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 공여자 유죄인 만큼 박 전 대통령 뇌물수수 혐의 유죄 나올 가능성 커
또 한 번의 롤러코스터였다.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 선고 당시 경험한 롤러코스터 판결에 시민들의 눈과 귀가 집중됐다. 다만 이번에는 생중계가 무산된 터라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속보로 전해지는 소식으로 간접 경험해야만 했다.
초반 분위기는 이재용 부회장에게 유리한 듯 돌아갔다. “이재용, 박 전 대통령 독대서 명시적 청탁했다고 볼 수 없어”, “이재용·미전실, 묵시적·간접 청탁도 인정할 수 없어”, “개별 현안에 대해 대통령-이재용 명시적 청탁 인정할 수 없어” 등의 법원 판결내용 속보가 이어진 것.
그렇지만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이재용 승계작업 관련성 인정”, “삼성합병, 이재용 지배력 강화와 관련 있다고 판단”, “박근혜 전 대통령, ‘이재용 승계 현안’ 인식했다”, “이재용 등 정유라 정권실세의 딸이라는 점 알았을 것”, “이재용, 승계작업서 박근혜 도움 기대하고 뇌물 제공” 등의 속보가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곧이어 “삼성의 코어스포츠 용역대금 모두 뇌물이라고 판단”, “삼성 승마지원 77억 중 72억 뇌물 인정” 등 혐의가 하나하나 인정되는 상황이 이어지며 관심사는 형량이 어느 정도일지에 집중됐다. 법정형이 징역 10년 이상인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특경법)상 재산국외도피 혐의도 유죄가 인정됐다는 속보가 나오면서 예상을 뛰어 넘는 무거운 형량이 선고될 가능성도 높게 제기됐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김진동)는 이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뇌물공여, 특경법상 횡령, 특경법상 재산국외도피, 범죄수익은닉 규제 및 처벌법 위반, 국회에서의 증언·감정에 관한 법률위반(위증) 등 5개 혐의를 모두 유죄가 인정됐음에도 선고된 형량은 징역 5년이었다. 재판부는 양형 사유를 설명하며 “피고인들이 적극 명시적으로 청탁하고 뇌물을 공여한 것은 아니고, 대통령의 적극적인 뇌물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한 것으로 보인다”며 “지배구조 개편이 이재용의 개인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는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도 양형에 감안했다”고 설명했다.
70억 원이 넘는 뇌물 사건에서 형량이 5년이란 게 이해 안 된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사실 판결 전부터 법조계에선 형량을 5년 정도 예상하는 이들이 많아 법리적 판단을 전제로 하고도 구형의 절반 정도를 선고하는 것이 의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판부가 모든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는 부분을 감안하면 징역 5년은 다소 낮은 양형이라는 것.
반면 한 변호사는 “개인적으론 징역 5년 정도면 적절해 보이는데 형량이 낮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오히려 피고인에게 불리한 면도 있다”면서 “극도로 실무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항소심에서 더 이상 깎을 형이 없어진 상황으로 볼 수도 있다. 차라리 전부 유죄라고 하고 중형을 선고하면 항소심 가서 일부 무죄를 받아 대폭 감형을 노려볼 수 있는데 그런 부분조차 힘들어진 게 아닌가 싶다”고 밝혔다.
관건은 이번 판결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항소심에 미칠 영향이다. 기본적으로 이번 판결이 박 전 대통령에겐 매우 불리하게 작용될 가능성이 높다. 기본적으로는 뇌물 공여자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진 만큼 박 전 대통령도 뇌물 수수 혐의에서 유죄가 나올 가능성이 커졌다. 통상적으로 뇌물공여 혐의 피고인에게 유죄가 선고되면 뇌물 수수 혐의도 인정된다. 또한 이 부회장이 적극 명시적으로 청탁하며 뇌물을 공여하지 않은 점과 대통령의 적극적인 뇌물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한 점 등이 양형 사유로 언급된 것도 박 전 대통령에게는 불리하게 작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의 1심 선고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묵시적 간접적 청탁이 유죄로 인정되지 않은 부분이다. 판결문 초반부에서 이런 부분이 언급된 터라 이번에도 ‘롤러코스터 판결’이었다는 얘기가 나오게 됐다. 법원은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과의 독대에서 개별 현안에 대해 명시적 청탁을 했다고 보지 않았으며 이 전 부회장과 미래전략실의 묵시적 간접적 청탁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재판부는 “이건희 회장 이후를 대비해 경영권 승계를 꾸준히 준비하던 이재용을 비롯한 임원들이 대통령에게 도움을 기대하며 거액의 뇌물을 제공하고 그 과정에서 삼성전자 자금을 횡령하고 재산국외도피와 범죄수익을 은닉했다”고 판단했다.
이 부회장의 변호인인 법무법인 태평양의 송우철 변호사는 선고 판결 직후 “즉시 항소하겠다”며 “유죄 선고 부분에 대해 전부 다 인정할 수 없다. 항소심에서는 반드시 공소사실 전부에 대해 무죄가 선고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법조계에선 이 부회장 측이 항소심에서 묵시적 간접적 청탁이 유죄로 인정되지 않은 부분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뇌물죄는 이제까지의 판례로 볼 때 매우 엄격하게 범죄 성립요건을 따진다. 정확한 목적을 이야기하며 청탁과 함께 금전이 오가야지만 인정돼왔다. 돈만 정기적으로 갖다 바쳐도 뇌물죄로 인정받지 못 할 만큼 까다롭다”며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의 뇌물은 경계선에 있다고 여겨진다. 정확하게 원하는 바를 서로 대화하거나 청탁하지 않았는데 법원이 뇌물로 판단했다는 게 이해 안 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묵시적 간접적 청탁이 유죄로 인정되지 않은 부분은 뇌물을 공개된 장소에서 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객관적 증거를 확인하기 힘들기 때문”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오히려 이 부회장 측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고 설명하는 변호사도 있었다. 그는 “청탁이 있다 없다로 판결났다면 피고인들도 다퉈볼 여지가 있지만 지금 남은 것은 추상적 포괄적으로 인식하고 돈을 줬다는 것인데 이런 식의 인식은 입증하기가 어렵다”며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 그리고 최순실 등이 그런 인식을 한 적이 없다는 걸 법정에서 입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1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이재용 승계 현안’을 인식했고, 이 부회장도 정유라가 정권실세의 딸이라는 점을 인식했으며 승계 작업에서 박 전 대통령의 도움을 기대하고 뇌물을 제공했다고 봤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