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만큼 공 뿌리고 욕심만큼 돈 벌겠다”
▲ 고교 시절 야구가 힘들었던 적도 도망치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고 고백한 한기주. ‘괴물 투수’의 이면엔 야구밖에 모르는 ‘범생이’의 모습이 있었다.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최고 시속 152km의 직구와 안정된 제구력 등 역대 고교 투수 최고 몸값인 10억원을 받고 기아에 입단한 한기주와의, 취재원보다 기자가 훨씬 말을 많이 했던, 진땀나는 ‘리얼토크’를 소개한다.
‘대물’ ‘괴물’ ‘특급’ 등 엄청난 수식어는 죄다 한기주 이름 앞에 붙어 있는 것 같다. 메이저리그의 강력한 유혹을 뿌리치고 기아와 입단 계약을 맺으며 몸값을 10억원으로 급등시킨 주인공이다보니 수식어들이 화려하고 엄청나기 그지없다.
기자가 이천수와 김진우를 섞어놓은 듯한 얼굴이라며 첫인상을 전했더니 영 마뜩찮은 표정이다. 그래서 ‘누굴 닮았다’는 소리가 불쾌하냐고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어렵게 연 입에선 “아니요. 저, 그 분들 안닮았는데요”라는 대답이 느릿하게 흘러나온다. 뭘 물어봐도 생각이 많아서인지, 말 주변이 없어서인지, 대답을 들으려면 약간의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인터뷰하는 게 어렵냐”고 또 물었다. 한기주 왈, “어색하진 않은데, 왜 그러세요?” 두 손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기주는 기아와 입단 계약을 맺기 전까지 진로 문제를 놓고 숱한 갈등과 고민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고 토로한다. 그것은 한기주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불붙기 시작한 스카우트 경쟁은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에이전트들의 중개인 역할을 하는 한국 관계자들이 연락을 해오고 집을 들락거리면서 고3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뉴욕 메츠, 뉴욕 양키스, 에너하임 에인절스, 미네소타 트윈스 등의 ‘러브콜’은 구체적이고 강력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어요. 미국에서의 생활이. 언어도 힘들고, 적응 부분도 그렇고, 무엇보다 병역문제가 걸림돌이 됐죠. 지금 당장 못 간다고 해서 영원히 못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잠시 보류해둔 거로 보시면 돼요.”
그래도 한기주가 정말 가기를 소원했던 곳은 메이저리그였다고 실토한다. 언젠가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했지만 지금 당장 가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족들, 주변 친척들의 반응을 무시할 수 없는, 그는 미성년자였다.
10억원이란 계약금에 대한 그의 솔직한 생각이 궁금했다. 항간에선 ‘대박’이란 표현까지 쓸 만큼 역대 최고가를 얻어낸 탓에 10억원의 액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호기심이 일었다.
“두 자릿 수 액수니까 그 정도면 적당한 거죠. 받은 만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부담은 있어요. 받은 만큼 해낼 거라고 믿기 때문에 (기아에서) 그렇게 주신 거 아니겠어요?”
한기주는 그동안 자신을 뒷바라지하느라 갖은 고생을 마다한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큰 선물’을 했다고 자랑이다. 건축업을 하는 아버지가 힘들게 일하고 들어와서 방에 누워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야구선수로서 꼭 대성하겠다고 다짐했다는 그는 “난 돈에 대한 욕심이 많다”는 솔직한 표현으로 성공에 대한 갈증을 드러냈다.
▲ ‘미디어데이’서 한껏 폼잡은 한기주. 사진제공=기아 타이거즈 | ||
“야구가 천직이었나봐요. 단 한 번도 야구가 싫은 적이 없었거든요. 운동이 힘들다고 해서 숙소 이탈을 도모하는 등의 ‘치기’도 없었구요. 특히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는 게 좋았어요. 주목받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더더욱 ‘외도’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죠.”
운동을 하다보니 교실엔 거의 들어가질 못했다. 공부를 그리 잘 하는 편도 아니었다고 한다. 중학교 때 영어와 한문 공부를 열심히 한 것 빼놓고는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학문적인 지식은 별로 존재하질 않는단다.
“못 배운 거 같아 많이 아쉽죠. 그러나 애당초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미련은 없어요. 그래도 공부 잘하는 친구 만나면 괜한 자격지심으로 열등감을 느끼게 되더라구요. 운동선수를 무식할 거라고 보는 사람들, 제일 싫어해요. 머리가 좋지 않고는 운동선수로서 성공할 수 없다는 걸 모르시는 분들이죠.”
한기주가 고교야구의 핵심 키워드로 자리하면서 기자들은 그를 ‘역대 최고 고교 투수’라고 부르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평가에 대해 그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겸손한 멘트가 나올 줄 알았는데 ‘그 정도의 칭찬은 받을 만하다’는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물론 부담은 되지만 아마에선 제가 최고였다고 자부합니다. 아마에선 더 이상 보여줄 게 없었어요. 앞으로 프로에서 어떤 모습을 선보일진 몰라도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만 한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예요.”
말주변은 없어도 할 말은 다 하는 스타일이었다. 처음엔 인터뷰하기가 싫어질 만큼 기자의 애간장을 녹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고교시절, 최고의 투수로 각광받았던 대선배이자 광주인인 선동열 삼성 감독과 자신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고 주문했다. 한기주식 대답은 이런 내용이었다.
“감독님 던진 걸 잘 못 봐서 말하기가 그래요. 아! 맞다. 아주 어렸을 때 선동열 감독님의 경기를 본 적이 있어요. 느낌요? 그냥 그랬죠. 뭐. 우상은 아니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봤는데요?”
한기주를 표현하는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괴물’이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 ‘괴물’이란 수식어에 별다른 감흥을 갖지 않았다. 단지 볼 스피드가 빠르다보니 기자들이 그렇게 붙여준 것 같다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 한기주(오른쪽)와 이영미 기자 | ||
“제가 1학년일 때 이용규 선배가 덕수정보고 간판타자였거든요. 발이 무지 빨랐어요. 어느 방향으로 공을 던져도 방망이를 휘두르는 스타일예요. 투수 입장에선 좀 겁나는 상대였죠. 당시 청룡기대회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난타전이 벌어진 끝에 결국 제가 승리했어요. 아마 때 절 가장 괴롭힌 잊을 수 없는 선배가 기아에 계신다는 게 재밌지 않아요?”
한기주는 자신의 단점에 대해 야구 전문가들이 변화구 각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부분을 상기시키며 “변화구 각도는 괜찮다. 대신 몸쪽 승부에 좀 약한 편”이라고 정정했다. 자신은 변화구 위주의 아우터라 몸쪽 공 승부가 어렵다는 것.
올 겨울부터 기아 선수단에 합류하게 될 한기주에게 기아 선수들 중 가장 군기가 셀 것 같은 선배를 꼽아달라는 농담성 질문을 했다. “글쎄요. 기아 선배님들을 아직 잘 몰라서…. 아무래도 나이 많으신 고참 선배님들이겠죠. 근데 그런 거 별로 걱정 안 해요. 전 선배님들로부터 이상하게도 귀여움을 많이 받아요.”
2학년일 때 기아 투수 김진우가 동성고에 와서 일일 코치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한기주의 눈에 비친 김진우는 ‘부러운 선배’이기 보단 진짜로 체격이 커서 ‘곰’같아 보였다는 대답에 기자는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최근 쏟아지는 매스컴의 인터뷰 요청을 받고 말 그대로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한기주는 프로 데뷔를 앞둔 소감과 각오를 묻는 기자에게 또 이렇게 한방 먹인다.
“부족한 건 채우면 되죠. 각오랄 게 뭐 따로 있나요?”
그래도 궁금했던 질문은 끝내야 했다. “혹시 <파리의 연인> 한기주(박신양 분)를 아시나요?” 진짜 한기주는 이에 대해 처음으로 눙을 쳤다. “그 한기주보다 제가 더 낫지 않나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