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연속 삼진 양준혁 ‘광현아, 살살 좀 하지…’
지역 연고가 뿌리 깊은 한국에서는 아직 시기상조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대상이 이승엽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 프로야구 타격의 역사를 새로 쓰고 떠나는 이승엽을 위해 KBO와 10개 구단이 팔을 걷어 붙였다. 소속팀 삼성은 물론 나머지 9개 구단도 흔쾌히 은퇴 투어 개최에 합의했다. 지난 8월 11일 대전 한화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은퇴 투어가 시작됐고, 8월 18일에는 수원에서 kt가 은퇴 투어 행사를 열었다. 그 다음에는 8월 23일 고척스카이돔에서 넥센이 준비하는 행사가 기다리고 있다. KBO 리그의 남은 한 달이 이승엽이라는 전설의 이름으로 들썩거릴 시기다.
# 이승엽과 이호준의 은퇴, 은퇴식 문화의 변화
한화는 수많은 레전드 스타를 배출한 구단이다. 영구 결번도 전 구단 가운데 가장 많다. 한때 ‘은퇴식 전문 구단’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은퇴식 관련 노하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한화도 이번 이승엽 은퇴 투어 행사를 앞두고는 고민이 많았다. 아직 한국에선 전례가 없어서다. 한화 한 관계자는 “다른 구단에 벤치마킹할 만한 사례가 없었던 탓에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며 “우리 팀이 앞으로 다른 팀의 행사 준비에 기준이 될 수 있어서 더 신중했다”고 귀띔했다. 당사자인 이승엽이 화려한 은퇴 행사를 정중히 고사한 점도 고려했다. “너무 과하면 이승엽 선수가 부담을 느낄 수 있고, 너무 약소하면 이승엽 선수의 격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레전드 송진우가 함께한 한화의 이승엽 은퇴투어 행사. 연합뉴스
결국 모범 답안을 찾았다. 한국 야구의 미래가 될 어린이 팬들과의 작별에 초점을 맞췄다. 이승엽 스스로 원한 부분이기도 하다. 한화 키즈클럽 어린이 36명을 대상으로 사인회를 열었다. 또 구단이 준비한 소나무 분재, 이승엽의 등번호와 좌우명이 적힌 기록 현판, 선수들이 응원 메시지를 담아 직접 준비한 베이스를 선물로 전달했다.
무엇보다 역대 최다승 투수 송진우를 초대해 이승엽과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송진우는 현역 통산 210승을 올려 KBO 리그 역사상 단 한 명뿐인 200승 투수로 남아 있다. 또 유일하게 통산 3000이닝을 돌파(3003이닝)한 전설적 투수였다. 그 스스로가 레전드였던 송진우는 이승엽의 은퇴 투어 개최를 반겼다. “국민 타자의 은퇴 투어를 첫 번째로 함께하게 돼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라고 했다. 또 “미국에서는 이미 종종 해왔던 행사다. 우리 프로야구가 메이저리그에 비해 역사는 길지 않지만, 각 구단이 신경을 많이 써줘서 이승엽 선수가 은퇴 투어를 할 수 있는 것 같다”며 “이승엽은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선수다. 우리 프로야구 문화가 더 앞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 같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이승엽의 은퇴 투어는 같은 해 은퇴를 선언한 NC 이호준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이호준 역시 이승엽과 마찬가지로 올 시즌을 앞두고 “1년만 더 선수 생활을 하겠다”고 예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에게도 올해가 현역 마지막 시즌이다. 그런 이호준을 위해 KIA는 8월 16일 광주 경기에 앞서 이벤트를 마련했다. 김기태 KIA 감독과 주장 김주찬이 꽃다발을 전달했고, 구장 전광판에는 ‘처음 그리고 마지막’ ‘제2의 인생을 응원합니다’라는 문구가 등장했다. 이유가 있다. 이호준은 광주제일고를 졸업하고 1994년 고졸 신인으로 해태에 입단했다. KIA는 이호준에게 고향팀이자 친정팀이다.
그보다 앞선 8월 9일 인천 SK전에서도 이호준의 은퇴를 기념하는 깜짝 이벤트가 열렸다. 이호준은 2000년부터 2012년까지 SK 유니폼을 입었다. 프로 생활의 최고 전성기를 SK에서 보냈다. 그는 고별사를 통해 “이런 이벤트가 준비됐는지 몰랐는데 감사하다. 문학구장에서 10여 년 동안 정말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어 감사했다”고 인사했다. 이호준과 인연이 없는 팀들도 그랬다. 이호준이 잠실에서 두산을 상대로 마지막 경기를 치른 지난 13일 두산도 양 팀 선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은퇴 기념 꽃다발을 전달하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야구계는 이런 장면을 지켜보며 달라진 은퇴 문화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SK의 이호준 은퇴 행사. 연합뉴스
사실 과거에는 은퇴식에 앞서 ‘은퇴 경기’까지 치르는 선수도 적지 않았다. 물론 은퇴 경기는 은퇴식보다 더 누리기 어려운 영광이었다. 은퇴식 날 그 선수가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선다는 것은 여전히 팀의 ‘1군 엔트리’ 한 자리를 지킬 만한 존재였다는 의미에서다.
역대 최초 공식 은퇴 경기 선수는 OB 윤동균이었다. 1989년 8월 17일 잠실 롯데전에 지명 타자로 나와 3타수 1안타 1타점을 기록하고 은퇴했다. LG 정삼흠은 1996년 9월 15일 잠실 롯데전에 선발 등판해 5이닝을 던지며 은퇴를 기념했다. 결과는 1실점. 그러나 타선 지원을 받지 못해 은퇴 등판에서 통산 121번째 패전을 추가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 외 다른 선수들도 은퇴 경기에서는 큰 재미를 못 봤다. 2003년 한화 강석천과 2004년 LG 유지현은 은퇴경기에서 각각 1타수 무안타, 2타수 무안타에 그쳤고, 한화 장종훈도 2005년 대전 KIA전에 지명 타자로 선발 출장했다가 삼진과 땅볼로 돌아섰다. 한화 이상군도 2001년 은퇴 경기에서 한 타자를 상대로 안타를 내주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쌍방울 김광림이 1999년 10월 5일 전주 LG전에 대타로 나와 안타를 때려냈을 뿐이다.
‘200승 투수’ 송진우의 은퇴 경기는 다른 의미에서 명장면을 남겼다. 2009년 9월 23일 대전 LG전 마운드에 올라 한 타자를 상대한 뒤 무사 1루서 당시 한화 에이스이던 류현진에게 공을 넘겨주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한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왼손 에이스가 배턴을 주고받는 모습에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경기는 이듬해 예기치 못한 일로 화제에 올랐다. 류현진이 이듬해 29연속 경기 퀄리티스타트라는 비공인 대기록 행진을 벌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 기록은 2009년 8월 19일 대전 삼성전부터 시작됐지만, 송진우의 은퇴 경기에선 1회 무사 1루서 마운드에 오른 탓에 기록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8⅓이닝 2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됐기에 더 아까웠다. 류현진의 기록 숫자가 늘어날수록 이 등판은 더 자주 농담의 소재가 됐다. 한화 관계자는 당시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느냐”며 웃기도 했다.
삼성 양준혁의 은퇴 경기도 기억할 만했다. 그는 지금은 사라진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2010년 9월 19일 SK를 상대로 마지막 전력질주를 했다. 이날 양준혁이 마지막으로 만난 선발 투수는 SK 김광현이었다. 둘 사이에는 기막힌 인연이 있다. 김광현은 프로 데뷔전이었던 2007년 4월 10일 문학 삼성전에서 4회 양준혁에게 우중월 선제 솔로홈런을 맞았다. 데뷔 첫 홈런이자 첫 실점을 허용한 뒤 와르르 무너졌다. 3이닝 8안타 2탈삼진 4실점으로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그 후 3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 김광현은 양준혁의 은퇴식 상대 투수가 됐다. 첫 타석에 나선 양준혁을 향해 김광현은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시속 151km 강속구를 던졌다. 양준혁은 김광현에게 1회 3구 삼진에 이어 4회와 6회까지 3연타석 삼진을 당했다. 김광현은 경기 후 “최선을 다해서 던지는 게 은퇴하시는 양준혁 선배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양준혁 역시 당시에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승부해줘서 고마웠다”고 했다. 그러나 훗날 한 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김광현이 죽자고 전력투구를 하는 모습에 배신감마저 들었다”고 털어 놓으며 껄껄 웃기도 했다.
다만 최근에는 은퇴 선수들이 은퇴 경기를 스스로 고사하는 분위기다. 자신의 한 경기를 위해 1군 엔트리 한 자리를 빼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2009년 한화에 영구결번을 남기고 은퇴한 정민철은 “은퇴 경기를 치러 주겠다”는 구단의 제안에 “나 때문에 후배 한 명이 2군으로 내려가 열흘을 보내는 것은 원치 않는다. 은퇴식으로 충분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2014년 은퇴한 롯데 조성환 역시 같은 이유로 은퇴 경기를 마다하고 은퇴식만 치렀다. 이 때문에 일본 프로야구에선 은퇴 선수가 1군 등록 없이도 마지막 경기에 출전할 수 있게 하는 이른바 ‘은퇴 특례’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은퇴 전 마지막 경기에 한해 1군 엔트리에 등록하지 않고도 출장할 수 있는 규정이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병마와 싸운 철마’ 루 게릭 역사적 은퇴식 “지금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루 게릭. 풀 네임은 헨리 루이스 게릭이다. 그는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 뉴욕 양키스의 캡틴이자 주전 내야수였다. 1923년 양키스에 입단한 뒤 팀의 중심 타자로 활약했다. 보스턴에서 이적한 베이브 루스와 콤비를 이루면서 최초로 ‘살인 타선’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역사적인 선수였다. ‘철마(The Iron Horse)’로 불렸다. 1925년부터 14년 동안 무려 2130경기에 연속 출전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1995년 칼 립켄 주니어가 이 기록을 경신할 때까지 56년간 깨지지 않았던 숫자다. 1926년부터 1937년까지 12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하는 한편 40홈런을 친 시즌도 다섯 번이나 됐다. 정교함과 파워를 모두 갖췄다. 루 게릭. 연합뉴스 그런 루 게릭의 은퇴식이 그해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렸다. 여전히 메이저리그 역사에 가장 감동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병마와 싸우는 ‘철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무려 6만 1808명의 관중이 양키스타디움에 들어찼다. 당시 양키스 감독이던 조 매카시와 ‘살인 타선’의 주축이었던 베이브 루스가 대표로 연설을 했다. 특히 매카시는 “루 게릭은 지금까지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스포츠 선수이자 자랑스러운 시민의 모범 사례였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나에게 ‘더 이상 경기에 출전하지 않겠다’는 말을 할 수가 있느냐”며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루 게릭의 마지막 연설도 역사에 남을 만했다. “팬 여러분은 지난 2주 동안 제가 앓고 있는 병에 대해 들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야구장에서 17년이나 뛰었고 팬 여러분들로부터 다정한 격려를 받았다”고 고마워했다. 또 자신의 은퇴식에 참석한 동료들을 향해 일일이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말을 이어갔다. “이길 수만 있다면 오른팔을 잘라내도 아깝지 않을 우리 팀 양키스는 물론, 우리의 라이벌인 뉴욕 자이언츠도 선물을 보내줬다. 정말 대단한 일이다. 하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트로피(양키스가 그의 등번호와 은퇴 헌정시를 새겨서 제작한 은퇴 선물)와 함께 기억한다면 의미 있는 일이다. 당신에게 가족이 있다면 그것도 최고의 일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고통스러운 질병을 앓고 있지만,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 말씀드린다.” 루 게릭은 은퇴식에서 구단 고위 간부부터 야구장 관리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건넨 수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팔에 힘이 없어 곧 땅에 내려놓아야 했다. 이미 병이 상당히 진행된 뒤였다. 연설을 끝내고 마이크를 내려놓으며 심하게 휘청거리는 게릭을 향해 6만 관중이 모두 일어나 2분간 박수를 보냈다. 그들이 “우리 모두 당신을 사랑한다”는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는 베이브 루스가 루 게릭을 힘껏 포옹했다. 이날 양키스는 루 게릭의 등번호 4번을 메이저리그 역사상 첫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은퇴식이 있던 다음날 뉴욕 타임스는 “6만 1808명의 관중들이 한 선수에게 작별을 고하는 이 행사는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가슴 찡한 장면을 남겼다”고 썼다. 시즌이 종료된 뒤에는 전미야구기자협회가 루 게릭을 최초로 유예기간 없이 곧바로 명예의 전당에 입회시켰다. 36세의 역대 최연소 명예의 전당 헌액자가 나왔다. 은퇴식 후 루 게릭에게는 수십억 달러를 제시하는 강연 요청과 행사 참석 섭외가 잇따랐다. 그러나 그는 그 제안을 모두 거절한 채 뉴욕시 가석방위원회 감독관으로 봉사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41년 마흔도 채 되지 않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그 병은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라는 복잡한 이름 대신 ‘루 게릭 병’이라 불리게 됐다. 양키스타디움에 있는 루 게릭 기념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여기 한 남자가 있었다. 예의 바른 신사였다. 2130경기 연속출장 기록을 세운 이 위대한 선수는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