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약국으로 시작 글로벌제약사 우뚝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의 연구·개발 열정이 조단위가 넘는 기술 수출 계약을 맺는 결실로 다가왔다.
지난 1940년 경기도 군포에서 출생한 임성기 회장은 고등학교까지 그곳에서 나고 자랐다. 군포의 통진고등학교와 중앙대 약학과를 졸업한 임 회장은 처음엔 약사로 사업을 시작했다. 임 회장은 약국이 즐비한 종로5가에 1967년 ‘임성기약국’을 개업했다.
약사 시절 임 회장과 관련해 두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임 회장이 약사로서 처음으로 흰 가운을 입기 시작했다고 알려진 것. 다른 하나는 당시 임성기약국이 ‘성병약국’으로 유명세를 탔다는 일화다.
임 회장이 약국을 개업할 때까지만 해도 흰 가운은 의사들의 전유물이던 시절이다. 의사의 상징인 흰 가운을 입은 약사가 환자를 맞이하는 일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흰 가운으로 임 회장은 신뢰성과 인기를 한꺼번에 얻었다. 요즘은 흰 가운을 입지 않은 약사가 드물 정도로 임 회장의 파격은 세월이 흘러 일반화됐다.
자신의 이름을 따 약국 이름을 지은 것도 임 회장이 행한 파격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960년대 말에는 보통 약사 자신의 이름을 앞세워 약국명을 짓지 않았다는 것이 그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회고다. 공교롭게도 임성기약국은 당시 ‘성병약국’으로 유명했다. 임 회장은 베트남전쟁 참전 이후 우리나라에 매독 등 성병이 번졌던 당시 “내가 꺼릴 게 뭐 있느냐”며 성병 환자들을 적극적으로 치료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약국을 운영하며 벌어들인 돈을 자본금 삼아 임 회장은 1973년 ‘임성기제약’을 설립했다. 그 해 사명을 한미약품공업으로 변경했고 2003년 다시 한미약품으로 사명을 변경해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한미약품은 지주회사인 한미사이언스를 중심으로 한미약품, 제약 원료 공급·수출 사업을 하는 한미정밀화학, 향후 사물인터넷과 연결시키기 위한 의료시스템 사업을 하는 한미IT, 의료기기사업과 전두유사업 등을 영위하는 한미메디케어 등 관계사를 거느리고 있다.
한미약품 연구센터.
임 회장의 자녀 2남 1녀가 모두 회사 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임 회장의 장남은 임종윤 한미사이언스 대표(43)이며 차남은 임종훈 한미메디케어 대표(38)다. 임 회장의 딸은 임주헌 한미약품 전무(41)다. 보스턴칼리지를 졸업한 장남 임종윤 대표는 북경한미약품유한공사 동사장을 거쳐 2010년 한미사이언스 대표로 취임했다. 차남 임종훈 대표는 미국 벤틀리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한미약품 상무를 거쳐 한미메디케어를 맡고 있다. 장녀 임주헌 전무는 보스턴대 음악과를 졸업했다. 임 회장의 부인 사진작가 송영숙 씨는 한미약품이 운영하는 가현문화재단 이사장·한미사진미술관장을 맡고 있다. 한미사진미술관은 서울 송파구 한미타워 19, 20층에 마련돼 있다.
1973년부터 시작한 한미약품은 국내 제약업계에서 역사가 길지 않은 제약사로 분류된다. 그렇지만 성장 속도는 국내 어느 제약사보다 빠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글로벌 제약사들과 잇달아 계약에 성공한 것만 봐도 한미약품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 가능케 한다.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음에도 한미약품이 초창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로 ‘영업력’이 꼽힌다. 제약업계에서 한미약품의 영업력은 유명하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기존 제약사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는 구도에서 신생 제약사가 영업을 통해 판로를 크게 확장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미약품의 영업력이 어땠는지 알 수 있지 않느냐”면서 “의약품 원가가 생각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리베이트는 물론 할 수 있는 한 모든 영업방식을 다 동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약품 초창기에는 의약품 리베이트가 관행처럼 횡행하던 시절이다. 제약업계 일각에서 ‘한미약품 때문에 영업 못해 먹겠다’는 얘기가 흘러나왔을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법 리베이트와 관련해 여러 번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한미약품이 몇 단계 더 크게 도약했던 시기는 2000년대 이후다. 2000년은 의약분업이 실시되기 시작한 해다. 의약분업이 실시되자 특정 브랜드나 이름을 가진 약품보다 처방약이 중요해졌다. R&D에 꾸준히 투자해온 한미약품이 개량신약(오리지널 약품의 단점을 보완한 신약) 부문과 퍼스트 제네릭(가장 먼저 만든 복제약) 부문에서 다른 제약사보다 강점을 보였고 처방약으로도 많이 쓰였다.
의약분업이 실시되자 임성기 회장은 기존 제약사들의 약국 중심의 영업과 마케팅에서 탈피해 병·의원에 대한 영업을 강화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미약품에는 ‘처방전 시장 부동의 1위’라는 수식어가 따르고 있다. 의약분업 실시가 한미약품으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된 셈이다. 임성기 회장은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 이사장을 거쳐 2000년 당시 한국제약협회 회장을 맡고 있기도 했다.
임성기 회장은 제약업에 뛰어든 지 40년여 만에 큰 결실을 보고 있다. 제약업계와 한미약품의 향후 전망을 들여다보고 있는 증권사 연구원들 중에는 한미약품의 최근의 성과가 “시작에 불과하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미성년 친·외손주 7명에 대한 대규모 주식 증여 논란은 임 회장의 R&D에 대한 열정에 흠집이 되고 있다. 미성년 손주에 대한 대규모 주식 증여와 관련해 한미약품 관계자는 “개인적인 일이기에 달리 할 말 없다”고 답변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