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분의 1g’이면 홍길동도 잡는다
▲ 악마의 가면 국가수에서 연쇄살인범 강호순이 살인하고 암매장한 것으로 밝혀진 시신과 유골을 감식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2006년 여름 발생한 ‘서래마을 영아 유기사건’은 국제적으로 한국 과학수사의 위상을 세워준 중요한 사례로 꼽힌다. 당시 냉동된 상태로 유기된 영아의 유전자 감식을 맡은 국과수는 영아의 산모가 집주인의 아내인 베로니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 한국 경찰 수사력에 의문을 표했던 외신들조차 수년 전에 유기된 영아의 사체에서 DNA를 뽑아내 친모를 밝혀내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동안 경찰이 DNA 감식을 통해 밝혀낸 사건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기상천외한 ''DNA 감식의 추억''속으로 들어가봤다.
“솔직히 강을 잡았을 때만 해도 설마설마했다.”
부녀자 연쇄살인범 강호순을 검거한 수사관계자의 고백이다. 애초 군포 여대생 A 씨 살해혐의로 강 씨를 체포했던 경찰은 그가 그동안 미해결사건으로 남아있었던 부녀자 연쇄실종사건의 범인임을 밝혀내는 쾌거를 이뤄냈다. 확실한 범행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자백을 받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이 잔혹한 연쇄살인범의 입을 열게 만들었을까.
A 씨를 살해한 사실을 자백한 후에도 강 씨는 추가혐의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악마의 가면’을 벗겨낼 수 있었던 것은 국과수의 DNA감식 때문이었다.
결정적인 증거는 강 씨의 리베로 차량에 있던 점퍼였다. 1월 28일 국과수는 ‘실마리가 될 단서가 있는지 찾아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경찰로부터 점퍼를 건네 받았다. 점퍼에 루미놀(혈흔 감식용 화합물)을 뿌리자 오른쪽 소매 끝부분에서 푸르스름한 형광 빛이 나타났다. 육안으로 식별되지 않았던 혈흔이었다. 혈흔을 채취한 면봉을 튜브에 담고 DNA 분리용 시약처리를 한 후 12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DNA는 소량의 DNA를 분석가능한 양으로 늘려주는 유전자 증폭기로 보내졌다. 수시간 후 혈흔에서 검출한 DNA가 지난해 11월 수원에서 실종된 김 아무개 씨(48)의 것으로 확인되면서 강은 부녀자 연쇄실종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됐다. 혈흔에서 검출된 DNA는 극히 미량인 1ng(10억분의 1g)에 불과했다. 당시 감식을 담당한 국과수 관계자가 ‘모기 눈물보다 적은 분량’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추가범행을 부인하던 강 씨는 국과수에서 보내온 DNA 분석 결과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강 씨는 육안으로는 식별조차 어려운 점퍼 얼룩에서 DNA를 뽑아 낼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건을 넘겨받아 강 씨의 추가범행을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는 검찰은 현재 국과수에서 ‘곡괭이’의 비밀을 풀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강 씨가 피해자들을 암매장하는 데 사용한 곡괭이에서 피해자들이 아닌 다른 여성 두 명의 DNA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검찰은 제3의 피해자가 있을 가능성에 주목해 국과수에 감식을 의뢰했다. 국과수는 보관 중인 실종자와 실종자 가족들의 DNA 1000여 건과 대조했지만 곡괭이에서 검출된 DNA와 일치하는 것은 아직 찾지 못했다. 하지만 실망하기는 이르다. 곡괭이에서 나온 DNA의 주인을 밝혀내는 것은 시간문제기 때문이다. 현재 국과수에 보관돼 있지 않은 실종자와 살인사건 피해자들의 DNA을 취합해 대조·감식하는 작업을 추진 중인 검찰은 국과수의 활약에 또 한 번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살인현장에서 채취된 DNA는 억울한 죽음의 비밀을 푸는 열쇠나 다름없다.
2005년 9월 10일 인천시 남구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전날 밤 멀쩡하게 잠자리에 들었던 여고생 A 양(16)이 다음날 아침 자신의 침대 위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부검결과 A 양은 누군가에게 끔찍하게 성폭행을 당한 뒤 목이 졸려 살해된 것으로 판명났다. 하지만 현장에는 체모는 물론이고 지문이나 족적 등 범인을 특징지을 만한 어떤 단서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범인은 DNA를 ‘흘리고’ 갔다. 바로 A 양의 몸에서 범인의 DNA가 채취됐던 것. 그리고 5개월간 범인을 잡기 위해 뛰어다닌 경찰은 A 양의 집 부근에 사는 박 아무개 씨(29)를 살인혐의로 체포, 구속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 강호순의 곡괭이에서 또다른 DNA가 발견돼 제3의 피해자가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 ||
문제의 정액에서 나온 DNA가 한 달 여 전 여고생 A 양의 몸에서 검출된 DNA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박 씨는 A 양 살해에 대해서만은 극구 부인했지만 국과수에서 통보해온 감식결과 앞에서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무심코 버린 담배꽁초 때문에 꼬리가 잡힌 ‘운없는’ 연쇄강간범도 있다.
2007년 2월부터 인천 일대에서 새벽에 귀가하는 5명의 여성들을 상대로 파렴치한 강간행각을 벌여온 최 아무개 씨(31). 당시 경찰은 인천 지역 여성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범인을 잡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소용없었다. 결국 현장에 버려져 있는 담배꽁초를 몽땅 수거한 경찰은 과학수사대에서 확보 중인 성폭행전력이 있는 인물들의 유전자와 일일이 대조하는 엄청난 작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최 씨의 DNA와 일치하는 꽁초가 나왔고 결국 그간의 범행일체를 자백받을 수 있었다.
땀 한 방울이 범인을 특징지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지난해 7월 31일 특수강간 등의 혐의로 구속된 김 아무개 군(17)이 그 예다. 김 군은 귀가하는 여성을 흉기로 위협한 뒤 돈을 뺏고 성추행하는 등 일주일 동안 부녀자 5명을 상대로 파렴치한 행각을 벌여온 것으로 드러났다. 재미있는 것은 김 군이 슬리퍼 때문에 검거됐다는 사실이다.
범행 당시 김 군은 피해자가 소리를 지르자 당황한 나머지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두고 달아났다. 슬리퍼에 묻어있던 땀에 대한 디옥시리보핵산(DNA)를 채취한 경찰은 주변 탐문수사 결과 동일한 DNA를 갖고 있는 김 군을 체포할 수 있었다.
호빵 한 조각으로 신출귀몰한 절도범을 잡은 일도 있다. 올 1월 11일 밤 광주시의 한 성형외과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컴퓨터와 카메라 등을 훔쳐 달아났는데 현장에는 어떤 단서도 남아있지 않았다. 현장을 살펴보던 경찰은 우연히 쓰레기통에서 먹다 버린 호빵 한 조각을 발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국과수에 DNA 감식을 의뢰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광주 일대에서 절도행각을 벌이다 검거된 김 아무개 씨(36)를 조사하던 경찰은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김 씨의 DNA가 반년 전 호빵에서 채취한 DNA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침 묻은 호빵 한 조각이 미궁에 빠졌던 사건까지 해결한 셈이다. 3년 전 울산에서 씹다버린 껌에서 추출해낸 DNA로 연쇄 성폭행범을 검거한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과학수사 드라마 CSI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더 이상 담배꽁초나 정액, 타액이 묻은 휴지 등에서 DNA를 검출해낼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워하지 않는다. DNA는 세포가 있는 부위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채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스토커가 보낸 편지의 우편 뒷면에 묻어있던 타액을 대상으로 DNA 검사를 실시, 스토커를 검거한 사례도 있다.
과학수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멀리 더 높이 가 있다. 말라 비틀어진 포도씨 한 알에서 범인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면 믿어지는가. 실제로 그런 기막힌 일이 있었다.
2006년 10월 30일 노원구 상계동의 한 주점에서 주점 여주인 송 아무개 씨(52)가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됐다. 범인은 성폭행 사건으로 위장하기 위해 송 여인의 하의를 벗겨 놨지만 부검결과 성폭행 흔적은 없었다. 문제는 범인을 드러낼 단서가 일절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때 경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범인이 앉은 것으로 추정되는 테이블이었다. 테이블에는 맥주병과 컵, 재떨이, 이쑤시개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지만 유효한 단서채취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과학수사팀이 주목한 것은 테이블에 떨어져 있는 포도씨 한 알이었다. 범인이 안주로 포도를 먹었을 거라고 본 경찰은 국과수에 포도씨에 대한 DNA 감식을 의뢰했고 며칠 후 국과수에서는 ‘신원미상의 남성 두 명’이라는 통보를 해왔다.
그로부터 보름 후 천안에서 한 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천안시 성정동의 한 원룸에서 40대 여인이 목이 졸려 살해된 사건이었다. 범인이 사건 당일 노원구 월계동 일대에서 성인 채팅 전화를 하고 PC로 인터넷에 접속한 사실을 확인한 경찰은 김 아무개 씨(34)와 민 아무개 씨(34)를 살인혐의로 검거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후에 드러났다. 범행의 치밀함 등으로 볼 때 여죄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수사팀은 이들이 검거 당시 노원구에 은신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얼마 전 발생했던 주점 여주인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당시 국과수에 의뢰해놓은 포도씨에서 검출된 유전자를 확인한 결과 이들의 유전자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천안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범인들이 노원구 주점 여주인도 살해했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DNA 감식으로 억울한 누명을 벗은 사연도 있다. 2007년 5월 21일 수원의 한 건물 쓰레기통에서 검은 비닐봉지에 쌓인 영아의 사체가 발견됐다. 한 노숙인으로부터 정신지체장애 여성인 조 아무개 양(16)이 범인이라는 진술을 받은 경찰은 조 양을 체포, 영아를 유기했다는 자백을 받은 후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하지만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유전자 감식을 의뢰했고 국과수로부터 ‘조 양과 영아가 친모 관계가 아니다’는 통보를 받았다.
결국 조 양은 무혐의로 풀려났다. 정신지체 여성이 경찰의 자백강요에 의해 졸지에 영아살해유기범으로 몰릴뻔한 사건이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