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정부에 우호적이었던 재야 법조계 분위기에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사진은 대한변협이 있는 변호사회관 건물. | ||
이달 말 선출되는 새 대한변협 회장에 현 정부와 현 변협 지도부에 비판적인 검사 출신 변호사의 당선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 정부의 각종 개혁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는 보수성향의 새로운 변호사단체인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시변)’까지 최근 공식 출범하고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그동안 개혁성향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분위기에 발맞춰 온 재야 법조계의 큰 틀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양상이다.
지난달 31일 서울변호사회는 차기 대한변협 회장 후보로 바로 전임 서울변회 회장인 천기흥 변호사(63·사시8회)를 선출했다. 서울변회는 변협 전체 변호사의 70%가량을 차지하고 있어 여기서 추천된 후보는 지금까지 전원 변협 회장에 당선돼 왔다. 따라서 천 변호사가 이달 말 있을 차기 변협 회장 선거에서 당선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셈이다.
문제는 천 변호사가 서울변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현 정부에 우호적인 현 변협 집행부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을 해왔다는 점이다. 지난해 3월 변협이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 의결에 대해 반대 성명을 발표하자 천변호사의 서울변회는 “탄핵반대가 전체 변호사들의 의견인 것처럼 국민들에게 전달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천 변호사는 차기 변협 회장 후보를 뽑는 자리에서 발표한 정견 발표에서도 보수적 시각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는 “변협은 권력을 비호하는 데 앞장섰고 비판기능을 상실했다”며 그동안 현 정부에 우호적이었던 현 변협을 비판했다. 이어 그는 “변협을 근본적으로 개혁,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이날 선거에는 천 변호사의 경쟁자로 민변의 지지를 받고 있는 판사 출신의 김성기 변호사가 출마해 재야 법조계의 ‘보·혁 대결’이 펼쳐졌다. 그러나 선거는 막판까지 경합을 벌인 끝에 천 변호사가 64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차기 변협 회장 후보로 선출돼 결국 보수의 승리로 귀결됐다.
▲ 차기 변협 회장으로 확실시되는 천기흥 변호사. MBC-TV 촬영 | ||
변협은 그동안 노무현 정부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개혁지향적인 태도를 보여 온 것이 사실이다. 변협은 지난해 국회가 대통령 탄핵을 결정하자 “입법부가 헌법과 법률을 유린한 것”이며 “법치주의의 종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변협 집행부는 탄핵에 대한 법률적 반대 논리를 생산,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또 변협은 헌법재판소가 수도이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을 때도 헌재의 논리인 ‘관습헌법론’의 문제점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변협은 정부의 이라크 파병결정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 사회의 진보적 목소리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변협은 사법개혁위원회에서도 로스쿨 도입 등 변호사들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는 각종 개혁 방안의 통과를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다 보니 노무현 대통령이 현 변협 회장인 박재승 변호사를 차기 대법원장으로 임명할 것이라는 분석도 법조계에서 강력히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변협이 진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현 재야 법조계가 개혁성향의 민변에 의해 이끌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민변 출신인 데다 정부와 여당의 핵심 요직에 민변 출신들이 대거 포진하면서 사회전반에 민변의 영향력이 커졌고 이는 변협의 정책 방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변협의 진보적 태도는 태생적으로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일 수밖에 없는 대다수 보수성향 변호사들의 소리없는 불만을 양산했다. 지난해 탄핵정국 때에는 서울변회 외에 대구·부산·창원 변호사회도 변협 입장에 대해 반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와중에 헌재의 수도이전 위헌 결정을 이끌어낸 이석연 변호사가 주도하는 ‘시변’의 출범은 재야 법조계 내 보수세력이 조직적으로 제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되고 있다. 시변은 창립선언문에서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과의 제휴나 연대를 하지 않을 것”이라며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했지만 사실상 정치적으로 현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실제 시변은 지난 2일 개최한 헌법포럼에서 여권이 추진중인 4대입법 중 하나인 사학법 개정안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 이날 포럼에서 이석연 변호사는 “사학법은 검토하면 할수록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주의적 질서와 시장경제에 위배된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사학법뿐만 아니라 과거사법 및 언론관계법 등의 위헌성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하겠다는 입장이어서 결과적으로 여권이 추진중인 개혁정책 전반을 반대하고 있는 상태다.
이 같은 변호사 업계의 보수적 흐름은 천기흥 변호사가 차기 대한변협 회장 후보로 선출되는 결과로 이어진 것다. 변협회장 후보 선출에 참여한 한 변호사는 “이번 선거 결과는 정치적으로 편향된 모습을 보여온 현 변협 집행부에 대한 회원들의 심판”이라고 말했다. 특히 천 변호사는 ‘시변’에 소속돼 있는 1백50여 명의 변호사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법조계에서는 시변의 출범 자체가 천 변호사와 교감 속에서 이뤄졌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 ‘시변’ 출범을 주도한 이석연 변호사. | ||
결국 천 변호사가 회장에 정식 당선되면 이 같은 변호사 업계의 사정을 감안, 변협을 변호사들의 실질적인 이익단체로 이끌어갈 것으로 보인다. 천 변호사는 선거공약에서도 “변호사 대량 생산 정책을 막아내겠다”며 사개위에서 결정된 로스쿨 도입안을 저지하겠다는 뜻을 시사했다. 로스쿨 도입은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사법개혁의 핵심 사안이어서 새 집행부의 변협은 출범하자마자 현 정부와 충돌할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변협의 보수화에 대해는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민변 소속의 한 소장 변호사는 “변협이 다른 일반 이익단체들과 마찬가지로 소속 변호사들의 이익 옹호에만 치중해 사회 개혁이나 공익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법조계 전반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크게 훼손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