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쑥 큰 소년장사 어느새 “승엽이형 하이~”
이유가 있다. 홈런은 안타, 볼넷, 희생번트, 진루타, 도루를 비롯한 여러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가장 간단하게 점수를 낼 수 있는 방법이다. 공을 받아 쳐서 담장을 넘기면 저절로 1점이 생기고, 운 좋게 다른 주자가 루상에 있으면 홈으로 함께 데리고 들어올 수도 있다. 게다가 펜스를 향해 크게 날아가는 홈런 타구의 궤적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짜릿하다. 그래서 더 극적이고, 그만큼 치기 어려운 게 홈런이다.
50홈런은 그 가운데서도 ‘특급’ 홈런 타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훈장이다. 지난해까지 KBO 리그 34년 역사에서 단 세 명만이 해냈다. 이승엽, 심정수, 박병호다. 그 대열에 올해 SK 최정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2년 연속 홈런왕을 예약한 채 자신과의 싸움을 펼치고 있다.
# 최정의 50홈런 도전, 꺼지지 않은 불씨
최정은 지난해 홈런 40개를 쳐 NC 외국인 타자 에릭 테임즈(현 밀워키)와 공동 홈런왕에 올랐다. 테임즈가 없는 올해는 아예 홈런 레이스를 독주하고 있다. 2위인 윌린 로사리오(한화)와의 격차가 크다. 올해 홈런왕은 이미 떼어논 당상. 이제 관건은 50홈런 고지에 도달하느냐 마느냐다.
홈런을 치고 있는 최정. 연합뉴스
최정의 현재 홈런 수는 46개. 50홈런까지 단 4개가 남았다. 9월 21일 광주 KIA전을 마친 SK는 잔여 경기 일정상 8일간 휴식한 뒤 9월 29일 인천 롯데전부터 올 시즌 남은 3경기를 시작한다. 최정이 이 3경기에서 홈런 4개를 채울 수 있을지 이목이 쏠리고 있다.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여전히 기대감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최정이 ‘몰아치기’에 능한 유형의 타자라서다. 트레이 힐만 SK 감독이 “최정은 한 번 불이 붙었을 때 계속해서 홈런을 치는 경향이 있다”고 인정했을 정도다.
최정은 올 시즌 출전한 126경기 중 5경기에서 멀티 홈런을 때려냈다. 특히 지난 4월 8일 인천 NC전에선 시즌 2·3·4·5호 홈런을 한꺼번에 다 치면서 개막 6연패에 빠졌던 팀의 시즌 첫 승을 만들어 냈다. 한 경기 4홈런은 2000년 5월 19일 대전 한화전의 박경완과 2014년 9월 4일 목동 NC전의 박병호에 이어 역대 세 번째 기록이었다.
바로 최근에도 2경기에서 홈런 3개가 나왔다. 9월 13일 인천 KIA전에서 역전 결승 그랜드슬램을 포함해 시즌 44·45호 홈런을 동시에 때려냈고, 다음 날인 14일 잠실 두산전에서도 곧바로 46호 솔로포를 쏘아 올렸다. 2002년 SK 외국인 타자 호세 에르난데스가 남긴 45홈런을 넘어 역대 SK 타자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갈아치우는 순간이었다. 또 역시 에르난데스가 보유하고 있던 역대 KBO 리그 3루수 최다 홈런 기록도 동시에 뛰어 넘었다.
타격감도 9월 들어 상승세를 탔다. 개막 후 월간 성적이 최고를 찍었다. 8월 한 달간 홈런 두 개를 치는 데 그쳐 50홈런과 멀어지는 듯했지만, 9월에만 다시 8개를 추가해 페이스를 끌어 올렸다. 최정의 뒤에 출격하는 제이미 로맥과 정의윤을 다른 투수들이 피해가기 어렵다는 점도 호재다.
무엇보다 최정은 상대 투수 유형을 가리지 않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꾸준히 잘 치는 타자다. 이만수 전 SK 감독은 “다른 선수는 상체나 팔로 타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최정은 하체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고 고정돼 홈런을 많이 칠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최정이 SK의 간판타자를 넘어 KBO 리그 대표 홈런타자로 거듭나고 있는 비결이다.
# 홈런왕이 인정받기 시작한 시점
홈런의 가치가 높아지기 시작한 계기는 전설적인 홈런 타자 베이스 루스의 등장이었다. 이전까지 타자들은 타구가 큰 아치를 그리는 것보다 라인드라이브로 날아가 안타로 연결되는 것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루스가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으로 돌풍을 일으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루스는 원래 왼손투수였지만, 타격에서도 재능이 뛰어났다. 1918년에는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면서 11개의 홈런을 쳤고, 이듬해 외야수로 전향한 뒤 29홈런으로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작성했다. 다른 팀 전체 홈런수보다 많은 숫자였다. 배트를 길게 잡고 크게 돌리는 전형적인 홈런 스윙을 드물게 시도한 타자이기도 했다.
루스의 홈런 수는 1920년 54개, 1921년 59개로 무섭게 늘어났다. 동시에 다른 구단에서도 본격적으로 홈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각 팀의 홈런수가 비로소 루스의 개인 홈런수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홈런은 팬들의 시선을 야구장에 붙잡아 놓는 대표적인 매개체가 됐다. 루스의 홈런쇼를 보기 위해 연일 수많은 관중이 야구장으로 몰려들었다.
1998년 벌어진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의 홈런왕 경쟁도 파업 여파로 시들해지던 메이저리그 인기에 다시 불을 붙인 ‘사건’이었다. 훗날 둘의 기록이 금지 약물 의혹으로 얼룩지기는 했지만, 당시만 해도 맥과이어와 소사의 엎치락뒤치락 홈런 경쟁에 전 세계 야구팬이 열광했다. 둘은 로저 매리스가 보유하고 있던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 홈런(61개) 기록을 나란히 넘어 시즌 막바지까지 한 치의 양보 없는 홈런왕 싸움을 이어갔다. 결국 70홈런 고지를 밟은 맥과이어가 66개에 그친(?) 소사를 이겼다. 이듬해 결과도 다르지 않았다. 맥과이어가 홈런 65개를 날려 63홈런의 소사를 제쳤다. 그 사이 메이저리그는 다시 미국 최고 인기 스포츠로 발돋움했다. 홈런과 홈런왕 경쟁의 위력이 그 정도였다.
# 이승엽과 심정수, 50홈런 타자의 상징
한국에서도 맥과이어와 소사의 라이벌전에 버금가는 역사적인 홈런왕 레이스가 한 차례 펼쳐졌다. 유일하게 50홈런 타자가 두 명 탄생한 2003 시즌이었다. 삼성 이승엽과 현대 심정수가 그 주인공이다.
2003년 당시의 홈런왕 경쟁을 벌였던 심정수와 이승엽. 일요신문 DB
2002시즌은 1년 뒤 펼쳐질 50홈런 레이스의 전초전이었다. 이승엽과 심정수의 홈런왕 경쟁에 마침내 불이 붙었다. 심정수가 차근차근 홈런 수를 하나씩 쌓아 올리면, 뒤처졌던 이승엽이 몰아치기로 다시 추월하는 양상이 반복됐다. 결국 이승엽이 홈런 47개를 때려내면서 46개를 친 심정수에 단 하나 차이로 왕좌에 올랐다.
2003년은 진짜 ‘홈런의 제왕’을 가리는 하이라이트였다. 이승엽이 몰아치고 심정수가 꾸준히 치는 페이스는 비슷했지만, 상황은 반대였다. 먼저 앞서나간 이승엽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심정수가 차근차근 추격하는 모양새였다. 선의의 경쟁 속에 두 타자가 모두 50홈런을 돌파하면서 이제 관심은 ‘한국 홈런왕’을 넘어 ‘아시아 홈런왕’이 누가 될 것인지에 쏠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승자는 이승엽이었다. 이승엽은 시즌 최종전에서 끝내 56호 홈런을 터트리는 데 성공하면서 당시 아시아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작성했다. 반면 심정수는 홈런 53개에서 마침표를 찍어 3개 차로 다시 데뷔 첫 홈런왕을 놓쳤다. 홈런왕만큼 치열했던 타점왕 경쟁에서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이승엽이 144타점, 심정수가 142타점을 각각 기록해 심정수가 아쉬운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아름다운 패자’가 된 심정수 역시 충분한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두 선수가 서로에게 최고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한 덕분에 동반 50홈런과 140타점 돌파가 가능했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엽은 최고의 2003시즌을 보낸 뒤 일본으로 진출했고, ‘라이언 킹’과 ‘헤라클레스’의 명승부도 그렇게 막을 내렸다. 대신 심정수는 그해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면서 ‘개인전’에서 패한 아쉬움을 ‘단체전’에서 털어냈다.
# 또 다른 50홈런의 상징이 된 박병호
2003년 이승엽과 심정수 이후 맥이 끊겼던 50홈런 타자는 11년이 더 지난 2014년에야 새로 탄생했다. 당시 넥센 소속이던 박병호(현 미네소타)다. 야구팬들은 전설적 홈런왕 경쟁 이후 모처럼 나타난 50홈런 타자에 열광했다. 박병호는 5월 한 달 동안에만 무려 홈런 14개를 터트리는 등 1년 내내 홈런으로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그리고 그해 9월 14일 사직 롯데전에서 마침내 시즌 50호 홈런과 51호 홈런을 연타석으로 터트리면서 새로운 50홈런 타자의 위용을 뽐냈다.
박병호는 이승엽보다는 심정수의 유형에 가까운 타자였다. 50홈런을 칠 당시의 이승엽과 키, 가슴둘레, 팔뚝둘레, 허벅지둘레를 비롯한 체격 조건은 거의 비슷하지만 체중이 22kg가량 더 많았다. 이승엽이 1kg에 육박하는 배트를 들고 원심력을 이용해 타구를 기술적으로 담장 밖으로 넘겼다면, 타고난 파워에서 앞서는 박병호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890g짜리 배트를 쓰면서도 빠른 배트스피드를 이용해 타구에 힘을 효과적으로 싣는 스타일이었다. 벼락같이 날아간 박병호의 홈런 타구는 특히 비거리가 길었다. 130m 이상 날아간 홈런이 적지 않았고, 평균 비거리가 125m에 육박했을 정도다.
이미 학창시절부터 ‘힘’으로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 영남중 재학 시절 이미 목동구장에서 홈런을 친 선수로 유명했다. 대한야구협회 관계자가 “목동에서 홈런을 친 중학생 선수는 김동주(전 두산)와 박병호밖에 없었다”고 증언했을 정도다. 전 소속팀이던 LG가 박병호를 지명했던 이유도 “잠실구장에서 40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를 뽑아보라”는 구단 사장의 특명 때문이었다. 박병호는 결국 넥센으로 팀을 옮긴 뒤 50홈런 타자로 성장했다.
유일한 아쉬움은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 수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박병호는 2012년과 2013년 홈런왕과 타점왕을 2년 연속 석권하면서 정규시즌 MVP를 2연패했다. 그러나 정작 50홈런 고지를 처음 밟은 2014년에 MVP를 받지 못했다. 팀 동료인 서건창이 KBO 리그 역대 최초의 한 시즌 200안타 고지를 밟았기 때문이다.
박병호는 이듬해인 2015년에도 홈런 53개를 때려내면서 2년 연속 50홈런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역대 두 차례 50홈런을 친 선수는 이승엽과 박병호뿐. 확실한 이승엽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NC 테임즈가 KBO 리그 역대 최초로 40홈런-40도루 클럽 가입에 성공하는 불운이 겹쳤다. 접전 끝에 정규시즌 MVP는 테임즈가 가져갔다. 박병호는 그렇게 두 차례 50홈런과 4년 연속 홈런-타점왕 석권의 영광을 남기고 2016년 미국으로 떠났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메이저리그도 올 시즌 홈런 열풍…‘몬스터’ 스탠튼 60호 넘본다 144경기를 치르는 한국에선 최정(SK)이 50홈런에 도전장을 던졌다. 162경기를 소화하는 메이저리그에선 지안카를로 스탠튼(마이애미)이 60홈런을 넘보고 있다. 스탠튼은 그야말로 ‘괴물’ 타자다.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 불어 닥친 홈런 열풍을 앞장서 이끌고 있다. 2010년 20세의 젊은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할 때부터 화제를 모았다. 키가 198cm에 달하는 데다 체중도 100kg을 훌쩍 넘었다. 신체적 조건이 뛰어난 선수들이 모여 있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스탠튼의 거대한 체격은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몸집이 크니 파워도 압도적이었다. 스탯캐스트에서 집계하는 타구 속도 1위에 늘 스탠튼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한 시즌 최다 홈런 수가 2012년의 37개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의아할 정도였다. 2014시즌을 마치고 마이애미와 13년간 3억 2500만 달러라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 규모 계약에 성공했지만, 이후 2년간 30홈런도 넘기지 못하면서 아쉬움도 남겼다. 지안카를로 스탠튼. 중계 화면 캡처. 그러나 올해는 다르다. 명성과 몸값에 걸맞은 홈런쇼를 펼치고 있다. 8월 11일부터 15일까지 5경기 연속 홈런을 터트리면서 데뷔 최초로 40홈런을 돌파했고, 마이애미 소속 타자 한 시즌 최다 홈런과 최다 연속 경기 홈런 기록을 모두 갈아 치웠다. 이뿐 아니다. 8월 한 달 간 홈런 18개를 몰아치면서 50홈런 고지까지 단숨에 밟았다. 단연 메이저리그 홈런 전체 1위. 2위가 범접할 수 없는 개수다. 엄청난 페이스다. 스탠튼 혼자만 홈런 퍼레이드를 펼치는 것도 아니다. 올 시즌 메이저리그 전체가 홈런 풍년이다. 마침내 새 역사도 세웠다. 9월 20일 캔자스시티 외야수 알렉스 고든이 토론토전에서 8회 솔로 아치를 그리면서 올 시즌 리그 5694번째 홈런을 만들어 냈다. 이 홈런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역대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 새로 쓰여 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존 최다 기록이었던 2000년은 메이저리그 역사에 ‘약물의 시대’로 남아 있다. 새미 소사(50개), 배리 본즈(49개), 제프 베그웰(47개), 트로이 글라우스(47개) 등이 홈런 레이스를 주도하면서 40홈런 타자 16명을 배출하고 총 5693개의 홈런이 터진 시즌이다. 그러나 소사와 본즈를 비롯한 일부 타자들이 스테로이드성 금지 약물에 손을 댔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이 시대의 홈런 기록은 진정한 위업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2017년은 그 이후 메이저리그가 홈런으로 가장 달아오른 시즌이다. 야구 인기도 그만큼 뜨겁다. 내셔널리그에 스탠튼이 있다면 아메리칸리그에서는 뉴욕 양키스의 ‘특급 신인’ 애런 저지가 역대 신인 최다 기록을 다시 쓰면서 홈런 태풍에 동참하고 있다. 저지는 마리아노 리베라와 데릭 지터의 은퇴 이후 새로운 간판스타가 필요했던 양키스에 단비와도 같은 존재다. 확실히 홈런에는 야구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마력이 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