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박진영이 만들어낸 가수’라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아온 비는 <상두야 학교가자>를 통해 10대 위주의 팬 층을 중장년층까지 확대시켰다. 게다가 최근에는 그의 남다른 무명시절과 불행한 가정사가 알려지면서 비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한층 달아오르고 있다.
하지만 한 인물이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는 과정에는 많은 오류가 있게 마련. 그것도 포장과 소문이 어우러지는 연예인이라는 특성상, 우리가 알고 있는 가수와 실제 그 인물 사이에는 적잖은 괴리감이 있을 법하다.
그렇다면 비의 경우는 어떨까. 그를 둘러싼 온갖 소문을 털어내고 포장을 벗겨낸 진짜 비를 한 번 만나보도록 하자.
(23·본명 정지훈)는 ‘박진영이 만들어낸 가수’로 2002년 5월 데뷔했다. 때문에 ‘제2의 박진영’이라 불리기도 했던 그에게선 우선 ‘만들어진’ 가수라는 인상이 강하게 풍긴다.
비가 만능엔터네이너 박진영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0년. 이때부터 3년간의 혹독한 교육을 거쳐 비는 1집 앨범 <나쁜 남자>를 들고 가요계를 노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박진영은 어떤 방식으로 비를 교육시켰을까. 이에 대해 박진영은 “내가 처음 비를 만났을 당시에 이미 많은 준비가 이뤄진 상태였다”며 “나는 단지 조금 다듬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비가 말하는 박진영의 교육 스타일은 ‘무서운 무관심’. 박진영의 비에 대한 교육은 주기적인 테스트가 전부였다. “직접 가르쳐주기보다는 대략의 방법만을 가르쳐 준 뒤 스스로 알아가도록 했다”는 게 비의 설명. 단지 박진영의 소속사인 JYP 엔터테인먼트에서 교육용으로 자체 제작한 ‘솔 12동작, 스텝 7동작’ 비디오테이프 정도가 유일한 교재였다.
비의 매니저인 조동원씨는 박진영의 교육 방식을 ‘냉정하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거의 매일 코피를 쏟아가며 연습하는 비를 말려야 했다”는 조씨는 “하지만 박진영은 테스트 때마다 호되게 혼낼 뿐 단 한 번도 칭찬하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심지어 “너는 도저히 안 되겠다. 어떻게 너 같은 애가 춤을 추냐”는 모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았고 노래를 부를 때 조금이라도 음정이 틀리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방송국 대기실에서 모욕을 당하는 일이었다. 나름대로 JYP 엔터테인먼트 소속 신인으로 알려진 상황에서 가요 관계자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정말 싫었던 것.
심지어 데뷔 계획 자체가 흔들리기도 했다. 원래 비의 데뷔 예정 시기는 2001년 8월. 매니저 조씨는 “당시 충분한 준비가 돼 있었다”고 말하지만 박진영은 여전히 “아직 부족하다”는 평가를 내놨다. 결국 비는 데뷔가 무작정 연기된 상황에서 가수 박지윤의 안무가로 만족해야 했다.
이렇게 힘든 나날은 결국 비에게 가수의 꿈을 포기할 위기까지 초래했다. 그러자 박진영은 “그동안 무관심했던 것은 다 너를 위해서였다”며 “스스로 고기를 잡고 조리해서 먹는 방법을 알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얘기했고 비로소 비는 자신의 짧은 생각을 뉘우쳤다.
▲ 가수로, 연기자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비. 그 뒤에는 끼와 오기라는 든든한 ‘빽’이 있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춤추는 애들은 문제학생’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에서 비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의 선한 인상과 경희대에 재학중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비가 문제학생이었다는 상상은 쉽지 않다.
그러나 비의 실제 학창 시절은 보통의 눈높이로 볼 때 분명 ‘문제 학생’에 가깝다.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춤에 매료된 비에게 학교 수업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고 당연히 성적도 바닥을 기었다. 심지어 평균 45점의 성적표까지 받았을 정도. 안양예고를 다니던 시절에는 더 심해져 수업까지 빠지고 춤 연습에만 매달렸다.
이에 대해 비는 “수업을 등한시한 것은 잘못됐으나 춤을 춘다고 무조건 문제아는 아니다”고 얘기한다. 중학생 시절 친구들과 동네 놀이터에서 춤 연습에 몰두하던 도중 경찰과 실랑이를 벌인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비는 “동네에 모여 춤을 추는 게 죄는 아니지 않는가”라고 반문하곤 했다.
줄곧 학교 밖으로 나돌았다는 사실은 비가 비행청소년으로 전락할 위기에 가까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학교 담 밖의 비를 지켜준 것은 바로 비를 학교 밖으로 내몬 춤이었다. 비는 춤을 추는 대신 ‘담배는 절대 피지 않겠다’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덕에 다른 ‘노는’ 행위에도 빠지지 않았다. 또한 ‘최고의 댄서가 되겠다’는 꿈 역시 그를 지켜주는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비는 어떻게 대학에 갈 수 있었을까. 일등 도우미는 단연 박진영이다. 오디션을 통과해 음반 준비에 희망이 부풀어 있던 비에게 박진영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면 음반을 내줄 수 없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비는 수능을 앞두고 넉 달 동안 입시에 매달렸고 결국 3백40점의 비교적 높은 점수를 받아 경희대 포스트모던 음악과에 입학했다. 비는 대학 입학을 두고 ‘천운이 따라준 기적’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담 밖의 학생이던 그가 대학에 진학하기까지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까 하는 것은 미뤄 짐작이 가능한 부분이다.
최근 한 아침 방송 프로그램에 비가 돌아가신 어머니가 계신 납골당을 찾는 모습이 방영된 바 있다. 납골당에 새겨진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어루만지는 모습, 어머니 얘기만 나오면 눈물 짓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진정한 효자’라며 칭찬한다.
하지만 비의 가족사를 더듬어 보면 비는 ‘효자’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춤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그에게 가족 역시 부차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던 비는 중학교 입학과 함께 커다란 변화를 맞아야 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급격히 기운 것. 2층 단독주택에서 용산의 허름한 전셋집으로 이사한 뒤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지방과 브라질 등지까지 전전했다. 때문에 지병으로 당뇨병을 앓고 있던 어머니가 대신 생활 전선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맏아들인 비는 오직 춤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비는 “‘나라도 잘 돼야지’ 하는 생각에 오직 춤에만 몰두할 뿐, 집안에 무관심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결국 어머니가 지병인 당뇨병에 폐혈증 등 각종 합병증이 겹쳐 더 이상 버티기 힘들 무렵에서야 비는 ‘정신’을 차렸다. 그때가 박진영에게 발탁된 직후인 2000년. 당시 비는 박진영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상황을 파악한 박진영은 비의 어머니를 서울대학병원에 입원시켰다. 하지만 이미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상황. 그렇게 최고의 기회를 맞았던 2000년에 비는 어머니를 머나먼 곳으로 떠나 보내야 했다.
▲ 드라마 <상두야 학교가자>에서 상대역이었던 공효진(오른쪽)은 비를 “스펀지 같은 흡수력의 소유자”라고 평했다. | ||
춤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는 그에게 연기자 변신은 약간 뜬금없어 보인다.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점에서 좋게 보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실력파 가수의 색깔이 흐려질 수 있다는 부담이 따르는 게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비는 안양예고에서 ‘연기’를 전공한 연기지망생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교 시절 춤 연습을 위해 연기 실습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데뷔작 <상두야 학교가자>에 타이틀 롤로 출연하는 게 결코 쉬운 결심은 아니었을 듯하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도 비의 가장 큰 강점인 지독한 연습벌레의 저력이 나타났다. 수백 편의 비디오를 빌려 상황마다 자신과 비슷한 톤의 배우를 모델로 삼아 연기를 연습했고, 코믹한 설정을 살리기 위해 수백 권의 만화책을 통해 손발 처리법과 표정을 익혔다.
“고교시절 춤에만 열중했지만 늘 ‘연기도 잘할 수 있다’고 장담해 왔다”는 비는 “당시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단 한 분의 선생님만은 믿어주셨다. 그분께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며 연기 겸업 이유를 설명한다.
비의 연기자 변신은 일단 성공이었다. “스펀지 같은 흡수력의 소유자”(공효진) “능청스런 연기의 1인자”(홍수현) “비만이 가진 색깔의 ‘상두’를 만들어냈다”(정애리) 등 동료 선배 배우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상두야…> 제작진도 ‘비 효과’를 톡톡히 봤다. 비 또한 드라마를 통해 30~40대에 얼굴을 알리는 ‘부수입’을 올렸다.
하지만 가요계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최고의 댄서 그리고 가수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비가 ‘연기’까지 욕심내다 두 가지 모두를 잃을 수 있다는 것. 이에 대해 비는 이제 가수에만 전념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영화 <바람의 파이터> 출연 번복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것처럼 때로 그는 흔들리는 20대일 뿐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비는 어떤 연예인일까. 딱 잘라 얘기하기는 뭐 하지만 분명 외모에서 풍기는 착한 이미지와는 분명 다른 무언가가 그에겐 있다.
비는 “너무 일찍 사회라는 곳을 알아버린 것 같다”고 얘기하곤 한다. 그 예로 중학교 때의 경험을 꺼낸다. 춤에 한창 빠져가던 중학생 시절, 비는 소위 ‘춤 좀 춘다’는 사람들이 모이는 이태원에서 그들의 춤을 보고 돌아와 이를 따라하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어린애가 기웃거리면 돈을 빼앗기고 맞는 일이 허다했다. 언젠가 겨울엔 새로 산 점퍼와 돈을 모두 이들에게 빼앗기고 반팔 차림으로 이태원에서 집까지 걸어온 기억도 있다. 비는 당시 이를 악물고 추위를 견디며 “내 언젠가는 너희들보다 더 춤을 잘 출 것”이라는 오기를 품었다고 회상한다.
이런 악바리 같은 모습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더욱 심해졌다. 어머니의 죽음을 방치했다는 죄책감은 최고의 가수가 되겠다는 독기로 변해갔고,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스스로를 학대했다. 당시의 그는 ‘악바리’ 근성으로 뭉쳐진 ‘독종’이라는 게 가장 적절한 설명일 것이다.
이제 가수로서 성공의 길 위에 선 비는 여전히 ‘독종’ 근성으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뛰려 한다. 앞으로 10년간 가수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겠다는 게 1차 목표. 그 이후에는 패션 디자이너로 변신해 또 다른 성공을 이뤄내겠다고 말한다. 벌써부터 자신의 무대 의상을 직접 디자인하는 비의 모습에서 10년 뒤의 성공을 멀리에서나마 엿볼 수 있었다면 지나친 예측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