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외교 달인” VS “유엔의 투명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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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 내 델리깃 라운지에서 열린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주최 회원국 정상·대표 초청 오찬. 반 총장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오른쪽), 펠리페 6세 스페인 국왕(왼쪽) 등 참석자에게 건배를 제안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조용한 외교의 달인 vs 유엔의 투명인간’.
지난 2009년 취임 3년째를 맞이하던 해 반 총장의 지도력을 앞 다퉈 평가했던 서구 언론의 의견은 대개 이렇게 나뉘었다. 우선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은 언론들은 무엇보다도 반 총장의 ‘외유내강형 리더십’에 주목했다. 세계 각국에서 반 총장이 ‘조용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반 총장을 가리켜 ‘친화력이 뛰어난 인물’,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는 스타일’이라고 추켜세웠는가 하면, 더 나아가 점잖고 겸손한 태도는 유엔총장이 지녀야 할 ‘의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전직 유엔 직원이자 <액트 오브 크리에이션>의 저자인 스티븐 C. 슐레징어는 “대화 기술이나 카리스마가 부족하더라도 유엔에서는 훌륭한 업적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으며, 저명한 국제관계 분석가이자 하버드대 교수인 조셉 나이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유엔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반 총장은 잘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의 정치평론가인 제임스 트라우브는 “외교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자세는 사려 깊은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이런 태도는 자칫 국제사회에서 유엔의 입지가 좁아지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반 총장이 ‘조용한 리더십’으로 이뤄낸 성과로는 유엔 조직의 개혁, 여성과 아동의 인권 성장 등이 꼽히고 있다. 비제이 남비아르 유엔 사무총장 비서실장은 “반 총장은 이 문제들에 있어서 매우 통찰력 있는 리더십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코피 아난 전 총장 시절 유엔 직원들의 부패 문제로 실추됐던 유엔의 명예가 반 총장의 노력으로 상당히 회복됐다고 평가했으며, <유엔디스패치>는 지난 2011년 반 총장의 재임을 앞둔 시점에서 ‘반기문이 유엔사무총장에 재임되어야 하는 이유’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반기문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라고 평가했다.
특히 <유엔디스패치>는 반 총장이 유엔의 수장을 맡은 후로 성불균형 문제가 해소됐다는 점을 가장 큰 공으로 꼽았다. 실제 반 총장의 지휘 아래 여성 차별 철폐와 양성평등 실현을 위한 ‘유엔여성기구’가 설립됐으며, 덕분에 유엔 기구 내 전체 여성 직원들 수는 40%가량 크게 늘어났다. 유엔 고위직의 여성 수 역시 반 총장이 취임한 후 17명에서 45명으로 증가했다.
영국의 BBC는 반 총장이 외교관들 사이에서 근면성실하고 진지한 지도자로서 명망을 얻고 있으며, 합의와 조화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유엔 옵서버들(미가맹국들)이 반 총장이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반 총장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상임이사국들을 자극하지 않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카슨-뉴먼대학의 J. 랜달 오브라이언 총장의 경우에는 지난 여름 <허핑턴포스트>에 게재한 논설을 통해 반 총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반 총장은 선량하고 겸손하며 품위 있는 사람”이라며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을 근절했다는 데 있다. 반 총장이 벌인 성폭행 근절 캠페인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희망을 찾았다. 정말 감사하다”라고 호의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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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6일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한 반기문 총장.
하지만 반 총장의 이런 외유내강형 리더십이 모두에게 환영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강한 리더십에 익숙한 서구 문화권에서는 반 총장의 이런 스타일이 낯설게 느껴지거나 혹은 더 나아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자칫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비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반 총장은 쓰러져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숲 속의 나무와 같다”라거나 “무슨 일을 하든지 반 총장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라는 비난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009년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과 NBC가 공동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역시 이를 방증한다. 당시 조사에서 미국인들의 81%는 ‘반 총장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라거나 혹은 심지어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응답했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편집장인 조너선 테퍼맨이 2013년 9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반기문,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칼럼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테퍼맨은 가장 먼저 시리아 사태 발생 당시 뉴욕에서 유엔총회가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유엔의 수장인 반 총장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반 총장이 세계 최고의 지위에 올라 있으면서도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고 혹평했다. 심지어 반 총장이 유엔 내·외부에서 ‘역대 8명의 유엔 사무총장 가운데 최악’이라고 평가 받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특히 시리아 내전과 같이 대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면서 너무 소극적이라고 비난했다.
테퍼맨은 또한 반 총장이 소통에 서투른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소집단 내에서는 점잖고 근면하고 매력적인 성품을 지녔다는 평을 듣고 있지만 사실은 영어도 서툴고 연설문에 의존해서 연설을 하는 등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일부 유엔 직원들 사이에서도 이런 점 때문에 불만의 목소리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반 총장이 원고 없이는 말을 잘 못하고 중동 문제를 포함해서 일부 의제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치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런 비난을 의식해 반 총장은 그동안 말보다는 행동을 보이는 ‘실천가’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이런 점에서도 반 총장은 실패했다고 테퍼맨은 평가했다. 그러면서 가장 큰 예로 기후변화 회의 조정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점을 꼬집었다. 또한 반 총장의 ‘펫 프로젝트’였던 유엔 내부 개혁 역시 어떤 면에서는 혁신을 거뒀지만 유엔감시기구가 폐지되는 등 사실상 실패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런가 하면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2009년 ‘어디에도 없는 남자’라는 기사를 통해 반 총장이 ‘유엔사무총장으로서 형편없다’고 악평했다. 보수 성향의 논객인 제이콥 헤일브룬은 “반 총장이 2년 6개월 동안 특별하게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면서도 “하지만 기후변화, 국제 테러리즘,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국제 현안에 대처하는 리더십이 절실한 시점에서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명예학위를 수집하러 다니느라 분주했으며,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연설을 하느라 바빴다”라고 비난했다.
또한 헤일브룬은 “그는 너무 조용하다. 정말 존재하긴 하는 걸까?”라고 비꼬면서 “반 총장이 유엔을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고 혹평했다. 하지만 헤일브룬의 이런 주장에 대해 <아메리칸 프로스펙트>의 마크 리언 골드버그는 “진지한 분석 없이 근거 없는 우월감으로 쓰인 글이다”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과 <워싱턴포스트> 역시 부정적 평가를 내린 바 있다. 당시 반 총장을 가리켜 ‘유엔의 투명인간’이라고 평했던 <월스트리트저널>은 “그가 거둔 성과는 미미했다”고 촌평했다. 이에 대해 반 총장은 “나는 ‘보이지 않는 남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대중의 인식을 깨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나는 결과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이지 수사에 능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해명한 바 있다.
<워싱턴포스트> 역시 ‘너무 조용한 스타일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자신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저자세 외교’ 스타일 때문에 반 총장이 중요한 외교 문제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러시아가 그루지야를 침공했을 때 각국의 정상들에게 전화를 걸어 유엔의 해결 노력을 강조했던 반 총장은 정작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대통령과는 일주일 넘게 통화를 하지 못했다. 반 총장이 코소보 독립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일부러 반 총장과의 통화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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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티대학의 정치학 교수인 토마스 와이스는 더욱 신랄하게 반 총장을 비판했다. 그는 반 총장을 전임자들과 비교평가해 달라는 요청에 노르웨이 출신의 제1대 총장인 트리그브 리와 오스트리아 출신의 제4대 총장 쿠르트 발트하임과 함께 최하위로 꼽았다. 또한 와이스 교수는 반 총장과 코피 아난 전 총장을 비교하면서 “아난은 카리스마가 넘쳤고, 언론에 잘 대응했으며, 부시 정부에 대항하면서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인기가 많았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반 총장 측은 나름의 ‘조용한 외교’로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세계 정상들과 공개 면담을 하지 않는 이유는 TV 카메라 앞에서 그들을 난처하게 하거나 위협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해명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에서 조용한 개별 면담을 선호한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쏟아지고 있는 불만과 비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역시 반 총장 자신이다. 이미 취임 전부터 이 점을 우려하고 있었던 듯 지난 2006년 10월 취임 연설에서 반 총장은 “동양에서는 겸손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겸손은 태도와 관련된 것이지 비전이나 목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며 자신의 스타일에 양해를 구했다.
일본 출신인 기요 아카사카 유엔 공보담당 사무차장 역시 반 총장의 편을 들고 나섰다. 반 총장에 대한 오해가 “동서양의 문화적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명한 그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동양인들은 유교적 가르침에 따라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동양인들의 눈에는 반 총장의 태도가 현명하게 비치고 있다. 동양의 현인들은 서방의 지도자들처럼 강력하게 자기주장을 펼치지 않는다”며 반 총장을 두둔했다.
모든 오해와 불만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고 했다. 과연 반 총장의 지도력에 대한 평가가 단순히 동서양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 반 총장의 지도력의 한계인지는 그의 임기가 완전히 끝나는 2016년 다시 한 번 숙고해봐야 할 듯하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