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력 뛰어나도 체력 부실하면 꽝
▲ 종영한 SBS 드라마 <온에어>에서 방송작가로 출연했던 송윤아의 모습. 최근 한 방송작가의 자살로 작가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과중한 업무가 도마 위에 올랐다. | ||
“막내작가 시절을 거치면서 화장실에서 세 번 안 울어 본 사람은 방송 작가가 아니다.”
방송작가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나도는 말로 그만큼 힘겨운 일이 많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개 대학교 교수나 선배들의 추천, 혹은 방송아카데미를 수료한 뒤 방송작가의 길에 입문하게 되는데 그렇게 시작한 처음 1년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1999년에 일을 시작해 올해로 경력 10년이 된 박 아무개 작가는 “내가 처음 막내작가로 출발했을 때 월급이 80만 원이었다”며 “10년이 지났어도 막내들 보수가 그대로라는 게 말이 되냐”고 말한다. 방송작가는 막내, 서브, 메인 순으로 나뉘는데 현재 공중파나 케이블 방송에서 일하고 있는 막내작가들은 보통 80만 원에서 많으면 10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고 있다. 심지어 열악한 몇몇 외주제작사에선 석 달 동안 60만~80만 원을 주는 곳도 있다고 한다. 방송작가는 프로그램마다 계약을 맺어 근무하는 터라 ‘편당 보수’를 주급이나 월급으로 지급받는데 막내작가는 경력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적은 금액을 월급제로 받게 된다. 그마저도 계약서 없이 구두계약으로 채용되고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 프리랜서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작가 월급지급은 보통 조연출이 맡하는데 조연출이 출장이라도 가는 날엔 결재가 미뤄져 제때 돈을 받지 못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경력 7년인 신 아무개 작가는 “제때 입금되지 않는 일이 잦아 마이너스 통장이나 신용카드를 쓰기도 하는데 거기에도 어려움이 뒤따른다”며 “정규직이 아닌 프리랜서라 마이너스 통장이나 신용카드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하소연한다.
방송작가들은 어떤 일을 할까. 아이템 구상, 출연자 섭외, 자료 검색, 장소 섭외, 화면 자막 작성, 대본 작성 등 프로그램 제작 전반을 방송작가들이 책임지는데 메인작가가 아이템을 확정해 전체적인 구성을 짜면 서브작가가 자료를 찾고 출연자와 장소를 섭외한다. 또한 메인작가가 방송 대본을 쓰고 서브작가가 자막을 담당한다. 서브작가를 도와 섭외 전화를 돌리고 대본을 프린팅해 출연자에게 전달하는 등의 보조 업무는 막내작가의 몫.
막내작가에게 가장 힘든 일은 프리뷰다. 프리뷰란 촬영 팀이 촬영한 테이프 전 분량을 보면서 출연자의 말을 모두 받아 적는 일이다. 시청자가 보는 방송분이 촬영분을 편집한 요약본임을 감안할 때 촬영 분량 전부를 일일이 보고 받아 적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례로 SBS <긴급출동 SOS 24>의 경우 한 회 촬영 분량이 두 시간짜리 테이프 100개가 넘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처음 일을 시작한 막내작가들이 30분 촬영 분량을 프리뷰하는 데 한 시간가량 걸린다고 하는데 아무리 익숙한 막내작가일지라도 2시간짜리 테이프 100개를 프리뷰하는 데 소요될 시간은 어마어마하다.
작가계의 ‘아오지 탄광’으로 불리는 프로그램들도 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긴급출동 SOS 24>와 KBS <무한지대 큐>다. 물론 이유는 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교양 프로그램을 주로 담당해온 9년차 김 아무개 작가는 “<무한지대 큐> 등 옴니버스 프로그램의 경우 방송되는 섭외장소만 해도 4~5군데이기 때문에 편집된 장소까지 감안하면 매회 10여 곳의 장소를 섭외하고 자료도 모아야 한다”며 “<긴급출동 SOS 24>도 제보가 있다 해도 섭외 자체가 어려운 프로그램인데다 방송 수위 조절도 만만치 않아 경력에 관계없이 작가들이 힘겨워하는 프로그램”이라고 말한다.
▲ ‘작가계의 아오지’라 불리는 방송 중 하나인 <긴급출동 SOS 24>. 작가들은 섭외와 방송 수위 조절에 어려움을 토로한다. | ||
이런 까닭에 일을 그만두는 사람도 많다. 김 작가는 “워낙 그만두는 사람이 많아 면접 보는 자리에서 곧장 ‘오늘부터 일하자’고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날부터 잠과 밥을 제때 챙길 수 없어 하루 만에 포기하는 사람이 많고 첫 날을 잘 넘겨도 일주일이 고비다”며 “막내 시절 1년만 잘 버티면 점점 나아지는데 그 1년을 버티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고 말한다.
이렇듯 워낙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다보니 위장병은 방송작가들의 고질병이다. 박 작가는 “위장병뿐 아니라 계속 TV화면을 보며 프리뷰를 하고 컴퓨터로 자료조사를 해야 하니 안구 건조증에 걸린 작가도 많다”며 “또 일이 힘들어 초기에는 살이 쫙 빠지다가 6개월쯤 지나면 오히려 배가 나오기 시작한다”고 작가들의 실생활을 설명했다.
하지만 일보다 힘든 건 바로 사람과의 관계다. 그중에서도 작가와 가장 많이 부딪치는 PD는 작가들의 ‘공공의 적’이라고.
신 작가는 “PD 몫, 작가 몫의 일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지 않아 서로의 일이라고 미루는 일이 많다”며 “아이템 선정, 섭외 확인, 프로그램 짜는 것까지 모두 작가 일이라 생각하는 PD가 대부분이라 방송 끝나면 퇴근하는 PD가 많은데 작가는 회사에 남아 다음 방송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 작가 역시 “편집 때도 작가가 함께 상의해야 하는 때가 많고, 아예 작가가 옆에 붙어 앉아서 ‘이 그림과 저 그림을 이렇게 붙여 영상을 만들라’고 컨트롤해줘야 하는 PD들도 있다”며 “작가의 적은 아이러니하게도 함께 일하는 PD”라고 설명한다.
또한 방송작가를 시작하며 품었던 낭만이 허물어지는 것도 감수성이 예민한 작가들로서는 견디기 힘든 슬럼프다. 경력 3년차인 유 아무개 작가는 “학창시절 글 잘 쓰던 사람들이 대부분 방송작가를 하는데 막내작가를 하는 동안 보고 배우는 것도 있지만 하는 일이 섭외나 프리뷰라 제 실력을 발휘할 곳을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이들이 많다”며 “유명 프로그램, 하고 싶은 프로그램에 대한 낭만이 깨지는 것도 우울증의 한 원인”이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괴로움이 방송작가 일을 계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유 작가는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나를 지탱하게 만들었다”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것 아니면 할 게 없단 생각만으로 달려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작가는 “‘내 직업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버틸 수 있다”고 설명한다.
방송작가는 막내작가의 굴레를 벗어난 후가 진짜 시작이다. 보통 2년 경력이 쌓이면 서브작가가 되어(이 시기를 보통 ‘머리 올린다’라고 표현한다) 방송 편당 보수를 받는데 대부분 1주에 30만~50만 원 정도의 보수를 받게 된다. 여기에 공연이나 행사 기획 시나리오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생긴다. 박 작가는 “6년 이상의 경력이 되면 메인작가가 돼 4~5개의 방송을 담당, 편당 60만 원에서 70만 원의 보수를 받을 수 있다”며 “10년 이상된 작가는 아이디어를 내고, 7년차 작가가 자세한 구성만 하면 되니 사람답게 지낼 수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또한 작가들은 “사실 막내 시절을 버티기만 하면 결혼 후에도 여유롭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 방송작가다”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전문직으로 가는 길은 너무도 멀고 험난하다. 타이틀은 화려해보이지만 젊은 날을 통째로 바쳐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야 하는 방송작가들. 그들은 오늘도 단 한 편의 방송을 위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문다영 기자 dy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