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C ‘연타석 홈런’…야구 변방서 중심으로
2009년 3월 9일 도쿄돔에서 열린 WBC 아시아라운드 1-2위 결정전에서 한국 선수들이 일본을 꺾은 뒤 환호하고 있다. 왼쪽은 당시 대표팀의 중심타자로 나서 해결사 역할을 한 김태균. 연합뉴스
#올림픽
야구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1904년부터 비경쟁 종목에 포함되긴 했지만, 대부분 야구가 도입된 극소수 국가끼리의 친선 경기 형식에 불과했다. 본격적으로 두 개의 디비전을 나눠 첫 우승팀을 배출한 대회는 그 후로 80년이 흐른 1984년 LA 올림픽이었다. 초대 우승팀은 바로 일본.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미국이 우승했다. 이 두 대회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야구도 1992년 대회부터 정식으로 금·은·동메달리스트를 배출하는 종목으로 발돋움했다.
경기 시간이 평균 3시간 안팎인 야구의 특성상, 올림픽 본선에는 8개 국가만 참가할 수 있게 돼 있다. 본선에서는 라운드 로빈 형식으로 각 팀이 나머지 7개 팀과 모두 한 번씩 경기를 치른다. 그 가운데 4강을 가려내 1위와 4위, 2위와 3위 팀이 각각 준결승전에서 맞붙게 된다. 초기에는 선수들이 알루미늄 배트를 들고 경기에 나섰지만, 프로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가 허용된 2000년 시드니 대회부터는 알루미늄 배트 사용이 금지됐다.
한국은 1992년 대회에 불참했지만,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 처음으로 선수단을 파견했다. 당시에는 아마추어 선수들로만 대표팀이 구성됐다. 김선우, 손민한, 문동환, 임선동, 진갑용, 조인성, 이병규처럼 훗날 프로에서 내로라하는 성적을 거둔 선수들의 이름도 여럿 들어 있었다. 이 대표팀은 첫 올림픽에서 8위라는 성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마추어 최강 쿠바가 바르셀로나 대회에 이어 2연패를 했고, 일본이 은메달, 미국이 동메달을 가져갔다.
이 아픔은 프로 정예 멤버들이 처음 참가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씻었다. 한국 야구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수확했다. 23명의 선수단 가운데 아마 선수는 동국대 박한이와 경희대 정대현뿐이었다. 한국은 준결승전에서 정대현의 호투를 앞세워 접전을 펼쳤지만, 2-3으로 아쉽게 패했다. 대신 동메달 결정전에서 만난 일본을 상대로 이승엽이 결승 2타점 2루타를 때려내고 구대성이 완투승을 거두면서 동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왔다. 그러나 4년 뒤에는 아테네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일본과 대만에 일격을 당하면서 3위로 밀려 최종 예선에도 진출하지 못한 탓이다.
2004년의 아쉬움은 2008년 베이징에서 ‘완벽한 금메달’로 승화됐다. 류현진, 김광현, 김현수와 같은 프로 2~3년차 선수들이 대표팀의 주축을 이루면서 세대교체의 기틀을 잡기 시작한 시기였다. 동메달을 목표로 베이징에 간 대표팀은 예선 7경기를 다 이기는 파란을 일으켰다. 준결승에서는 일본을 만나 이승엽의 결승 2점포와 김광현의 8이닝 2실점 역투를 앞세워 역전승했다. 결승에서도 ‘디펜딩 챔피언’ 쿠바를 상대로 3-2로 앞선 9회말 1사 만루서 정대현이 유격수 병살타를 이끌어내 감격적인 전승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야구는 한국의 금메달을 마지막으로 올림픽에서 사라졌다. 2005년 7월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야구와 소프트볼 경기를 2012년 런던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특정 종목이 한 번 올림픽에 편입됐다가 다시 빠진 것은 1932년의 폴로 이후 70년 만에 처음 벌어진 일. 가장 큰 원인은 IOC가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올림픽 기간 동안 리그를 중단하지 않고 빅리거들의 올림픽 참가에 협조하지 않는 데 대해 불만을 느껴서였다. ‘각 종목 최고 기량의 선수들이 출전해 세계 최강자를 가린다’는 올림픽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야구가 극히 일부 국가만의 관심을 받는 종목이고, 경기시간이 게임 상황에 따라 너무 달라져 일정을 편성하기 어렵다는 점도 제외 이유로 꼽혔다.
야구 국가대표팀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왼쪽)과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한 뒤 기뻐하는 모습. 연합뉴스
#아시안게임
야구는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시범 종목으로 처음 도입됐다. 한국, 일본, 대만, 중국까지 4개국이 참가했고, 중국(3전 전패)을 제외한 나머지 세 나라가 서로 물고 물리면서 2승 1패로 동률을 이루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이후 4년 뒤 1994년 히로시마 대회에서 마침내 야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이 대회에 첫 출전한 한국 대표팀은 연세대 문동환과 고려대 조성민을 비롯한 대학 에이스들을 총출동시켜 예선부터 준결승까지 무실점 행진을 펼치는 기세를 뽐냈다. 그러나 결승에서 일본에 5-6으로 져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부터는 처음으로 프로 선수들이 참가했다. 이른바 한국 야구의 국가대표 ‘드림팀 1기’다. 프로 10명과 아마 10명, 그리고 해외파인 박찬호와 서재응으로 구성됐다. 아마 선수들 가운데엔 성균관대 김병현이 포함돼 있었다. 게다가 선수단 전원이 군 미필자. 목표의식도 확실했다. 결승에서 일본에 13-1로 7회 콜드게임승을 거두고 6전 전승으로 가볍게 금메달을 땄다.
다만 아시안게임에서의 한일전은 ‘라이벌전’의 의미가 없다. 일본은 프로 선수들을 아시안게임에 내보내지 않는다. 사회인리그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다. 한 야구 관계자는 “일본은 이미 야구로는 아시아 최강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미국이 출전하지 않는 아시아 대회를 위해 자국 정규리그를 중단하면서까지 최고의 선수들을 파견하는 희생은 감수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또 일본은 한국과 달리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한국 프로 선수들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면 군 대체 복무라는 최고의 혜택(올림픽은 금·은·동 모두 해당)을 받게 되지만, 일본 선수들은 얻을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다.
2002년 부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도 한국은 해외파 선수들 없이 이승엽, 송진우, 이상훈 등 국내 스타플레이어들의 활약만으로도 6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땄다. 마이너리그 선수들을 불러 모은 대만과 프로 1.5군 선수들을 일부 내보낸 일본을 모두 꺾었다. 그러나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은 한국 야구 역사에 ‘참사’라는 단어를 남겼다. 아시안게임 태극마크를 병역 혜택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던 안일함에 경종을 울린 대회였다. 군 미필자 위주의 국내파 선수들로만 팀을 꾸렸다가 해외파가 총출동한 대만에 일격을 당해 금메달을 날렸다. 게다가 프로 선수가 단 한 명도 출전하지 않은 일본에게 류현진과 오승환을 모두 내고도 졌다.
이후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대한 경각심이 재정비됐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는 메이저리거 추신수와 일본에서 뛰던 김태균이 합류했다. 그해 타격 7관왕 이대호,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류현진도 모두 참가했다. 한국은 5경기를 모두 5점차 이상(콜드게임 2경기 포함)으로 여유 있게 끝내면서 다시 금메달로 명예 회복을 했다. 4년 뒤 안방에서 열린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도 3승으로 준결승에 진출한 뒤 중국과 대만을 차례로 꺾고 다시 왕좌에 올랐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orld Baseball Classic, WBC)은 2006년 처음으로 열렸다. 토너먼트 형식으로 펼쳐지는 국가 대항전이다. 현역 메이저리거들을 포함해 유일하게 전 국가의 프로 리그 선수들이 참가하는 국제 대회라 세계적으로 위상이 가장 높다. 야구의 저변을 넓히자는 취지에서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주도로 출범했다. 2011년을 마지막으로 야구 월드컵이 폐지된 후에는 야구 종목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역할을 넘겨받았다. 2013년 3회 대회부터 우승팀에게 ‘IBAF 챔피언십’이라는 타이틀이 주어진 이유다. 당초 올림픽과 월드컵이 열리는 해를 피해 2005년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준비 과정이 늦어지면서 2006년 3월에 닻을 올렸다. 이후 2회와 3회 대회는 다시 원래 계획대로 2009년과 2013년에 개최됐다.
WBC 경기 방식은 여러 모로 다른 대회와 많이 다르다. 1회 대회 때는 대부분의 대회처럼 1·2라운드 예선을 풀 리그 방식으로 치르고 준결승부터 토너먼트 형식의 단판승부를 했다. 그런데 2009년 2회 대회부터는 예선부터 ‘더블 엘리미네이션(Double Elimination)’ 토너먼트 형식을 도입했다. 일단 1라운드 첫 경기에서 이긴 팀은 다른 경기 승자와, 진 팀은 다른 경기 패자와 각각 맞붙는다. 2승을 먼저 한 팀은 조 1·2위 결정전에 자동으로 진출하고, 2패를 한 팀은 탈락한다. 1승1패를 한 두 팀은 다시 한 경기를 더 치른다. 이 경기에서 이긴 팀이 조 1·2위 결정전에서 먼저 2승했던 팀과 만난다. 2라운드도 같은 방식으로 치러진다. 이 때문에 한국과 일본은 2009년 대회에서 다섯 번이나 맞붙는 난감한 상황에 놓여야 했다. 결국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다른 나라들의 항의를 받아들여 3회 대회에서 1라운드를 리그전 방식으로 바꾸기도 했다.
또 투수들의 경기별 투구수를 1라운드 최대 65개, 2라운드 80개, 4강 이후 95개로 엄격하게 제한한다. 한 경기에서 50개 이상 던진 투수는 4일을 반드시 쉬어야 하고, 30~50개를 던진 투수는 무조건 하루 이상의 휴식해야 하며, 이틀 연속 등판한 투수는 무조건 다음 경기에서 벤치를 지켜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
한국은 2006년 첫 대회에서 쟁쟁한 메이저리거들을 차례로 꺾으면서 4강에 진출하는 신화를 썼다. 해외파인 박찬호, 서재응, 최희섭, 김병현, 이승엽이 총출동하고 구대성, 이종범, 오승환, 김태균, 박진만 등 스타플레이어들이 총출동해 역대 가장 호화로운 대표팀을 꾸렸다. 준결승에서 일본을 만나 아쉽게 패했지만, 늘 일본의 그림자에 가렸던 한국 야구의 위력에 세계가 놀랐다. 2009년에는 4강을 넘어 준우승까지 차지하면서 더 막강한 위력을 뽐냈다. 그러나 2013년 열린 3회 대회에서는 처음으로 1라운드 아시아 예선에서 탈락하는 아쉬움을 맛봤다. 1회와 2회 대회 우승국인 일본은 준결승에서 푸에르토리코에 졌고, 도미니카공화국이 사상 첫 전승 우승을 차지했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프리미어12 엉터리 운영 논란 일본의 갑질을 실력으로 눌렀다 세계야구소프트볼 연맹(World Baseball Softball Confederation, WBSC)은 국제야구연맹과 국제 소프트볼 연맹을 통합해 2013년 출범한 단체다. 그리고 ‘2015 프리미어 12’는 WBSC가 주관해 신설된 국제 야구대회다. 2011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된 야구 월드컵 대신 시작돼 올해 첫 대회를 마쳤다. 야구 세계랭킹 상위 12개국이 출전하는 대회라 이름에 ‘12’라는 숫자가 붙는다. 프로 선수들이 출전하는 WBC와 마찬가지로 4년마다 한 번씩 열릴 예정이다. 프리미어12에서 맹활약한 투수 차우찬.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사실 이 대회가 시작된 목적은 아주 분명하다. 2020년 도쿄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야구와 소프트볼을 다시 정식종목으로 편입시키려면 세계적으로 야구 열기를 더 고조시켜야 한다는 의도에서 만든 국가 대항전이다. 일본은 야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인 나라다. 야구 없는 올림픽을 치를 수 없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따라서 이 대회를 위해 WBSC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다. 야구가 올림픽 종목으로 복귀하면, 이 대회를 올림픽 예선을 겸한 대회로 치르겠다는 복안도 마련해놨다. 한국도 올림픽에서 다시 야구를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국가다. 주도적으로 대회를 준비해온 일본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다. 정예 멤버로 구성된 국가대표팀을 파견해 대회의 격을 높였고, 한국인 최초의 빅리거인 박찬호가 대회 홍보대사이자 개막전 시구를 맡았다. 메이저리그 40인 로스터 차출 금지를 선언하며 준비 과정부터 훼방을 놓은 미국과는 사뭇 다르다. 그런데도 이 대회는 지나치게 일본 대표팀 위주로 운영돼 개막부터 폐막까지 끊임없이 논란을 빚었다. ‘일본의,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대회에 한국이 들러리를 섰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일단 대회 최고의 빅매치인 한일전을 개막전으로 편성하면서 굳이 이 경기 하나만 일본 삿포로에서 치르는 일정을 짰다. 심지어 개막전 하루 전인 7일 삿포로돔에서 프로축구 일정이 잡혀있던 탓에 선수들은 니혼햄 실내연습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 훈련을 해야 했다. 반면 일본은 삿포로돔을 홈구장으로 쓰는 니혼햄의 오타니 쇼헤이를 일찌감치 선발투수로 내정하고 준비시켰다. 이쯤 되면 야구 관계자들 사이에서 “애초에 일본이 오타니를 위해 일부러 삿포로를 개막전 장소로 선택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만도 하다. 게다가 한국 선수단은 삿포로에 3박 4일만 머물고 대만으로 날아간 뒤 17일 야간 경기를 마치고 다시 18일 새벽에 4강전이 열리는 일본 도쿄로 이동해 오후에 부랴부랴 도쿄돔 훈련을 소화했다.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 토로한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일본 선수들은 여유 있게 오후 비행기로 도쿄에 복귀해 도쿄돔에서 야간 훈련을 진행했다. 무엇보다 가장 황당한 것은 개막 전부터 ‘일본이 4강에 진출하면 무조건 19일에 준결승을 치른다’는 조항을 넣은 것이다. 준결승은 19일과 20일에 한 번씩 잡혀 있고 21일에 결승전이 열리는데, 일본은 조 순위와 관계없이 무조건 하루를 쉬고 결승전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은 4강전이 열리기 직전까지 전혀 몰랐던 얘기. 상황이 이러니 ‘아마추어처럼 운영되는 대회에 다음부터는 프로 선수들을 파견하지 말자’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