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공모·사추위는 ‘들러리’
▲ 정연주 전 KBS 사장 | ||
‘정 사장이 KBS 사장이 되도록 방치하지 않겠다’ (한나라당)
KBS 이사회(이사장 김금수)가 9일 11명의 이사 중 6명의 표를 얻은 정연주 전 사장의 임명제청을 결정했다고 발표하자 곧 바로 터져 나온 반응들이다.
이사회 대변인을 맡고 있는 이기욱 이사는 정 씨 제청 결정 후 “정 전 사장의 공영방송에 대한 비전 제시와 철학을 높이 평가했다”며 임명제청 사유를 밝혔다. 청와대는 “이사회의 결정을 받아들여 제청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정된 절차로 가지 않을까 싶다”(윤태영 청와대 대변인)고 밝혔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정 사장의 임명은 기정사실인 셈이다. 이사회의 제청을 받은 정연주 전 사장은 대통령의 임명절차를 거쳐 최종 임명되며 KBS 사장직이 한 달 이상 공석인 점을 놓고 볼 때 임명 절차는 신속히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KBS 노조를 비롯 일부에서 그렇게 반대하던 정연주 씨의 사장 임명은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예상돼 왔던 일이다. KBS의 한 고위간부는 ‘하늘이 두쪽 나도 정 씨가 사장으로 추천될 것’이라고 말해왔다. 10월 말 KBS 사장후보추천위원 한 명이 “들러리는 싫다”고 사퇴하면서 이러한 관측은 현실화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KBS 노조는 정 씨의 사장 선임을 그렇게 반대하고 청와대는 왜 그렇게 정 씨 사장 선임에 집착했던 것일까.
지난 10월 24일 지금종 KBS 사장후보추천위원(문화연대 사무총장)이 “KBS 이사회에 추천할 최종 사장 후보 수가 KBS 이사회 결의대로 5명으로 진행된다면 사추위는 들러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사추위원직을 사퇴하면서 정 씨의 사장 선임은 절차상의 문제로 인식돼 왔다. 지 씨에 따르면 “사장 후보를 5배수로 한다는 것은 응모자 13명 중 유력 후보가 모두 포함된다는 뜻이어서 민주적인 의미에서 사추위가 별 권한을 갖지 못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초 KBS 이사회는 사장공모 응모자가 40~80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사추위의 사장 후보 추천자 수를 5명으로 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반발하는 노조 측에는 “응모자가 20명 이하면 다시 논의하자”고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KBS 사장 후보를 공모한 결과 응모자는 정연주 전 사장을 포함해 모두 13명이었다. ‘청와대가 정 사장 연임을 원한다’는 설이 유포되면서 응모를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소문이다.
KBS 노조 관계자는 “이사회가 약속과 달리 ‘5배수 추천’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결국 정연주 씨가 사장후보 추천에서 배제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막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후 KBS 사장 선임 과정은 파행의 연속이었다. KBS 노조는 “사장후보추천위원회 절차를 국민에게 공표해 놓고, 이를 거치지 않은 채 사장을 임명제청한 것은 일종의 재량권 남용”이라며 소송도 불사한다는 방침이다. 또 사장을 뽑은 11명의 KBS 이사 가운데 방석호 추광영 이춘호 이사는 임명제청 절차에 문제를 제기하며 이날 KBS 이사회 사무국에 이미 사퇴서를 제출, 후유증이 간단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기도 하다.
앞서 KBS 이사회는 ‘정연주 사장 연임 반대’를 주장한 노조의 총파업을 막기 위해 지난 9월 26일 KBS 이사 4명과 외부인사 3명 등 7명으로 구성된 ‘사추위’ 구성 안을 극적으로 타결했다.
그러나 지금종 사추위원이 사퇴한 후 이사회는 ‘노조 측의 ‘보궐선임’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은 사추위의 추천 절차를 생략하고 이사회가 직접 선임 작업을 벌였다.
KBS 노조 측은 “사추위에 참여한 KBS 이사 4명 가운데 1명이 한나라당 추천이고 노조와 이사회가 협의 추천키로 한 사추위 인사가 3명”이라며 “KBS 이사회는 지금종 위원 사퇴 이후 비로소 ‘최악의 경우 5배수 추천에도 정연주 사장이 들지 못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 아예 사추위를 무산시키는 방향으로 몰아갔다”고 주장했다.
KBS 이사회의 ‘의중’이 명확한 상황에서 ‘KBS 사장 국민공모’ 자체도 요식행위에 불과했다는 주장도 있다. 한 보도에 따르면 사장 응모자 13명 가운데는 올해 27세(79년생)인 출판사 사장, ‘KBS를 즐겨본다’는 이유를 들어 응모했다는 종교가, 자신을 소개하지도 않은 채 ‘내 책에 모든 비전이 있다’고 주장한 사람(28세) 등도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다. KBS 노조의 주장대로라면 “이사회가 13명의 후보 중 이런 유의 응모자를 제외한 6명 중 5명을 추리는 ‘5배수 추천’조차 불안해하다 막판에 결국 사추위를 무산시켰다”는 것이다.
KBS 노조는 이사회에 대한 퇴진운동과 함께 정연주 사장에 대한 출근저지 투쟁을 벌일 태세다. 한나라당도 “노 대통령이 무리수임을 뻔히 알면서도 정연주 씨 카드를 끝까지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내년 대선을 겨냥한 방송장악 기도”라며 “한나라당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정연주 씨의 사장 취임을 막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야당 측이 정 씨 선임을 이처럼 반대하는 것은 그가 과거 신문 칼럼 등을 통해 보수 언론과 정치세력을 맹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런 공로로 KBS 사장이 된 것으로 보고 있고 내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재임명된 것에 강한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정 사장 후보는 1970년 동아일보 기자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75년 ‘동아 사태’ 때 해직된 뒤 한겨레신문 워싱턴 특파원으로 12년간 근무하다 2000년 귀국해 논설주간을 지냈다.
한나라당 측은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과정에서 방송의 영향, 탄핵 사태 이후의 KBS의 행보를 보면, 정권이 다시 정연주 사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확연히 드러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 씨가 KBS 사장으로 취임한 직후인 2003년 여름부터 일련의 ‘개혁 프로그램’을 신설하고 노 대통령과 유사한 코드의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으며 이들 프로그램의 전반적 기조는 현 정부가 쟁점화했던 주요 정치 사회적 의제와 동일했다는 주장이다. 특히 2004년 ‘탄핵사태’ 당시 KBS가 보인 모습은 공영방송으로서의 위치를 저버린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반발은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만은 아니다. KBS의 방만한 경영도 끊임없이 도마 위에 올랐다. 얼마 전에는 임원 임금의 20%를 삭감했다가 만성적자 경영에도 6개월 만에 삭감액 전액을 돌려줘 논란이 일기도 했으며 고액 연봉을 받는 상위 직급의 수가 하위 직급의 2배가 넘는다는 사실도 감사결과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달 14일 밤에는 20여 분 간 방송이 중단되는 사태가 빚어져 국가기간방송으로서의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런 모든 문제에 정 씨가 전적으로 책임을 질 수는 없을지 몰라도 공영방송인 KBS가 정치적인 논란에 휩싸였다는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이정철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