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산 재선거 출마 파동 이후 언론에 처음 ‘외출’ 한 김현철씨는 정치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을 그 대로 드러냈다. | ||
김 전 대통령의 이회창 지지발언 이후 일각에 나돌고 있는 내년 보궐선거 한나라당 공천설과 관련, 현철씨는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라며 “오는 2004년 17대 총선 때 거제에서 출마할 계획”이라고 향후 일정을 밝혔다.
현철씨는 특히 미국 유학 중 겪었던 테러사건과 관련해 “사건 연루자로부터 민주당 실세 K의원과 기무사 관계자가 배후에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며 “그대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당시 집을 습격했던 일당 중 한명의 신원이 밝혀진 이상 진상이 규명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고 입장을 밝혀 귀추가 주목된다.
이날 현철씨는 대선을 불과 20여일 남겨둔 시점이라 민감한 사안에 대해선 말을 아꼈지만 YS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공개 지지하기 전 ‘전직 대통령이 현실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지지 선언을 보류하도록 여러 차례 말씀 드렸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외에 현철씨는 이날 인터뷰를 통해 한보청문회 당시 검찰 상층부의 빅딜 제의, 이회창 후보의 정치입문 비화 등을 밝히기도 했다.
아침부터 겨울비가 서울 시내를 적시던 지난 11월29일, 취재진은 서울 효자동 길을 따라 현철씨의 구기동 집으로 향했다. 길옆으로 웅장한 청와대의 모습이 겨울비에 을씨년스럽게 비쳐지고 있었다. 현철씨는 이곳에서 부인, 아이 둘과 함께 12년째 살고 있다. 큰아들은 캐나다 밴쿠버의 한 명문 고등학교에서 혼자 유학중이다.
인터뷰는 아침 9시30분이 조금 지나 시작되었다.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하는 그의 활기찬 모습에서 재선거 출마 파동의 후유증은 이미 사라진 듯했다. 하지만 꽉 다문 그의 입술에서 정치적 꿈을 이루기 위한 그의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
▲강의도 하고 좋은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사람들도 자주 만난다. 지난 10월엔 명지대 지방자치대학원에서 특강을 했다. 국가경영학에 대한 내용인데 최근 펴낸 정치 에세이집을 요약해 강의를 했다.
‘한보 연루’는 아직도 억울
─마산 재보선 불출마 파동 뒤 처음 갖는 인터뷰인데.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라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미국 체류 때 테러와 관련해 할 말이 많았다.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과 현지 제보자를 통해 내게 테러를 가한 세력의 배후에 민주당 실세 K의원과 기무사 고위관계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 놀라기도 했고, K의원도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았던 사람인데 액면 그대로 믿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사건의 진상만은 확실히 밝히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는 당초 2004년 총선을 공식데뷔 시점으로 계획했었으며 이에 대한 자신감도 충만하다고 밝히는 한편 강단에 서고 싶다는 바람도 피력했 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사실 한보사건과 관련해서는 할 말이 많다. 나를 둘러싸고 별별 소문과 의혹이 나돌았지만 법원에서 모두 무혐의로 결론 나지 않았느냐. 나를 잡아넣으려고 적용한 조세포탈죄만을 제외하고.
당시 한보청문회 직전에 청와대 모 비서관이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작은 것 하나만 인정하고 잠시 들어갔다 나오는 게 어떻겠느냐’며 검찰 일각의 제의를 전해왔다.
순간 몹시 화가 났다. ‘내가 사리사욕을 탐했던 파렴치범도 아닌데 그게 무슨 소리냐’며 맞섰다. 더 이상 나를 흔들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죄가 있으면 정식으로 수사하라며 거절했다.
그 뒤로도 청와대 비서관이 몇 번 더 권유를 했지만 나는 그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자 검찰 태도가 돌변했다. 결국 검찰은 ‘강공’으로 돌아섰고 대선자금까지 훑으며 나를 옭아매려 했다.”
─당시 구속을 예감했나.
▲한보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가던 날 ‘길어야 이틀이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이날 아버지와도 전화통화를 했는데 그냥 “잘 다녀오라”고만 말씀하셨다. 그래서 ‘빨리 조사받고 (집으로)돌아오라’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때 아버지께서는 이미 검찰에 구속재가를 내린 뒤였다.
검찰수사 과정에서도 구속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검사가 갑자기 ‘김현철씨 당신을 긴급체포합니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검사는 내게 “정말 구속될 줄 몰랐나”고 되묻더라.
내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던 아버님이 그 순간만큼은 원망스러웠다. 구치소에 수감된 뒤 며칠 동안 구속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YS재임 기간에 1백71일 동안 옥중에 있었다. 출소 뒤에 아버지가 뭐라고 하던가.
▲출소한 뒤 집에 오니 어머님이 와 계셨다. 어머니와 얘기 중에 아버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에는 그런 말씀을 전혀 안하시는 분인데 “죄인이라면 내가 죄인이다. 정말 고생했다”고 갑자기 말씀하셔서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아버지의 그때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찌 보면 현철씨와 YS의 관계는 단순한 부자 관계 이상이다. 현철씨는 YS의 참모요, 세상을 향한 귀이기도 했다. 특히 YS가 결정적인 정치적 고비를 맞을 때마다 현철씨는 항상 YS의 곁에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아버지의 ‘참모’ 역할을 하게 된다. YS에게 자신이 나름대로 수집한 학교의 ‘민심’을 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눈을 뜨게 됐던 것. 이때부터 그는 YS의 곁에서 사실상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된 셈이다.
이런 현철씨의 ‘역할’은 문민정부 시절에도 이어졌고 특히 지난 96년 총선 때는 상당수 후보의 공천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사개입 시비를 부른 대목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그의 입장은 어떨까.
“국회의원 후보나 공직 후보의 경우 몇 배수까지 추천되는 게 관례다. 나의 여론조사뿐만 아니라 청와대나 당에서도 스크린 작업을 활발하게 했다. 결정은 결국 청와대나 당에서했다. 내가 한 역할은 여론조사를 통해 몇 배수의 후보 중 누가 민심을 얻고 있는가에 대한 데이터를 제시하거나 아버님의 뜻에 대한 후보자의 입장을 전달하는 정도였다. 내 뜻에 따라 공천이나 공직이 좌우됐다는 얘기는 상층부의 권력 매커니즘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나온 오해다.”
현철씨는 이회창씨가 지난 96년 신한국당에 입당할 때도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가 전하는 당시 비화.
“아버님은 96년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씨를 신한국당에 영입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회창씨는 총리 시절 잡음을 빚고 경질된 터라 반대도 많았지만 신한국당의 개혁 이미지와 맞다고 여기셨던 것 같다.
하루는 지방에 내려가 있는데 아버지께서 밤에 급히 나를 호출해서 가니까 ‘이회창씨 집을 좀 방문해서 신한국당에 입당할 수 있도록 설득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뒤로 신한국당 입당과 관련해 이회창씨를 세 번 만났다. 그 전에는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다. 처음 만났을 때 이회창씨는 ‘폐가 되지 않겠느냐’며 제의를 한사코 거절했다. 그런데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마음이 변하는 것 같더라. 주변과 상의를 해보겠다고 하더니 세 번째 만났을 때 입당을 결심했다. 삼고초려로 모셔온 셈이다.
하지만 현철씨의 이러한 ‘역할’은 그 자신이 ‘로비 표적’이 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는 기업을 하는 동문 선배들로부터 ‘한눈 팔지 말라’는 의미로 활동비 등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철씨는 이에 대해 “그분들은 아버님이 민주화운동을 하던 야당시절부터 곁에서 나를 도와주었던 고마운 분들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대가를 바라고 찾아온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말라고 내게 도움을 준 것이다”고 말했다.
최근의 이슈로 인터뷰의 방향을 틀어보았다. 자연스럽게 지난 7월2일 마산에서 재선거 불출마 선언의 배경으로 말머리가 돌려졌다.
“마산 재선거 출마는 다소 감정적인 것에서 출발했다. 강단에 서서 학생들과 토론도 하며 연구생활을 계속하고 싶었는데 예정된 강의가 갑자기 무산되는 일이 있었다. 내가 마산 재선거 출마를 염두에 두고 지역터를 닦기 위해 경남대에서 강의를 하려 한다는 지역 정치권 인사들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내가 목표로 했던 것은 2004년 17대 총선이었다. 그런데 이런 음해를 당하게 되자 일종의 오기같은 게 생겼다. 강의안을 덮고 본격적인 출마 준비에 나섰다.
실패하더라도 무소속으로 뛰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한나라당에서 나에게 공천을 주느니 마느니 하며 아버님까지 자꾸 현실정치로 끌어들여 이상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나 때문에 아버님이 또다시 정쟁 속으로 끌려들어오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결국 출마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YS는 출마를 말렸다는데.
▲아버지가 내가 정치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려면 제대로 준비해서 2년 뒤 2004년 총선에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씀하셨다.
국민들은 지난 97년 현철씨 구속에 이어 올해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홍업 홍걸씨마저 구속되자 ‘구조적 악순환’에 대해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 현철씨도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이들의 구속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강단에 서는 게 마지막 목표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정치활동’을 했던 나와 개인 비리인 뇌물 수수로 구속된 홍업 홍걸씨의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대통령 아들의 사법처리가 정권 말기에 예정된 수순처럼 된 현실이 안타깝다. 후보들마다 대통령이 되면 친인척관리를 철저히 하겠다고 하면서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해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그때의 심경을 토로하던 현철씨는 대통령 아들이기 때문에 받지 않아도 될 ‘역차별’을 받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대통령 아들에 대한 지나친 배려도 문제겠지만 대통령 아들에 대한 ‘역차별’도 이제 생각해보아야 한다.
대통령 아들도 인격을 가진 자연인이다. 자신이 꿈꾸는 분야에서 일할 기회마저 박탈해서는 안된다.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선 반성한다. 하지만 내가 대통령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공식적으로 정치활동을 펼 수 있었다면 과연 내가 청문회 자리에 서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17대 출마를 계획하고 있다는데.
▲2004년 총선에서는 거제에서 출마할 예정이다. 아버님 생가가 있는 곳이고 나의 정치적 고향이기도 하다. 직접 내려가 지역정서를 보고 느끼면서 다음 총선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기회 닿는 대로 강단에 서려 한다. 국회의원 이후에 내가 돌아갈 곳이 강단이었으면 한다. 봉사직인 국회의원이 평생 직업일 수는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