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노무현 대통령(오른쪽)과 김혁규 위원의 청와대 회동 모습. | ||
내달 5일 실시될 6·5 재·보선 얘기다. 대상지역은 모두 1백3곳. 광역지방자치단체장 4곳(부산시장, 경남·전남·제주지사)과 기초자치단체장 18곳, 광역의회 의원 35곳 및 기초의회 의원 46곳 등 만만치 않은 스케일이다. 최대 관심사는 역시 여야간 전체 역학구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광역단체장 선거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당초 안상영 전 시장의 옥중 자살(2월4일), 김혁규 전 지사의 사퇴(2003년 12월15일)로 일찌감치 단체장 유고(有故)가 발생한 부산시장·경남지사 보궐선거를 준비해왔다. 총선 직후 실시되는 ‘2차 PK목장의 결투’에 따라 향후 정국 기상도가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양당 지도부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권으로선 17대 총선에서 PK(부산·울산·경남) 4석이란 형편없는 성적표를 얻은 만큼 6·5 재·보선에서만큼은 반드시 설욕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해왔다.
하지만 총선을 지나, 4월 말로 접어들면서 재·보선 구도는 변화를 맞게 됐다. 4월27일엔 우근민 제주지사가 대법원으로부터 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 3백만원을 선고받아 지사직을 상실했다. 이틀 뒤인 4월29일에는 과거 국민건강보험 이사장 재직시 수뢰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던 박태영 전남지사가 한강에서 투신 자살했다. 제주지사 재선거, 전남지사 보선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열린우리당-한나라당간 ‘PK 각축전’으로 예상됐던 6·5 재·보선은 ‘전국 선거’의 양상을 띠게 됐고, 특히 열린우리당-민주당간 ‘2차 호남 민심 쟁탈전’도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됐다.
그러나 구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권의 관심은 여전히 PK 광역단체장 보선에 쏠려 있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 등 여권 핵심인사들이 ‘전국정당화’를 연일 강조하고 있는 것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더구나 경남지사 보선은 차기 총리 내정설이 나도는 김혁규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이 여권에 합류하기 위해 지사직을 사퇴하면서 만들어진 공간이다. 또 부산시장 보선 역시 최근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 부산 유치 등의 영향에다, APEC 유치의 일등공신인 오거돈 시장권한대행의 영입이 사실상 확정됨에 따라 ‘해볼 만한 싸움’으로 평가받고 있는 상황이다.
우선 여권 핵심관계자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노 대통령은 PK 양대 보선에서 승리해 17대 총선에서 못 이룬 전국정당화를 완성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총선 투표 다음날인 4월16일 총선에서 영남지역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김혁규 상임중앙위원와 단독 오찬회동을 가진 자리에서 “6·5 부산시장, 경남지사 보선에서 전국정당화를 완성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김 위원은 이날 회동이 있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열린우리당 6·5 지방선거대책위원장에 임명된 바 있다.
총선 이후 열린우리당 내에서 사실상 노 대통령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문희상 당선자(대통령 정치특보)의 최근 언급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문 당선자는 지난 1일 PK지역 출마자들과 현지에서 가진 회동을 통해 전국정당화에 대한 노 대통령의 의지를 가감없이 소개해 주목을 끈 바 있다.
문 당선자는 총선 이틀 뒤인 4월17일 청와대에서 3시간 동안 노 대통령과 식사를 하면서 나눈 얘기를 다음과 같이 전달했다.
“(노 대통령이) 영남 이야기가 나오면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멀리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가슴이 미어진다는 표현을 했다. 눈물을 글썽일 정도였다. 영남지역 모든 출마자들을 불러 격려하고 싶다고 했지만, 일부 언론에서 ‘탄핵소추 중인데 무슨 정치냐’는 지적이 있고 해서 따로 불러 격려하지 못하고 저를 대신 보내 뜻을 전달해 달라고 했다.”
여권 핵심부의 PK 양대 광역단체장 보선 필승에 대한 의지는 공천 과정과 ‘김혁규 차기 총리’ 카드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는 평가다. 열린우리당은 총선이 끝나자마자 PK 보선에 내세울 후보로 부산시장엔 오거돈 시장권한대행, 경남지사엔 장인태 전 도지사권한대행을 일찌감치 ‘낙점’해 둔 상태다. 부산시장의 경우 중앙당 공모에 이해성 전 청와대 홍보수석, 허옥경 전 해운대구청장 등이 신청했지만, 경선없이 후보를 결정한다는 방침을 밀어붙일 태세다.
열린우리당이 경선이라는 일반적 공직후보 선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관료 출신, 그것도 단체장직을 대행하고 있는 인사들을 후보로 내정한 것은 이제까지의 관행과는 분명 어긋나는 일. 더구나 오 대행과 장 전 대행은 이제까지 한나라당 성향의 인물로 분류되어 왔다.
여권은 한발 더 나아가 함께 치러지는 부산 해운대구청장과 창원·양산시장 등 기초단체장 선거도 현직 관료 출신을 후보로 내세운다는 방침이다.
‘김혁규 총리설’은 보다 직접적으로 여권 핵심부의 재·보선 필승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노 대통령은 10년여에 걸친 경남도지사 경력에서 축적된 김 위원의 행정경험과 열린우리당 전당대회 직전 여권에 합류한 결단, 국제적 감각과 외국인 투자실적 등에 대해 진작부터 높이 평가한 것이 사실.
그러나 김 위원을 고건 총리의 후임으로 임명하기엔 ‘경남 대통령-경남 총리’라는 지역편중 논란에다, 그를 총리에 임명할 경우 한나라당의 극력 반발이 예상되는 등 걸림돌이 적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여권 핵심부의 지금 분위기는 6·5 재·보선 필승을 위해서라면 이 모든 ‘난관’을 무릅쓸 수 있다는 쪽으로 정리되고 있다.
한편 여권 핵심부가 이처럼 PK 재·보선에 ‘올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한나라당엔 비상이 걸렸다. 한나라당에선 현재 부산시장 후보에 허남식 전 부산시 정무부시장과 최재범 전 서울시 제2행정부시장, 문정수 전 부산시장 및 김정희씨(산부인과 의사) 등이 신청한 상태. 그러나 실제로는 허 전 부시장과 최 부시장 간의 2파전이란 분석이 일반적이다.
허 전 부시장은 부산에서 오랫동안 공직생활을 해 부산시정에 밝은 데다 55세(49년생)에 비교적 젊은 나이로 세대교체 요구에도 적합하다는 평을, 최 전 부시장은 서울 발전모델 입안자로서 부산발전 모델을 짜는 데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허 전 부시장은 안상영 전 시장 자살의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동성여객 비리사건 연관설이 나돌았던 점이, 최 전 부시장은 30여년의 공직생활을 대부분 서울에서 했다는 핸디캡을 안고 있다는 것이 한나라당의 고민이다.
경남지사의 경우 상황이 더욱 안 좋다는 평가다. 하순봉 김용균 이주영 의원 등 4·15 총선에서 낙천·낙선한 인사들이 후보 신청을 한 가운데 송은복 김해시장, 김태호 거창군수, 권영상 변호사, 안병호 전 수방사령관 등이 가세해 숫자상으로는 흥행을 이뤘지만, 경쟁력 면에서는 합격점을 주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한나라당은 이처럼 ‘인물 대결’에서 열린우리당측에 밀리는 양상을 보이는 데다 여권 핵심부가 ‘김혁규 총리’ 카드까지 활용할 움직임을 보이자 깊은 고민에 빠져들고 있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김 위원의 차기 총리 내정설이 확산되자 일제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며 ‘불가론’을 펴고 나선 것도 6·5 재·보선에 미칠 파장을 우려해서라는 것이 정설이다.
한나라당으로선 지난해 12월 탈당해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PK 교두보 확보를 위해 최일선에 섰던 김 위원을 진작부터 경계해온 터다. 특히 김 위원이 관선까지 포함해 경남지사를 네 번이나 연임, PK에서 튼튼한 기반을 가진 인물인 만큼 총리에 기용될 경우 보선 판도에 상당한 역할을 하리란 점을 우려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선 벌써부터 만약 김 위원이 총리에 지명될 경우 인사청문회를 거부하는 등 국회 운영에 협조해선 안된다는 주장까지 거침없이 나오는 등 ‘김혁규 때리기’에 나섰다.
김형오 사무총장은 “총선에서 국민들이 표를 통해 상생의 정치를 하라고 한 것이 보름도 지나지 않은 터에 6·5 재·보선의 원인을 제공하게 한 사람을 총리에 임명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라고 했고, 같은 민주계로 김 위원과 ‘호형호제’해온 사이인 김무성 의원도 “한나라당이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인준할 수 있는 사람이 총리에 지명돼야 한다. 배신자가 출세하는 사회가 돼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며 가세했다.
한나라당은 그러나 현실적으로 열린우리당이 원내 과반 이상 의석을 갖고 있는 만큼 여권 핵심부의 ‘김혁규 총리’ 카드를 저지할 대책이 없다는 점에 난감해 하고 있다. 여기에 박근혜 대표가 연일 ‘민생 우선’을 강조해 온 터에 총리 인준 문제를 17대 국회 초반부터 쟁점으로 삼을 경우 안팎의 ‘역풍’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진 형편이다.
PK지역 한 의원은 “6·5 재·보선은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파상공세를 막느라 가용인력을 ‘올인’하는 바람에 마땅한 인물을 내세울 수 없게 된 점, 유권자들 사이에 한나라당에 대한 견제심리가 발동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진작부터 어려운 선거가 되리란 예상이었다”며 “상황이 이런 터에 여권이 다시 전방위 공세로 나서면 솔직히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형편”이라고 말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