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찬품 싸게 줄게” 스타 팔아 낚시질
지난 7일 경찰 관계자는 혀를 끌끌 차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피해자들의 상황이 안타깝다. 연예인 협찬 제품이라고 하니까 무조건 믿고 확인을 제대로 안 한 것 같다”며 “허황된 꿈을 꾸다가 피해를 당한 측면도 있어 아쉽다. 너무 쉽게 믿었다”고 전했다. 경찰이 현재까지 확인한 피해자는 12명, 금액은 무려 27억 원이다. 경찰 관계자는 “들어와 보면 피해자가 와 있고, 들어와보면 또 와있다. 피해자가 점점 늘고 있고 피해금액도 불어나고 있다”고 보탰다.
피의자 이 씨는 ‘연예인 협찬물’의 빈틈을 노렸다. 경찰에 따르면 이 씨는 소녀시대의 ‘정식’ 스타일리스트는 아니었다. 지인들 사이에서는 소녀시대의 스타일리스트로 통했지만 그녀는 스타일리스트들 밑에서 심부름을 도맡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 씨는 소녀시대를 비롯해 연예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려 친분을 과시했다.
이 씨는 특히 지난 2013년부터 중·고교 동창이나 지인들에게 “기업마다 홍보를 위해 유명 연예인들에게 자사 제품을 일정기간 사용토록 제공하는데, 만약 연예인이 그걸 분실할 경우 실제 가격보다 아주 적은 금액만 배상하면 된다”며 “이를 이용해 ‘잃어버렸다’고 하고 물건을 싸게 구해주거나 판촉용 제품을 염가에 사줄 수 있다”고 떠벌렸다.
초기 표적은 ‘절친’들이었다. 이 씨는 항상 유리, 서현 등 멤버들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소녀시대 멤버들이 차고 있는 몇 백만 원짜리 명품 시계를 싸게 구입할 수 있다”고 친구들을 꼬드겼다. 정가보다 싸다는 소문이 돌자 이 씨의 물건을 수소문하는 이들이 점점 늘었다.
이 씨는 심지어 자신이 청담동에서 연예인 협찬 관련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며 연예인들의 옷과 가방을 정가보다 훨씬 싸게 구매할 수 있다고 홍보했다. 점점 대담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그런 회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판매용 제품이 다양해지면서 이 씨의 계좌로 차곡차곡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씨는 그들에게 패션 소품은 물론 연예인이 협찬한 승용차와 아파트까지 저가로 구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피해자들은 이 씨가 1억 원 상당의 승용차를 2000만 원에, 3억 원의 주택을 5000만 원에 사주겠다며 돈을 받아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50대 부부를 포함한 가족 전체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 친구들이 이 씨를 ‘소녀시대 스타일리스트’로 철석같이 믿고 이 씨의 신분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가족들까지 연결시켜준 것이다. 피해자들은 ‘싸게 준다니까 집이라도 한번 장만해주고 싶은’ 생각으로 아파트를 구입했다고 한다. 피해금액이 20억 원 이상으로 불어난 결정적인 원인이다.
이 씨는 피해자들로부터 물건 값을 받고도 물건을 건네주는 시점을 차일피일 미루기 시작했다. 경찰 관계자는 “계속 약속을 못 지켰다. 피해자들이 연락하면 이 씨는 ‘준다준다’ 하면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 했다. 하지만 자기도 감당이 안 되니까 그게 터져버렸다”고 말했다.
이 씨를 통해 승용차를 구입한 피해자는 다른 사람 명의로 할부 판매된 차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피해자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이 씨는 더욱 교묘한 수법을 사용했다. 다른 사람 명의로 4대의 휴대전화를 발급받아 ‘이 씨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물건을 받을 수 있다’는 문자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가상의 인물과 협찬 관련 메시지를 주고받은 것처럼 꾸며 보내 최대한 자신의 범죄를 감추려고도 했다.
사실 이번 사건의 근본 원인은 연예계의 허술한 ‘협찬 관행’이다. 실제로 기업들이 광고를 위해 연예인에게 제공하는 협찬 제품은 사용기간이 정해져 있다. 문제는 제품의 사용기간이 끝나도 회수가 거의 불가능하고 기업들이 이러한 ‘연예인 협찬물’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더구나 소녀시대 같은 톱스타의 옷과 액세서리는 스타일리스트들을 ‘통’해야만 한다. 한 쇼핑몰 운영자는 “보통 스타일리스트들이 먼저 협찬 요구를 한다. 많이 가져가는데도 회수가 안 되는 경우가 많아 속상하다”며 “설사 회수가 되더라도 때가 타있고 난리가 난 상태다. 심지어 그 옷을 입었다는 연예인 사진도 없는 경우가 있다. 누가 방송에서 입었다는 증거도 없다. 그런 고약한 스타일리스트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 협찬 업무에 종사했다는 기업 관계자도 “사실 협찬은 눈먼 돈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회수를 거의 못한다. 회수하겠다고 전화하면 다음 영화 또 들어간다고 한다”고 토로했다. 그는 또 “연예인 측이 물건을 손상했다고 하면 확인도 못 하고 줘버린다. 그게 파손된 건지 자기가 팔아서 쓰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며 “한번은 스타에게 물건을 협찬해줬는데 매니저가 쓰는 경우도 있었다”고 보탰다. 연예인 협찬물에 대한 업계 관행 덕에 이 씨의 대담한 사기행각이 가능했던 셈이다.
피해액이 점점 늘자 결국 피해자 9명은 이 씨를 사기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이어 3명이 추가로 고소하며 피해자는 12명으로 늘었다. 추가 피해도 속속 확인되고 있다, 지난 3일, 서울 수서경찰서는 이 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 씨는 자기 잘못은 인정하고 있다. 다만 피해자들이 피해 금액을 부풀렸다고 주장하며 억울해 하고 있다”며 “어떻든 이 씨는 피해자들을 만나 사건을 해결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