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지원(왼쪽),이익치 | ||
의혹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한 축이었던 현대 3인방에게 쏠리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정몽헌 회장 외에 남은 이는 단 두 사람. 이제 ‘1백50억원의 진실’의 열쇠는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과 ‘로비스트’ 김영완씨가 쥐게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꼭꼭 숨어 있다. 두 사람의 침묵 속에서 1백50억원에 얽힌 진실이 다음의 세 가지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세간에서 거론되고 있다. 이 전 회장의 ‘배달사고’, 현대의 ‘자작극’, 그리고 청와대와의 ‘직거래’ 가능성 등이 그것이다. 반면 검찰측은 여전히 박 전 장관의 수수 가능성을 확신하고 있는 모습이다.
박지원 전 장관이 현대측으로부터 1백50억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정황은 지난해 대북송금 특검팀의 수사 과정에서 불거져나왔다. 박 전 장관이 대북 밀사로 은밀히 싱가포르와 중국 등을 다니며 북한측과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협상을 벌이던 2000년 4월께 무기중개상 김영완씨를 통해 현대 정몽헌 회장에게 “남북정상회담 준비에 필요하니 1백50억원을 무기명양도성예금증서(CD)로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
이에 정 회장은 현대건설측에 “CD를 만들어서 이익치 회장에게 줘라”고 지시했고, 이 전 회장은 이 돈을 박 전 장관에게 직접 전달했다는 것이 ‘박 전 장관 1백50억원 뇌물 수수 혐의’의 주요 골자다(흐름도 참조).
하지만 박 전 장관은 수사 초기부터 “나는 돈을 요구한 적도 받은 적도 없다”고 강력히 부인했다. 검찰은 이 전 회장의 진술과 그에 상응하는 김영완씨의 자필 진술서 내용이 일치한다는 점을 내세워 박 전 장관을 기소했다. 박 전 장관은 1심과 2심에서 징역 12년의 중형과 추징금 1백48억5천만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전 회장과 김씨의 진술 내용을 믿을 수가 없다”며 그 신빙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실제 돈을 직접 전달했다는 이 전 회장의 진술 내용 중 여러 가지 면에서 다소 의심스러울 만한 대목이 있다는 점은 그동안 언론에서도 몇 차례 지적돼 왔던 게 사실이다. 여기에 해외를 전전하며 도피성 행각을 벌이고 있는 김씨의 진술서도 증거로 채택되기 어렵다는 법조계의 지적도 수차례 제기된 바 있다.
대법원의 시각대로 박 전 장관이 문제의 1백50억원을 직접 받은 게 아니라면 향후 매우 복잡한 ‘진실게임’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익치 전 회장의 배달사고 가능성
현대에서는 분명히 1백50억원의 돈이 현대건설 계좌에서 나왔다. 그러나 박 전 장관은 이 돈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돈은 어디로 갔을까.
물론 이 돈 중 상당액은 검찰 수사과정에서 비자금 관리인이었던 김영완씨의 수중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김씨가 관리한 이 돈의 실제 임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최대 관건이다. 검찰은 김씨를 박 전 장관의 비자금 관리인으로 규정하고, “따라서 이 돈은 박 전 장관이 다음에 쓸 요량으로 김씨에게 맡겨서 대신 관리하고 있던 것”이라고 돈의 성격을 밝혔다.
하지만 이번 대법원의 판결대로 박 전 장관이 돈을 직접 받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자연히 시선은 돈의 중간 전달자인 이 전 회장과 관리자인 김씨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 이 전 회장의 배달사고 가능성이 대두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시나리오를 그동안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주간 오마이뉴스>의 김당 편집장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 사건은 돈을 전달했거나 또는 받았다고 하는 박지원 정몽헌 이익치 등 주요 등장인물 세 사람을 놓고서 이 돈을 관리한 김영완씨의 세 사람에 관한 각각의 친분도를 객관적으로 따져봐야 한다”며 “그동안 김씨는 정 회장과 박 전 장관의 비자금 관리인으로만 주로 등장했지, 이 전 회장과의 친분은 애써 축소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김 편집장은 김씨가 오랜 시간 동안 가장 가깝게 밀착한 상대가 이 전 회장일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정 회장이 검찰 조사에서 진술한 내용에도 이 같은 정황은 등장한다. 정 회장 자신이 김씨를 처음 본 것이 90년 전후였는데, 이때 김씨를 처음 소개한 이가 바로 이 전 회장이었다는 것. 반면 박 전 장관이 김씨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이보다 훨씬 이후인 97년 말~98년 초 무렵이었다.
이 전 회장과 김씨의 친분도는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두 사람의 동행에서도 잇따라 노출되고 있다. 두 사람은 지난 99년과 2000년 사이에 자주 동반 골프 라운딩을 가진 것으로 ‘권노갑씨 2백억원 수수의혹 사건’ 수사 과정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또한 두 사람은 2000년 3월8일에서 4월8일 사이에 있은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한간 예비접촉 기간에도 해외 출국 동선이 일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에는 물론 박 전 장관과 정 회장도 함께했으나, 특히 이 전 회장과 김씨 두 사람은 3월8일 싱가포르를 향한 첫 출국 당시 홍콩을 거쳐 싱가포르로 간 기록까지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9월 보도한 기사에서 김씨의 개인비서 역할을 했다는 O씨(미국 체류중)의 증언을 통해 이 전 회장의 배달사고 가능성을 집중 거론했다. O씨는 이 인터뷰에서 “대북송금 특검 수사가 시작되기 전인 2003년 3월에 김씨가 갑자기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도피하고 그 이후 현대 비자금 사건이 터져 김씨와 정 회장 사이에 고성이 오가며 전화통화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서 이 전 회장이 정 회장의 돈을 빼돌린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이 기사는 박지원측 변호인에 의해 재판의 증거 자료로도 제출된 것으로 밝혀졌다. O씨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번 1백50억원 사건의 진실은 정 회장과 박 전 장관을 중간에서 속인 이 전 회장과 김씨의 완벽한 ‘범죄의 재구성’이 되는 셈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우선 이 전 회장은 물론 수사를 맡았던 검찰이 이런 시각을 일축하고 있다.
정 회장이 이들 두 사람에게 깜쪽같이 속을 만큼 그렇게 멍청하게 당했겠느냐 하는 점도 의문이다. 정 회장이 남북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자주 접촉하던 박 전 장관에게 확인전화 한 통화만 걸면 금세 드러날 일이라는 것도 신빙성을 다소 약화시키는 대목이다. 또한 ‘배달사고’를 정 회장이 자살에까지 이르게 된 원인으로 보기엔 미약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또 하나의 대안 시나리오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현대의 자작극’ 가능성이다.
정-이-김의 자작극 가능성
박 전 장관의 변호인인 소동기 변호사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는 언론에서 제기한 배달사고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보다는 정 회장과 김씨, 그리고 이 전 회장 간에 어떤 연유가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며 현대의 자작극 가능성을 밝혔다.
소 변호사는 1백50억원의 성격에 대해서 “정 회장이 자체적으로 비축해 놓은 개인 비자금일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선상 카지노 사업 허가권을 위해 따로 마련해둔 로비자금일 가능성도 있다”며 “이 전 회장이 정 회장의 돈을 가로채기 위해서 중간에서 속이고 돈을 빼돌릴 정도로 (현대가) 그렇게 허술하다고 생각하긴 어렵다”고 밝혔다.
소 변호사는 김씨의 진술 내용 가운데 자신이 박 전 장관을 정 회장에게 처음 소개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자연스럽게 언급한 다음의 대목을 특히 주목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99년께 현대가 금강산유람선에 카지노 사업을 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김씨가 현대에 찾아가자 정 회장이 “정부에서 허가를 안해주려고 해서 고민이야”라고 토로했다는 것. 그러자 김씨가 “형, 그거 무슨 소리야. 내가 받아서 내가 운영할게”라며, 자신이 직접 박 전 장관을 정 회장에게 소개했다고 한다.
따라서 1백50억원은 궁극적으로 박 전 장관에게 로비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정 회장에 의해 김씨가 따로 관리하고 있었던 돈일 수도 있다는 가정이 나온다. 그렇다면 김씨는 검찰 주장처럼 박 전 장관의 비자금 관리인이 아니라 정 회장의 비자금 관리인이 되는 셈이다.
소 변호사는 “중요한 것은 그 돈이 박 전 장관에게 전달되지 않고, 그대로 김씨의 계좌에 남아 있었다는 점”이라며 “그러면 결론은 어느 정도 나오는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검찰 수사 도중 정 회장이 갑자기 자살을 선택한 대목도 이 같은 가능성에 다소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검찰 조사에서 이 전 회장과 김씨에 의해 박 전 장관 수수 쪽으로 몰아가는 데 자신도 동참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자살은 이 같은 죄책감과 진실 추적에 대한 압박감에서 비롯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일각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가능성은 모두 박 전 장관은 이 사건과 전혀 별개라는 전제하에 성립하는데, 당시 여건상 정부 실세였던 박 전 장관을 완전히 배제시키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박 전 장관에게 돈이 직접 전달되었는지의 여부가 판결의 주요 핵심사항이긴 하지만 박 전 장관도 광의적으로 분위기는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만약 박 전 장관이 문제의 1백50억원을 직접 받은 게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또 한 가지 경우의 수가 나올 수 있다. 박 전 장관을 매개로 한 여권 핵심과 정 회장의 ‘직거래 가능성’이다.
현대와 청와대의 직거래 가능성
대북송금 특검의 한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권노갑씨의 2백억원 수수나 박 전 장관의 1백50억원 수수는 그 성격상 동일하다. 그런데 대법원에서 한쪽은 인정하고 다른 한쪽은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라고 불만을 내비쳤다.
여기에는 권씨의 경우 2000년 총선을 위해 돈을 받았을 것이라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는 반면, 박 전 장관은 굳이 현대측에 돈을 받아서 쓸 만한 목적이 없었다는 점도 대법원 판결에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돈의 최종 귀착지가 박 전 장관이 아닐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다.
미국에 체류중인 전직 국정원 직원 K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대북송금의 실질적인 일은 청와대에서 다 이뤄졌고, 그 역할을 수행한 이는 청와대 K비서관이다. 박 전 장관은 대통령을 대신해서 도장찍는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 그에게 현대가 돈을 왜 가져다 주겠는가. 설사 주더라도 청와대에 전달하라고 줄 수는 있을 것”이라며 “내가 판단하기로는 현대와 청와대가 직거래를 했는데, 그 희생양으로 박 전 장관을 둔 것으로 보여지며, 박 전 장관 혼자서 그 희생양 역할을 다 떠맡기에는 너무 억울한 측면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박 전 장관의 개입 여지는 남아 있다. 비록 박 전 장관은 얼굴마담 역할만 하고 실질적인 작업은 청와대 핵심과 현대측에서 주도했다 하더라도 그래도 여전히 박 전 장관은 당시 실세 중의 실세였고, DJ의 복심이었다는 것이 주변의 평이다. K씨 역시 “박 전 장관이 돈을 직접 전달받지는 않았을지라도 그 내용을 훤히 꿰뚫고는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특검 관계자 역시 “이 사건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문제가 된 부분인 이 전 회장의 진술에 대해 보강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서로 입장이 다를 수도 있고, 특검 자체를 반대한 측도 분명히 있지 않았나.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분명 하나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돈이 북측에 건네졌고, 그 돈은 현대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거기에 박 전 장관은 당시 대북 밀사로서 중요한 역할 수행을 했다”고 주장했다.
박 전 장관의 1백50억 뇌물 수수에 대한 진실은 특검 관계자의 말처럼 5억달러 대북송금의 전체 테두리에서 극히 지엽적인 부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진실이 어떻게 가려지느냐 하는 문제는 자칫 지금껏 알려졌던 대북송금 사건의 진실마저 근본부터 뒤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만만찮은 파장과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