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한참 일하고 있는데 큰아이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엄마~ 내가 토마토 잘랐는데 엄마 줄까?”
헉. 웬일이지? 맛있는 건 몽땅 제 입에 들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여덟 살 초등학교 새내기 큰아들이 아닌가. 요즘 먹성은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다.
아이는 묘하게 귀여운 목소리와 눈망울로 다가와서 한참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토마토를 입에 쏙 넣어준다. 비싸게 주고 산 대저토마토다. 부산 명물인 요 토마토는 간을 하지 않아도 짭짤한 맛이 일품이다.
큰아이는 씨익 웃고 돌아선다. 문득 엄마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아이의 잔꾀가 떠오른다.
“아들~ 혹시 토마토 먹기 싫어서 엄마 준 건 아니지?”
“엄마~ 맞아~ 아빠가 줬는데 먹기 싫어~.”
그렇다. 평소 토마토를 싫어라 하는 아이가 선심 쓰듯 엄마 입에 넣어준 것이다. 요놈. 그래도 귀엽기 그지없다. 너무 귀엽다. 마음 아프게 귀엽다. 눈물 나게 귀여운 나의 아이.
이렇게 예쁜 아이들인데, 왜 최근에 충격적인 아동학대 소식이 끊이지 않는지 가슴이 먹먹하다. 하필 오늘 원영이가 주검으로 발견됐다는 뉴스를 접해서인지 온 종일 기분이 울적하고 축축하다.
살아있다면 큰아이와 같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나이의 원영이는, 죽기 석 달 전부터 욕실에 갇혀 학대를 당했다. 하루에 단 한 끼만 먹고. 락스와 찬물세례를 받으며 벌벌 떨다가 세상의 온기와 차단당한 채 죽임을 당했다.
아동학대 기사를 접할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가장 괴롭게 가해자를 처벌할 방법이 없는지. 카메라 앞에서 얼굴을 감춘 그들의 마스크를 확 제끼고 아이가 죽은 똑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가슴 속에서 뭉클뭉클 치솟는다.
철창은 아동학대자들에게 지나치게 사치스런 공간이 아닌가. 더군다나 원영이가 죽은 차디찬 욕실 바닥을 생각한다면 아이를 방치하고 학대한 친부와 계모에게 감옥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아기도 있다. 20대 젊은 부부는 아이를 원치 않아 아이에 대한 애정이 크지 않았다. 그랬다 한들, 그 젖먹이를 바닥에 두 차례나 떨어트리고 방치해 죽게 만든 그들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준비 안된 부모들이 얼마나 큰 참극을 만들어내는지,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만든 비극이 지옥보다 무섭고 끔찍하다.
원영이는 살 수도 있었다. 3년 전 아동학대 정황이 발견됐던 원영이는 장기보호시설에 위탁하기로 했지만, 돌연 친부의 거부로 지옥 같은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아동학대범죄 특례법이 제정돼 피해 아동을 함부로 원 가정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수도 있게 됐다. 아동보호전문기관과 법의 울타리가 더이상 죽는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제대로 관리시스템을 작동해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또 아동학대 문제에서만큼은 사회적 ‘오지랖’이 작동해야 하지 않을까. 귀찮음을 가장한 사회적 방관과 무관심도 ‘죄’라는 걸 수많은 아이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이제야 뼈저리게 알 것 같다.
“아, 냄새~ 이게 뭐야, 응가한 거야?”
남편이 6개월된 둘째 아이의 엉덩이에 코를 킁킁대며 말한다. 오늘 벌써 두 번째다. 남편이 발견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육아에 대한 스트레스 지수가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가 가늠해본다.
논리적 말이 통하지 않는 큰아이의 이유 없는 반항과, 밤잠을 자지 못하게 만드는 작은아이의 칭얼거림에 참다 못해 폭발한 적도 참 많다.
나보다 약자인 아이들 앞에서, 사회에서라면 꾹꾹 눌러 참았을 나의 ‘괴성’이 아이들을 향해 얼마나 많이 발사되었는가.
‘정신줄’ 놓지 말고 살자고 다짐해본다. 이성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상황이라도 아이들은 가장 보호받아야 할 존재, 사랑받아야 할 존재라는 걸 가슴 깊이 깊이 새겨본다.
따뜻한 엄마의 품을 느끼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원영이와 많은 아이들이 온 우주에서 가장 포근한 곳에서 뛰어놀고 있으리라, 꼭 그렇게 해주십사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김수현 기자 penpop@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