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은 전 국민을 위한 경영을 해야…복지는 공짜 아닌 공구(공동구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비즈한국’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해 대체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했다. 지난해 12월 장 교수의 강연 모습. 사진=연합뉴스
―한국 1분기 성장률이 전년 동기 대비 2.9%를 기록하며 긍정적 신호를 주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경기 회복을 체감하고 있지 못하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한국 경제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저성장체제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1960~1970년대엔 연 8~10%씩 고도성장을 하다가 1990년대 초 2년간 성장률이 5%대에 그친 적이 있는데, 이를 두고 경제위기 아니냐고도 했다. 당시 <이코노미스트>가 ‘이게 경제위기면 영국은 매년 위기이고 싶다’고도 했다. 나이 든 세대는 고도성장에 익숙해져 3% 성장으론 체감을 못 하는 것일 수 있다. 둘째는 성장의 과실이 공정하게 분배되느냐의 문제다. 경제가 성장해도 상류층으로 소득이 집중되다 보니 많은 국민들이 ‘내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경제적 양극화를 해결해야 할 텐데, 해법이 있을까.
“외환위기 이후 경제자유화가 확대되기 전까지는 복지지출이 거의 없었음에도 소득의 평등이 어느 정도 유지됐다. 그 이유는 경제적 약자를 나름 국가가 보호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수입을 억제해 농업을 보호하지 않았나. 바나나만 해도 예전엔 부자들만 먹는다고 할 정도로 비쌌다. 그런데 베트남, 태국에선 바나나가 엄청나게 쌌다. 바나나가 원래 비싼 게 아니라 수입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과거엔 재벌기업 최고경영자도 2억~3억 원을 받으면 많이 받는 것이었다. 이런 억제된 체제가 외환위기 이후 자유화가 도입되면서 금융시장에서부터 엄청난 소득이 나왔다.”
“반면 농민, 소상공인에 대한 보호는 약화됐다. 상대적으로 취약하던 노동자들은 그나마 있던 것도 약화됐다. 비정규직의 증가 등 격차를 용인하는 체제가 됐다. 이런 경제양극화의 해결방법으로, 우선은 골목상권 부정경쟁을 죈다든지 옛날식으로 보호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결국 유럽식 복지국가 모델을 확대해야 한다. 결국 소득재분배밖에 없다. 노동권을 강화해 비정규직, 저임금직도 받을 만큼 받아야 한다. 옛날식 구멍가게를 유지하는 게 답은 아니지만, 다른 체제로 가려면 시간이 걸리니 그동안은 보호를 해줘야 한다.”
지난 5월 11일 오전 노동당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 앞에서 최저임금 1만 원 즉각 이행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문재인 정부가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 원을 공언했다. 이에 대해 프랜차이즈 가맹점주 등 소상공인들은 경영난이 가중된다는 우려를 표하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은 한국 경제에 해법이 될 수 있을까.
“저임금은 장기적으로는 없어져야 한다.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이유는 결국 다 같이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한 것 아닌가. 저임금으로는 경쟁하려야 할 수가 없다. 임금을 반으로 깎아도 중국과 경쟁이 안 된다.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장기적으로 맞는 방향이다. 임금을 올리면 도산하는 업체도 있을 거다. 따라서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 다만 방향성은 확실히 해야 한다. ‘최저임금 1만 원’ 구호가 아니어도 임금은 계속 올라간다는 사실을 기업들이 받아들여야 한다. 임금이 높아져도 생산성이 높아지면 문제가 없다. 독일의 임금이 한국보다 몇 배 높지만 차만 잘 팔지 않나. 장기적으로 임금과 생산성은 함께 가야 한다.”
“그렇지만 생산성이 낮아서 지금 수준의 최저임금이 아니면 못 버티는 소상공인들은 사회적으로 도와야 한다. 예를 들어 대형마트는 대량구매를 하므로 가격협상권이 있지 않나. 그렇다면 골목상인들도 조합을 만들어 공동구매로 구매단가를 내릴 수 있게 사회적으로 도와줘야 한다. 그렇게 가격경쟁력을 갖추면 국민들도 굳이 먼 거리의 대형마트를 기름값, 시간 써가며 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주5일 근무제 도입 때도 ‘회사 망한다’고 다들 얘기했지만, 망하지 않았다. 사회가 흡수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 프랜차이즈의 경우도 가맹점은 망해 가는데 반대로 본사는 돈을 번다면 그 이익을 나눠야겠지. 이런 식으로 최저임금 인상은 생산성, 분배, 도입속도 등을 통합한 패키지로 논의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13조 원 추가경정예산으로 공공부문 일자리부터 늘리기를 추진하고 있다. 이것이 민간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될까.
“공공부문의 일자리 늘리기는 여러 효과가 있다. 첫째로 청년실업으로 인한 사회적 비효율을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다. 둘째로 공공부문에서 일자리가 창출되면 소득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수요가 증가하면 민간의 투자와 고용이 늘어난다. 셋째로 공공부문의 복지서비스 강화로 연결된다. 지금 일자리가 필요한 복지수요가 엄청나게 많다. 공공도서관이나 공공체육시설을 지으려면 인력이 필요하다. 노인과 장애인을 돌보기 위한 공공서비스도 인력이 부족하다. 복지를 강화하기 위해 세금을 늘린다고 하면 기업 이윤에 도움이 안 되니 낭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젊은 직장인들이 출산·육아 문제에 너무 많은 힘을 뺏기는데, 이를 사회가 해결해주면 생산성 높은 노동자가 될 수 있을 거다. 이런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국가적인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민간 일자리를 창출하기엔 기업들의 성장동력이 부족하지 않나. 기업들이 활력을 가지려면 어떤 것이 가장 시급한 방안인가.
“성장동력이 부족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기업들이 신산업 개발을 안 했다. 지금 주축산업 중 반도체 빼고 다 1970년대에 시작된 것들이고 이마저도 대부분 중국에 추격당하고 있다. 이젠 반도체, 자동차도 안심하지 못할 정도다. 성장동력을 안 키운 원인은 경영자의 무능일 수도 있지만 기업마다 조금씩 다르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가 산업정책을 등한시한 부분이 있다. 예전에는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기술자를 양성하고, 이공계에 병역특례를 준다든가 했는데, 그런 게 많이 약화됐다. 신산업이나 첨단기술은 기초과학에서 시작되는데, 정부가 더 많이 투자하고 육성해야 한다. 기업 입장에서 기초과학은 돈 안 되는 비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금융시장의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외환위기 이후 거의 무방비로 외국자본이 들어왔는데, 대부분 단기투자다. 이들은 주주로서 장기 비전보다는 단기 이익을 기업에 요구한다. 자사주를 매입한다든지 하는 것은 과거 기업에는 없던 것들인데, 지금은 주주들이 괴롭히니 할 수밖에 없다. 이런 금융 자유화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미국·영국에 비하면 한국은 금융의 자유도가 낮은 편이지만 지금 미국·영국 기업들은 이윤의 90% 가까이를 배당과 자사주 매입에 쓰느라 투자할 여력이 없다. 한국도 그렇게 될 우려가 있다. 원래 금융의 역할은 기업에 돈을 대는 것인데, 지금은 기업이 금융에 돈을 대고 있다.”
지난 2012년 8월 21일 초청 강연에서 함께한 장하준 교수(오른쪽)와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예비경선후보. 사진=비즈한국DB
―문재인 정부는 재벌을 사라져야 할 적폐로 규정하고 지배구조 개편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대기업 지배구조의 이상적인 모델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재벌 지배구조는 회사법 차원에서만 접근하면 안 된다. 주주 관계로 한정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회사는 특정 가문의 것도 아니고, 주주의 것만도 아니다. 과거에는 해외 자본이 국내 기업을 못 사도록 막아줬다. 보호무역을 통해 국민들이 질이 낮아도 국산품을 사서 기업들을 도와줬다. 다시 말해, 우리 기업들은 혼자 큰 것이 아니고 국민들이 키워준 것이다. 지금 재벌 지배구조에 관한 논쟁은 재벌 창립자 가문과 외부 주주들 사이의 세력다툼에 관한 것이고, 거기에서 국민들은 빠져있다. 또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때를 보면 국민연금이 핵심 키를 가질 정도로 큰 주주이다. 그만큼 국민들이 많이 갖고 있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재벌은 창업자와 주주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국민을 위한 경영을 해야 한다.”
―지난 대선 때 4차 산업혁명이 중요한 이슈였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한국 경제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아직은 4차 산업혁명의 실체가 모호한 것 같다.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지만 자동화, 로봇 등은 이미 존재하는 것 아닌가. 지금까지 새로운 기계가 나와서 없어진 직업이 얼마나 많나. 자본주의는 지난 250년 동안 기술혁신을 해왔다. 그에 따라 일자리가 사라지고,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 재무장했다. 구체적 형태는 달라지지만 속성은 그대로다. 이런 흐름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사실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증기기관을 이용한 1차 산업혁명, 전기·내연기관의 2차 산업혁명, 전자기술의 3차 산업혁명인데, 아직은 3차 산업혁명의 연장선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생명과학, 소재기술 등의 발달이 추가되면 완전히 다른 산업체계가 되지 않을까.”
―사회안전망으로서의 복지를 자주 말하는데, 현재 한국 복지제도의 문제와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복지가 너무 작다. OECD 평균 복지지출은 GDP의 21.5%다. 한국은 10% 조금 넘는 수준이다. 멕시코가 꼴찌고 그 바로 앞이다. 멕시코는 1인당 GDP가 우리나라 반도 안 되므로 복지지출 여력이 없다고 치더라도 한국이 이 정도인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프랑스, 스웨덴처럼 30%를 넘지는 못하더라도 미국의 19% 정도까지 늘리지 않으면 큰일난다. 옛날에는 대가족 체제여서 육아, 실업, 노후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 가족에 기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자칫 삐끗하면 바로 추락한다. 복지를 ‘퍼주기’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미국처럼 선별적 복지라면 퍼주기일 수 있지만, 유럽처럼 ‘사회복지의 공동구매’로 가야 한다.”
“미국의 경우 사보험을 포함하면 복지지출은 30%에 달해 프랑스 다음으로 많다. 그런데 그중 17%가 의료비로 나가고 있다. 타 선진국은 10~11% 수준이다. 다른 나라의 1.5~2배 수준의 의료비를 지출하면서도 선진국 중 미국의 건강지수가 최악이다. 의사·병원·제약사·보험사만 배불리는 구조다. 의료공공화를 하면 결국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오던 돈을 왼쪽 주머니에서 내는 것이다. 내 돈으로 치료를 받던 것을 세금을 더 내고 저렴하게 치료를 받는 것이다. 또한 공공화를 통해 대량구매를 하면 개별 병원이 구매하는 것보다 협상력이 생겨 약값을 깎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복지는 ‘공짜’가 아니라 ‘공구(공동구매)’다.”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제 전반에 걸쳐 가장 시급하게 또는 가장 중요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나.
“역시 복지확대가 가장 시급하다. 장기적으로는 신산업과 성장동력이 뒷받침돼야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너무 많은 국민들이 고통 속에 살기 때문에 5년 내에 효과를 보려면 복지가 필요하다. 경제민주화 또한 국민 전체의 복지 차원에서 봐야 한다. 재벌 개혁도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이 동일한 대접을 받는 것, 그것을 못하는 사회는 실패한 사회다.”
―재벌개혁의 목소리를 냈던 장하성 교수, 김상조 교수가 청와대 정책실장,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이들이 앞으로 잘할 거라고 생각하나.
“아직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체적인 정책, 방향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말씀드릴 게 없을 것 같다.”
우종국 비즈한국 기자 xyz@bizhankook.com
※이 인터뷰는 축약본으로, 비즈한국 홈페이지(장하준 교수 인터뷰① “재벌은 전 국민 위한 경영을 해야 한다” · 장하준 교수 인터뷰② “5년 내 효과 보려면 복지 강화가 답”)에 가시면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