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권쯤 쓸 수 있지만 더 이상은 안쓴다”
▲ 박철언 이사장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더 이상은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5공, 6공, 3김 시대의 정치 비사>(랜덤하우스중앙)라는 책 제목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박 이사장의 회고록 속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YS에게 건넨 40억+α’ ‘남북 비밀회담’ ‘DJ와의 밀약’ 등 그간 베일에 가려졌던 수많은 정치 이면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과연 박 이사장은 왜 지금 시점에 자신의 회고록을 펴낸 것일까. 정가 일각에서 제기하는 ‘편파적 공개’라는 지적에 대해서 그는 어떤 입장일까. 그리고 그가 회고록 속에서 밝히지 못한 또 다른 가슴 속 이야기는 대체 무엇일까.
박 이사장이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꺼낸 첫마디는 “마음이 굉장히 무겁다”였다. 20여년 동안 방대한 분량의 수첩과 다이어리에 ‘잠들어 있던 비밀’을 쏟아내면 어느 정도 시원섭섭할 법도 한데,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그는 “내가 갖고 있는 자료로 회고록을 쓰면 열 권은 넘었을 것”이라는 말로 두 권짜리 정치 비화를 내놓았지만, 그래도 ‘아직 못 다한 무수한 말들’이 남아 있음을 시사했다. 그럼에도 “너무 부담스러워서 앞으로 더 쓸 수가 없다”고 말했다.
회고록이 출간된 다음 격려와 찬사도 받았지만, 주변 지인들로부터 우려와 걱정의 목소리도 함께 들어야 했던 그다. 자신이 직접 모셨던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게 회고록과 함께 “너그럽게 이해해 달라”는 메모를 보냈지만, 연희동에선 아무런 답신이 없었다고 한다. 목감기에 걸린 그를 지난 18일 서울 역삼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회고록을 낸 소감은.
▲마음이 굉장히 무겁다. 회고록에 나오는 전직 대통령 네 분(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일했던 많은 분들에게 미안하고 송구스럽다. 그래서 (회고록을 쓰기로) 결심하기까지 고뇌와 번민도 많았다. 정치를 떠났으면 그런 분들과 잘 지내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닌가. 상당수 많은 분들과 거리가 멀어졌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
―그렇게 고뇌하면서까지 굳이 회고록을 낸 까닭은 뭔가. 혹시 정계 복귀를 위한 수순 아닌가.
▲내가 정치현장에 있어보니까, 너무 투명하지도 깨끗하지도 않았고 이중적이었다. 그래서 국민들로부터 사랑받기는커녕 정치가 외면당하는 경향이 많질 않나. 선진국처럼 깨끗한 정치, 투명한 국가 운영을 위해서 누군가가 계기를 마련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시금석이 돼야 겠다, 속죄양이 돼야 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지난해 3월31일에 정계를 공식 은퇴했다. 만약 정계에 복귀할 뜻이 있었다면 회고록을 절대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를 다시 할 생각은 없다.
―혹시 내년 지방선거에 출마할 계획은.
▲추호도 없다. 지난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를) 조금 협조하면서 이강철 (청와대 시민사회) 수석에게 ‘나는 정치를 안하고, 공직에 다시 갈 생각 없으니까 전혀 그런 신경을 쓰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다. 대선이 끝난 뒤에도 그런 얘기를 했다.
―그러면 왜 이 시점에서 회고록을 내놓았나.
▲난 내가 정치를 완전히 떠난 다음에 회고록을 쓰려고 했다. 또 대통령들이 임기를 마친 다음에나 쓸 생각이었다. 그분들이 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시기에 얘기를 하겠다고 생각했다. 다소 체면에 손상이 가긴 하겠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전달했던 정치자금(40억원+α) 문제 등도 다 공소시효가 지났다. 내가 더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내가 더 기억력이 떨어지기 전에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하고서, 지난해 4월부터 쓰기 시작해 지난 6월에 탈고했다.
그런데 내 회고록을 ‘박철언 X파일’이라면서 ‘안기부 X파일’과 비교되는 게 진짜 마음이 아프다. 천부당만부당하다. 안기부 X파일은 범죄적인 방법으로 사생활까지 도청해서 회유 협박 공갈 등 범죄 행위에 사용한 아주 부도덕한 일이다. 하지만 내 증언(회고록)은 대통령을 보좌한 공직자로서, 최고 정보기관 간부로서, 아니면 당의 부총재로서 야당 지도부에서 공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을 메모했던 일지다. 공무수행일지다. 그런데 어떻게 범죄정보와 공무수행일지 공개가 똑같은가.
―회고록이 출판되기 몇 달 전부터 회고록을 집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혹시 회고록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집필 도중에 연락 온 사람은 없었나.
▲직·간접적으로 관심을 보인 사람은 많았다. 어떤 분은 ‘뭘 쓰려고 하느냐’ 묻기도 했고, ‘좀 더 뒷날 쓰는 게 좋지 않느냐’, ‘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등 이런저런 얘기들을 직·간접적으로 전달받았다. 압박이라기보다는 권유와 희망 같은 얘기들이었다. 그래서 더 고민이 됐다. 그렇지만 더 늦추다가는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용기가 없어질 것 같았다.
―출판 이후 전직 대통령들에게서 연락을 받은 게 있나.
▲(출판) 사전 사후에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전두환 노태우 두 분은 내가 직접 모셨으니까, 책을 한 권씩 비서를 통해 보내드렸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로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과 미진한 부분이 많겠지만, 역사에 대한 진실을 기록하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일독해주시고, 너그럽게 생각해주십시오’라는 간단한 메모도 적어 보냈다.
―전·노 전 대통령에게 책을 보낸 이후에 연락을 받았나.
▲책을 보면 그분들도 마음이 무겁고 언짢은 부분이 많이 있을 것 같아서 간단하게 메모를 남겼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 박철언 이사장은 “내가 아닌 누군가의 제2, 제3의 생생한 증언이 담긴 회고록이 빨리 나와야 이 나라 정치가 깨끗해지고, 투명해진다”고 역설했다. | ||
▲그분은 내가 직접 대통령으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에 드리지 않았다. 장차 기회가 있으면 드리겠지만, 현재까지는 드리지 않았다. 다만 이강철 시민사회수석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번 읽어보시라고 전달했다. 나와 이 수석은 가끔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는 사이다. 단지 현재의 위정자들이 겸허히 두려운 마음으로 정치를 더 잘해달라는 의미니까, 대통령이 읽었는지 확인할 필요는 없다.
―출판 후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
▲국민들한테서 격려전화를 많이 받았다. 내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아주 속 시원하게 잘 털어놨다’ ‘이렇게 현장에서 생생한 얘기를 해줘야, 지금 정치하는 분들도 바르게 하고, 앞으로도 깨끗해지지 않겠느냐’ ‘정말 하기 어려운 얘기 했다’고 격려해줬다.
그런데 ‘왕따당할 각오를 했구나’하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친구는 ‘그분들이 자네의 본뜻도 모르고 섭섭해 할 텐데, 왜 그렇게 했느냐’고 걱정했다.
―이번 회고록에 담지 못한 이야기들도 많을 것 같은데.
▲20여년 동안 쓴 20여 권의 업무 다이어리와 1백20여 권의 수첩에 기록된 내용 가운데 일부만 이번에 두 권으로 묶었다. 만일 내가 보관하고 있는 방대한 자료를 공개하려면 열 권정도는 써야 다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두 권을 써보니까, 너무 부담이 가고. 앞으로는 더 쓸 수가 없을 것 같다.
―이번에 공개하지 못한 내용이 대체 무엇인지.
▲지금도 남북문제가 진행중이니까, 남북관계에 대해 완전하게 다 얘기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또한 내가 자료와 증거를 갖고 있지 않은 (누군가로부터) 들은 얘기와 간접적으로만 확인된 얘기는 많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여기에 담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이제는 쓰고 싶지 않다. 너무 이번에 마음고생이 많아 가지고….
―회고록을 내놓고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또 <일요신문>이 ‘박철언 회고록 2탄 준비’ 이렇게 쓰려고 그러지(웃음). 이제 사랑하고 사랑받는 생활을 하기 위해 한반도통일문화재단 일에 몰두할 생각이다. 비정치적인 남북교류 이를 테면 음악 예술 체육 교류 등에 나설 생각이다. 또 남북의 그늘진 곳, 소외된 곳에 대한 지원도 할 생각이다. 뜻있는 분들하고 내 주변 분들이 재원을 마련해서 재단법인을 만들어 내년부터는 조용히 봉사하는 그런 생활을 할 각오를 하고 있다.
―다이어리와 수첩에 기록을 남겼던 것은 처음부터 언젠가 회고록을 쓰겠다는 의도였나.
▲난 처음부터 정치를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자유롭게 생활하며 시(詩)를 쓰는 교직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법대 가라고 해서 법대에 갔고, 갔으니까 고시를 봤고, 합격했다. 그런데 1980년 5월31일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로 파견 근무 나가라는 명을 받았다. 당시 노(태우) 장군과 전(두환) 장군은 아는 관계였다. 각 부처의 엘리트 공무원 60~70명이 뽑혀서 파견근무를 나갔다. 그런데 사실 그 전인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났을 때도 나에게 파견 근무를 나가라고 했는데, 난 안 나간다고 했다. 난 정통 법조인이 되고 싶었다.
―회고록을 보면 지난 86년 전두환 대통령이 친위쿠데타를 기도했을 때 고건 당시 민정당 의원도 동참한 뉘앙스가 풍기는데.
▲당시 고건 의원은 당에서 선거법 관계 연구반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하고도 그 모임에서 몇 번 만났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고건 의원은 ‘선진비상계획’(친위쿠데타 계획)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진 못했을 것이다. 그 계획은 엄격한 보안사항이었고, 단 몇 사람만 알고 있었다. 고 의원이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구도 알리지 않았다. 잘 모르겠지만, 난 알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계획도 중단되지 않았나. 따라서 고건씨는 잘 모른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고건 당시 의원이 선거법 관계연구반에 참여했다면, 친위쿠데타 계획도 어느 정도 알았다고 볼 수 있지 않나.
▲그(86년) 이전부터 헌법 개정, 내각제 개헌 등에 대해 당에서 스터디를 해왔다. 너무 연관시키지 말라. (고건 의원이) 선진비상계획을 알고 있을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MBC 드라마 <5공화국>을 보면 ‘박철언=노태우 브레인’으로 묘사됐는데.
▲내가 나온다고 해서 가끔 드라마를 본다.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뭘 근거로 연출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출가는 나한테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이 너무 많다.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사실과 다른가.
▲너무 많아서…. 진실 부분도 있고, 너무 거리가 먼 부분도 있다. 아마 내 회고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어느 부분이 사실과 다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난 진실만을 적었다.
―현 정국을 어떻게 보고 있나.
▲난 정치를 떠난 사람이니까. 정치 얘기는…(이 질문에 대해 그는 말문을 쉽게 열지 않았다). 나이가 든 사람은 대개 근대화·산업화·보수 세력이다. 나이 젊은 친구들은 대체로 민주화·시민진보 세력이다. 지금은 진보 세력층에서 권력을 잡고 있다. 우리 현대사를 보면 진보와 보수가 끊임없이 갈등하고 분열돼왔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시대가 민주헌정사를 얼룩지게 하기도 했지만, 이 시대를 거치면서 국민소득 70달러 시대에서 1만달러 시대가 됐다. 그 당시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본질적인 문제였다. 그러다 보니 인권과 민주주의 측면이 소홀했다. 이제는 산업화 세력의 공(功)도 인정해줘야 한다. 물론 민주화와 인권신장을 위해 희생한 분들도 인정해야 한다. 역사적인 대타협을 통해 미래를 향한 정책경쟁을 벌이자는 얘기다.
지금 이 시점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도 현재의 권력은 진보층이 가지고 있으니까, 근대화 세력을 수구·부패·반동이라 하지 말고, 좀 더 넓은 가슴으로 함께 가자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아닌 누군가의 제2, 제3의 생생한 증언이 담긴 회고록이 빨리 나와야 한다. 그래야 이 나라 정치가 깨끗해지고, 투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