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의 아들은 어떤 바람 일으킬까’
한국 프로야구 역사가 30년을 넘어서면서 점점 새로운 역사를 써가는 ‘야구 가족’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고, ‘프로야구 키즈’로 함께 자란 형과 동생이 차례로 프로 유니폼을 입는다. 그들의 가족뿐만 아니라 야구팬들에게도 흐뭇한 미소를 안기는 장면이다.
이종범 해설위원(왼쪽) 아들 이정후가 최근 넥센에 1차 지명 신인으로 입단, KBO 사상 최초 ‘부자 1차 지명’이라는 이색 기록을 남겼다.
# 아버지와 아들
‘바람의 아들’을 추억하는 팬들은 곧 그라운드에서 뛰게 될 또 다른 선수의 성장을 지켜볼 기대에 부풀어 있다. 이종범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의 아들인 휘문고 내야수 이정후가 넥센에 2017년 1차 지명 신인으로 입단했기 때문이다. 이 위원도 1993년 KIA의 전신 해태에 1차 지명돼 화려하게 프로에 데뷔했다. KBO리그 사상 최초로 부자가 모두 프로팀의 1차 지명을 받은 이색 기록을 남기게 됐다.
게다가 아들 이정후는 유격수다. 이 위원이 전성기를 보낸 바로 그 포지션이다. 역대 한 시즌 최다 도루(84개)를 기록한 아버지 못지않게 발이 빠르고, 야구 센스와 배트 스피드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왼손 타자에 키가 큰 편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비슷하다. 벌써부터 아버지의 별명을 응용한 ‘바람의 손자’라는 애칭을 얻었다.
KBO리그 최초의 부자 프로야구 선수는 윤동균과 윤준호 부자였다. 이해창과 이준, 김호인과 김용우 부자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사례는 유승안 경찰야구단 감독과 LG 유원상-kt 유민상 형제다. 빙그레에서 공격형 포수로 활약했던 유 감독은 2003년부터 2년간 한화 지휘봉도 잡았다. 장남 유원상은 2006년 한화 1차 지명 선수로 입단했고, LG에서 주축 투수로 성장했다. 차남 유민상은 두산에 입단했다가 올해 트레이드로 팀을 옮긴 뒤 주전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두 아들은 아직 1군 경기 맞대결 기록이 없다. 유민상은 “형과 마운드와 타석에서 맞붙는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현역 시절 ‘해태 왕조’의 주역이었던 이순철 SBS 해설위원의 아들 이성곤도 두산 소속 프로야구 선수다. 2014년 입단해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경찰야구단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기량이 급성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해 퓨처스리그 올스타에 선정됐고, 북부리그 타점왕에 올랐다. 한국 프로야구 통산 최다승 투수인 송진우 KBSN스포츠 해설위원의 두 아들 역시 모두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장남 송우석은 2013년 한화에 육성 선수로 입단했고, 차남 송우현은 2015년 넥센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정인교 전 롯데 코치의 아들인 정의윤은 LG에서 SK로 이적한 뒤 홈런을 뻥뻥 때려내며 4번 타자로 자리매김했다. 보기 드물게 ‘아버지를 능가한 아들’의 사례로 기록될 가능성이 생겼다. 두산 박철우 타격 코치의 아들 박세혁은 같은 팀에서 백업 포수로 맹활약하고 있다. 김태형 두산 감독은 양의지가 부상으로 1군 엔트리에서 빠져 있을 때 “박 코치님께 ‘세혁이 집에서 밥 좀 잘 챙겨 먹여 달라’고 말씀드렸다”며 웃기도 했다.
# 형과 동생
SK 외야수 조동화와 삼성 내야수 조동찬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성공한 형제 선수로 꼽힌다. 체격도, 생김새도 많이 다르지만 서로를 향한 우애가 그 어느 형제보다 끈끈하다. 어린 시절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한 명만 야구를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서로 ‘내가 양보하겠다’고 나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부모는 결국 둘 다 뒷바라지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형은 동료들이 쓰던 야구용품을 모아 동생에게 가져다주곤 했다. 결과적으로 둘 다 프로에서 성공하는 최고의 선택이 됐다.
삼성 나성용과 NC 나성범 형제는 연세대 시절 포수와 투수로 배터리를 이뤘다. 나성용은 한화와 LG를 거쳐 삼성에 몸담고 있고, 나성용은 NC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하고 있다. 둘은 지난해 6월 2일 마산 경기에 동시 출전해 나란히 홈런을 쳤다. 한 경기에서 홈런을 때려낸 역대 두 번째 형제 선수가 됐다.
최초의 기록은 청보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양승관-양후승 형제가 남겼다. 1986년 7월 31일 롯데전에서 양승관이 6회 솔로 홈런을 터트린 데 이어 8회 양후승이 형의 대타로 나와 2점 홈런을 작렬했다. 정수근-정수성 형제도 프로에서 쏠쏠한 활약을 했다. 둘 다 발이 빨라서 도합 601개의 도루를 해냈다. 형의 선수 생활이 더 화려했고, 동생의 선수 생활이 더 건실했다.
사실 대부분의 형제 선수들은 형이나 동생 가운데 한쪽이 훨씬 유명하다. 첫 형제 선수였던 구천서-구재서 쌍둥이 형제부터 그랬다. 구천서는 12년간 프로에서 활약했지만, 구재서는 6시즌 만에 은퇴했다. 정학원의 형 정명원, 구대진의 동생 구대성, 최영완의 형 최영필, 안영진의 동생 안영명도 형제보다 훨씬 더 이름을 날렸다. 현재는 형보다 덜 유명하지만, 앞으로 반전을 노리고 있는 동생들도 있다. 형 최정과 같은 팀에 소속된 SK 최항, LG 문선재의 동생인 두산 문진제, 넥센 양훈의 동생인 두산 양현이 그들이다.
형과 동생의 1군 맞대결은 모든 부모의 꿈이다. 쉽게 기회가 오지도 않는다. 투수와 타자 사이인 유원상-유민상, 고영우(KIA)-고영표(kt) 형제도 아직 1군에서 맞붙지 못했다. 유일하게 정명원과 정학원 형제가 투타 맞대결 기록을 남겼다. 1995년 9월 5일 전주 경기에서 태평양 마무리 투수 정명원은 9회 대타로 나온 쌍방울 정학원을 유격수 땅볼로 잡아냈다. 형제 투수가 같은 경기에 출전한 기록도 많지 않다. 롯데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윤동배-윤형배 형제는 현역 시절 다섯 차례 같은 날 등판한 적이 있다. 동생이 선발 투수로 나선 날 형이 불펜으로 등판한 경기가 대부분이었다.
다만 올해는 롯데 박세웅과 kt 박세진 투수 형제의 등장으로 흥미로운 장면이 많아졌다. 둘 다 2년 간격으로 kt에 1차 지명됐지만, 박세웅이 롯데로 트레이드되면서 팀이 갈라져 오히려 화제였던 ‘차세대 에이스’ 형제다. 박세웅과 박세진은 4월 28일 상대 팀으로 나란히 같은 경기에 등판하는 첫 기록을 남겼다. 박세웅이 롯데 선발, 박세진이 kt 불펜이었다. 이어 7월 27일 각기 다른 구장에서 나란히 선발 투수로 출격했다. 롯데 3선발인 박세웅은 LG전에 나섰고, 박세진은 KIA전에서 데뷔 후 첫 선발 등판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형제 투수의 한 날 한 시 선발 등판은 처음이 아니었다. 불과 한 달여 전인 6월 10일에 kt 정대현-KIA 정동현 형제가 첫 기록의 주인공이 됐기 때문이다. 정대현이 넥센전, 정동현이 삼성전에 각각 선발 등판하면서 새 기록을 썼다. 희비는 엇갈렸다. 정대현은 호투했지만 승리는 올리지 못했다. 정동현은 5⅔이닝 무실점으로 데뷔 첫 승을 선발승으로 장식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뛰는 아빠 위 나는 아들’ 켄 그리피 부자 ‘백투백홈런’ 신화 ‘가족의 역사’는 메이저리그가 한국보다 더 화려하다. 이미 113년 전인 1903년에 험 도셔의 아들 잭 도셔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첫 부자 메이저리거가 탄생했다. 1992년에는 브렛 분이 시애틀에서 빅리그에 발을 내디뎌 최초로 3대(代) 메이저리거 가족이 나왔고, 1994년에는 톰 그리브의 아들 벤 그리브가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오클랜드에 지명돼 역시 최초로 부자가 모두 1라운드에 지명되는 기록을 세웠다. ‘켄 그리피’라는 이름은 그 수많은 가족 메이저리거 가운데서도 가장 상징적인 존재다. 아버지인 켄 그리피는 1970년대 신시내티 강타선의 일원으로 두 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탰다. 올스타에 3번 선정됐고, 1980년에는 아예 올스타전 MVP에 올랐던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다. 메이저리그에서 총 19시즌을 뛰면서 3할에 육박하는 통산 타율(0.296)을 남겼다. 그러나 그런 그도 이제는 누군가의 아버지로 더 유명하다. 아들 켄 그리피 주니어가 아버지를 뛰어 넘어서다. 주니어는 1990년대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타 가운데 한 명이다. 무려 13번이나 올스타에 선정됐다. 1997년 아메리칸리그 MVP에 올랐고, 홈런왕도 4차례 차지했다. 수비 실력도 뛰어나 10년 연속 골드글러브도 수상했다. 24년 동안 통산 홈런이 630개로 역대 6위에 해당한다. 지난해에는 역대 최고 득표율(99.3%)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선수가 됐다. 켄 그리피 시니어와 주니어에게는 아주 특별한 역사도 있다. 메이저리그 사상 처음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현역 선수 생활을 했다. 심지어 1990년에는 시애틀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그해 9월 15일엔 마침내 부자 백투백 홈런을 터트리는 불멸의 명장면도 남겼다. 그런가하면, 형제 셋이 모두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집안도 있다. 드류 가(家) 3형제다. 1999년 데뷔한 큰 형 J.D. 드류와 2000년 빅리그 경기에 첫 출전한 둘째 팀 드류, 그리고 2006년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막내 스티븐 드류가 영광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메이저리그 최초로 3형제가 모두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을 받은 기록도 세웠다. J.D.는 대학 재학 시절 ‘화이트 그리피’로 불렸던 유망주다. 1997년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전체 2순위로 필라델피아에 지명됐다. 그러나 계약금을 무리하게 요구하다 계약이 불발됐고, 이듬해 드래프트에 다시 나와 1라운드 전체 5순위로 세인트루이스의 선택을 받았다. 팀도 1997년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28순위로 클리블랜드에 입단했다. 스티븐 역시 2004년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5순위로 애리조나에 지명됐다. 2006년 7월 18일에는 맏형 J.D.와 스티븐의 역사적인 맞대결도 펼쳐졌다. 형은 LA 다저스 4번 타자 우익수, 동생은 애리조나 8번 타자 유격수로 나란히 선발 출장했다. 둘은 8살 차이라 아마추어 시절 함께 경기할 기회가 없었다. 어린 시절 집 뒷마당에서나 봤던 첫째와 막내의 대결을 보기 위해 세 아들의 부모와 먼저 은퇴한 둘째가 모두 체이스필드에 모이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다. 앞서 언급된 분 집안은 3대에 걸쳐 4명의 메이저리거를 배출했다. 이들이 올스타로 선정된 횟수만 합해도 10번이나 된다. 1대인 레이 분은 두 차례 올스타로 선정되고 1955년 아메리칸리그 타점왕에 오른 명타자였다. 빅리그 1373경기에 출전해 통산 타율 0.275에 홈런 151개의 기록을 남겼다. 2대인 밥 분도 올스타 4회, 골드글러브 7회 수상에 빛나는 명 포수였다. 캔자스시티와 신시내티 감독까지 거쳤다. 레이의 손자이자 밥의 아들인 브렛 분과 애런 분도 ‘가업’을 이었다. 형인 브렛은 올스타 3회, 골드글러브 4회, 실버슬러거 3회를 수상한 내야수였다. 2001년 타율 0.331, 홈런 37개, 141타점을 기록하면서 시애틀의 116승 신화에 힘을 보탰다. 동생 애런은 1997년 가족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빅리그에 데뷔했다. 2003년 올스타로 선정돼 ‘올스타 패밀리’의 명성을 드높였다. 샌디 알로마와 그의 두 아들도 전설적인 가족이다. 알로마는 훌륭한 수비력으로 메이저리그에서 15시즌을 살아남은 2루수였다. 그의 두 아들 가운데 장남인 샌디 알로마 주니어는 1990년 아메리칸리그 신인왕을 수상한 포수였다. 차남인 로베르토 알로마는 아버지의 수비 능력을 물려받아 2루수로 10차례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 2011년에는 90%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세실 필더와 프린스 필더 부자는 메이저리그 최초로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한 시즌 50홈런 이상을 기록한 ‘거포 부자’로 남았다. 형제 메이저리거들은 더 많다. 빈스-조-도미니크 디마지오 형제가 특히 유명하다. 둘째 조는 할리우드 스타 마릴린 먼로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바로 그 선수다. 필과 조 니크로 형제는 539승을 합작해 역대 형제 최다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79년에는 나란히 21승으로 공동 다승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B.J. 업튼과 저스틴 업튼은 2012년 8월 13일에 나란히 빅리그 통산 100번째 홈런을 날려 하늘이 내린 진기록을 완성했다. 2013년에는 함께 애틀랜타 유니폼을 입고 뛰었고, 그해 4월 23일에 형제 백투백 홈런을 기록했다. 20홈런-20도루 클럽에 동반 가입한 유일한 형제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칼 립켄 주니어, 토니 그윈, 행크 애런, 톰 글래빈, 호세 칸세코, 제이슨 지암비, 그렉 매덕스, 트레버 호프먼과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도 형 혹은 동생까지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야구 형제’ 출신이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