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감정까지 ‘삐죽’…갈수록 서릿발
▲ 열린우리당이 검·경 수사권 조정안을 발표하자 검찰이 집단반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진은 서울중앙지검과 천정배 장관(왼쪽), 정상명 총장. | ||
지난 12월5일 열린우리당이 경찰을 수사주체로 인정하고, 검·경을 수사의 상호 협력 관계로 규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검·경 수사권 최종 조정안을 발표하자 정상명 총장 등을 위시한 검찰 전체가 집단 반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월 강정구 교수 불구속 수사지휘 파문으로 김종빈 전 총장이 물러났을 때보다 여당에 대한 반발 수위는 한층 더 높다. 검찰 내에서 대통령과 가장 코드가 잘 맞는다는 정 총장부터가 연일 감정 섞인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심지어 검찰 확대간부회의에서는 “여당이 표를 의식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강 교수 불구속 수사지휘로 검찰을 자극했던 천정배 법무부장관도 이번만은 검찰편을 들어 여당의 최종안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일단 검찰 내부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반발은 잠복기로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검찰 일부에서는 이미 시나리오가 경찰을 수사 주체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보고 천 장관이나 정 총장의 반발도 오히려 검찰을 무마하려는 ‘쇼’라고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각 검찰청의 일부 간부 및 평검사들은 현 정권을 질타하면서도 수사권 조정 문제에 안일하게 대처한 법무부장관 및 검찰 수뇌부에게도 강한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것도 이런 측면이다. 일부 평검사들 사이에서는 “대통령과 가깝다는 천 장관과 정 총장만 믿었는데 오히려 앞장서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것 아니냐”는 격앙된 반응까지 나오고 있다.
여당이 발표한 조정안에 경찰이 요구했던 안이 대폭 수용되면서 검찰은 충격에 휩싸인 모습이다. 그야말로 최악의 안이라는 것. 아직 당론으로 확정된 사안이 아니지만 경찰의 수사 주체성을 인정하고 검·경간의 관계를 상명하복에서 상호 협력·경쟁 관계로 재편하자는 경찰측의 조정 방안이 여권의 공식적인 기류로 형성됐다는 점에서 검찰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내란·외환죄 등 검찰 일상 실무에서는 그다지 많이 일어나지 않는 사건들을 제외한 여타 민생사건의 검사 수사권 지휘를 배제시킨 부분에 대해 크게 격노하고 있다.
검찰의 수사권 일부를 경찰에 넘긴다는 논제는 이미 노무현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세운 바다. 참여정부가 들어선 후 경찰의 독자적 수사권 부여가 정책 과제로 선정되면서 지난해 9월부터 ‘검·경 수사권 조정 협의체’를 설치, 수사제도 개선에 관한 논의가 처음으로 진행됐다. 그 뒤 12월부터 올해 5월까지 검찰과 경찰은 ‘검·경 수사권 조정자문위원회’라는 틀에서 서로의 요구사항을 가감 없이 주고받았다.
그간 수사권 조정 논의가 진행되어 오면서 민생범죄에 한해서 경찰에 수사권이 부여되는 정도까지는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것이 검찰의 입장이었다. 다만 검사의 경찰 수사에 대한 잠재적 지휘 가능성은 그대로 놔둬야 한다는 것이 검찰 주장의 기본골격이었다.
검찰로서는 이번 여당 안이 낯선 것은 아니다. 검·경 수사권 조정 자문위원회 논의 당시 경찰측 자문 위원들은 이미 이번 여당의 안과 같은 안을 중재안으로 제시한 바 있다.
지난 여름 검찰이 책자로 발간한 <검·경 수사권조정자문위원회 활동경과에 대한 보고서>를 보면 경찰 추천 외부자문위원들이 제시한 최종안 두 가지에 모두 민생범죄에 대한 검사의 수사지휘권 배제 내용이 포함돼 있다.
자문위원 전원이 제시한 1안에는 “검사의 사법경찰관리에 대한 수사지휘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중요범죄(내란의 죄, 외환의 죄, 국교에 관한 죄, 국기에 관한 죄, 공무원에 관한 죄 등 12개 항목)에 한정함”이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가 독자적으로 제시한 2안에도 “검사의 수사주재자적 지위를 명시하되, 사법경찰관리에 대한 수사지휘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일부 중요범죄에 한정함”이라는 전제가 포함돼 있었다. 더구나 검찰측 위원 조정안에서도 사법경찰관리는 검사 지휘 없이 수사가 가능하다는 권고안이 나왔었다. 즉 검찰은 미리부터 경찰측이 원하는 최상의 카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검찰 관계자들은 여당이 수사권 조정안을 꽤 비중 있게 발표한 배경에 주목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번 조정안 발표가 정기국회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맞춘 자연스러운 입장 표명 수준이라는 반응이다.
그러나 검찰은 시각이 다르다. 검찰은 그간 법무부 및 열린우리당 내부에서조차 검찰의 수사권을 배제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이 적잖았고, 청와대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열린우리당 검·경 수사권 조정 기획단의 안을 당론의 하나 정도로 여겨왔음에도 불구하고 여권이 굳이 경찰에 힘을 실어주려는 자체가 뭔가 석연치 않다고 보는 분위기다.
노 대통령과 형·아우로 격의 없이 지내는 정 총장이 여당에 대해 정치적 발상 운운하며 분노를 표출하는 자체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겠느냐는 게 검찰 관계자들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최근 청와대가 유감을 표한 전직 국정원장의 구속 등 일련의 상황에 대한 제도적 압박 카드가 아니냐는 항변이다.
검찰뿐 아니라 정치권 주변에서도 수사권 조정안과 관련, 분분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일단 여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이번 결정이 노 대통령의 통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한 만큼 당·정 협의와 청와대와의 조율 과정에서도 현 조정안이 크게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반응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열린우리당이 경찰과 검찰, 그리고 정치권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사전포석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원래 의도는 장기전으로 끌고 갈 계획이지만 돌다리도 두들겨보는 것처럼 일단 검찰이나 경찰, 그리고 정치권의 반응부터 살펴보자는 게 우선이 아니었겠느냐는 관측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당·정 협의에서 결론을 내는 단계가 아닌 당 내 조정위원회에서 먼저 ‘카운터펀치’를 날리면서 협상의 여지를 남겨둔 점 역시 확실한 선을 긋기보다는 점진적 합의를 바라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지 않느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지난 12월6일 천 법무장관이 “조정이 필요하더라도 조정은 단계적, 점진적으로 이뤄질 필요성이 있다”고 언급한 ‘속도조절론’은 꽤 설득력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 여당이 일종의 보은 차원에서 경찰에 힘을 실어준 뒤 검찰을 달래면서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풀려는 의도가 아니었겠느냐는 시각도 있다. 참여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 여당은 경찰의 도움을 적잖게 받았고, 또한 경찰 출신 의원들이 당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만큼 우선적으로 당에서라도 경찰에 손을 들어주는 모양새를 취하는 게 여러 모로 좋지 않았겠느냐는 전제다. 여당의 경찰 편들기와 그리고 뒤이어 천 장관이 “수사의 책임성과 통일성을 고려하자”며 검찰을 달래는 흐름이 미리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처럼 잘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