른 남자와 만난 것에 대해 김씨와 다툼을 벌이던 유영철은 김씨가 자신을 향해 “섹스를 하고 싶으면 돈을 내놔라”는 말을 퍼붓고, 휴대폰을 교체하며 연락을 끊어 버린 데에 대해 극한 모멸감과 배신감을 느낀 것.
복수심을 불태우던 유영철은 이때부터 더욱 끔찍하고 엽기적인 범행을 시도한다. 영화에서나 보았던 토막살인. 단순히 해머로 내려치는 것이 아니었다. 유영철은 인터넷 자료 검색 등으로 토막살해 장면 등을 내려받고 살인 방법을 숙지했다. 그리고는 쇠톱, 가위 등 토막 살인에 필요한 도구를 꼼꼼히 준비했다.
그 후 유영철과 만난 20~30대 여성들은 끔찍한 변을 당했다. 지난 3월15일 권아무개씨(23)를 시작으로 지난 7월13일 임아무개씨(27)에 이르기까지 모두 11명의 여성들이 유영철의 신수동 오피스텔과 노고산동 오피스텔에서 팔, 다리 등이 잘려 나간 채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특히 유영철은 배신한 동거녀를 연상시키는 여성을 더욱 참혹하게 죽였다. 그는 지난 7월1일 오후 7시에 신촌에서 지하철로 태평역까지 가서 출장마시지 광고 전단 등을 모은 후 다시 지하철을 타고 오후 10시41분께 역삼역에서 내렸다. 한 출장마사지 업소에 전화를 한 뒤 피해자 김아무개씨(26)를 불러냈다.
경찰관을 사칭한 유영철은 역삼역 주변에서 유일하게 차를 세울 공간이 있는 LG강남타워 앞으로 김씨를 유인해 ‘즉석 취조’를 시작했다. 이내 피해 여성 김씨가 자신과 사귀다 떠나간 애인과 이름이 같다는 사실을 안 유영철은 그녀를 집으로 데려왔다. 복수심이 발동했던 것이었을까. 그는 피해여성을 살해한 뒤 모습을 알아볼 수 없도록 얼굴과 엉덩이 부위까지 수차례 베어낸 후 시신을 토막냈다.
피해자 대부분은 신촌 현대백화점, 녹색극장 주변 및 불광동 등지에서 경찰 신분증을 내민 유영철에게 유인당했으며, 모두 15~18토막으로 절단된 채 봉원사 인근 야산에 묻혔다.
살해된 11명 중 10명의 토막 시신이 발견된 봉원사 부근은 사건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예전의 평온을 되찾은 상태. 한동안 등산객의 발걸음이 줄었으나 최근 더위가 수그러들면서 산을 찾는 등산객들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건물 뒤편 인근 시신 일곱 구가 발견된 지점에는 누군가 벽돌로 비석을 세워 놓았다. ‘비석’ 앞에는 캔커피와 시들은 국화꽃이 놓여 있었고, 큰 그릇에 막걸리가 가득 부어져 있었다. 반면 건물 오른편 쪽,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된 지점은 각종 쓰레기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시신 한 구가 발견된 또 다른 곳은 돌 등으로 메워진 상태. 그 바로 위편 등산로는 유영철이 현장 검증을 하면서 시신을 묻었다고 진술, 경찰이 포크레인을 동원해 땅을 파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경찰은 구덩이를 다시 메워 놓았다.
이곳을 종점으로 하는 ◇◇버스 회사의 몇몇 기사들은 4~7월을 전후해 모자 쓴 30대 남자가 저녁 시간에 자주 버스 정류장과 건물 주변을 서성거렸다고 목격담을 전했다. 버스 회사 관계자는 “기사들이 동전통을 버스에 남겨두는 경우가 자주 있어 처음에는 그 사람이 버스를 열고 돈을 털어가려는 게 아니냐고 의심했었다”고 말했다. 좀도둑으로 여긴 ‘그 사람’이 바로 유씨였다.
10개월이 넘게 상상을 초월한 연쇄살인극을 저질러온 유영철. 그가 지난 7월13일 서울 신촌 G마트 주변에서 출장마사지 여성을 불러냈다가 업자의 제보를 받고 대기중이던 형사들에게 현장에서 붙잡히면서 ‘미친 살인의 노래’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