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피해자의 처벌의사 중요…딸 가진 판사 엄하게 선고하는 경향도
B 양이 A 씨를 다시 본 것은 10년이 훌쩍 넘은 뒤였다. 지난해 3월 대구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A 씨를 발견한 것. B 양은 고모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5월, A 씨를 고소했다.
결국 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 혐의 등으로 기소된 A 씨. 그는 “B 양을 내연녀와 만날 때 함께 본 것은 맞지만 신체접촉은 없었다, 내 성기 모양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B 양이 허위로 사실을 만들어 무고했다”고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유죄’였다. 법원은 “B 양이 과거 A 씨가 운행하던 버스를 타고 다닌 기억을 바탕으로 당시 버스 관련 정보를 기억하고 있던 점, 12년 만에 우연히 마주친 A 씨를 무고하기 위해 수치스럽고 충격적인 범죄 피해 사실을 허위로 꾸며내거나 과장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을 감안할 때 성폭행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징역 8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2. 아내와 이혼한 후 홀로 딸을 키우곤 있던 C 씨.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8세 딸 D 양을 키웠지만, 술에 취하면 친딸 앞에서도 욕정을 서슴지 않았다. 작은 방에서 자고 있던 딸에게 다가간 C 씨는 “이제 다 컸나, 딸 다 컸나?”라고 말하며 딸의 가슴을 만졌다.
술에 취하면 딸에게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던 C 씨. 그럴 때마다 D 양은 고등학생이던 사촌오빠 E 씨의 집에 갔지만, E 씨도 C 씨만큼 ‘악마’였다. “엄마아빠 놀이를 하자”며 옷을 벗긴 뒤 “부부는 이렇게 한다”며 강간을 시도한 것. 강간은 실패했지만 D 양은 평생 가슴에 상처를 입었다.
D 양이 성인이 된 뒤, 12년 만에 재판에 넘겨진 C 씨와 E 씨. 이들은 재판에서 “애정 표현이었다, 위력으로 추행이나 강간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친부 C 씨에게 징역 1년 6개월, 사촌오빠 E 씨에게는 징역 3년을 선고했다.
#3. 17세의 F 군은 지난해 4월, 여자친구인 16세 G 양과 만난 자리에서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다. 더 이상 G 양과 성관계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F 군은 G 양의 손을 잡고 공원의 남자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거부하는 G 양의 의사는 무시한 채 강제로 간음했다.
결국 청소년성보호에관한법률위반(위계등간음)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F 군. 범행을 모두 자백했지만, 법원은 “어린 나이의 피해자를 간음한 것은 죄책이 가볍지 않다”며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위의 세 가지 사례는 모두 ▲미성년자를 향한 성범죄인 점, ▲거부하는 피해자를 한 차례 간음하거나 강간을 시도했다는 점이 같다. 하지만 징역 3년에서 8년까지, 형량 차이가 왜 많이 나는 것일까. 법원 관계자들은 피해자의 나이(미성년 여부)도 중요하지만, 가장 큰 양형 사유는 피해자와의 합의 여부라고 입을 모은다.
지난 2013년부터 성범죄를 친고죄(범죄의 피해자 또는 기타 법률이 정한 자의 고소·고발이 있어야 공소할 수 있다는 것)로 정한 형법 조항이 삭제됐지만, 여전히 ‘피해자의 처벌 의사가 있느냐‘가 가장 양형에 중요한 판단을 미친다는 점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과거 합의만 하면 재판이 중단돼, 처벌을 하지 않았던 분위기가 아직 법정에 남아 있는 게 사실”이라며 “성범죄 피고인이 피해자랑 합의를 하면 가급적이면 실형을 내리지 않는 쪽으로 선고를 한다”고 털어놨다. 그는 “양쪽 다 술에 취해 발생한 우발적 강간, 간음 사건일 경우 판단을 하기가 정말 쉽지 않다”며 “범행이 벌어지는 장소가 둘밖에 없는 곳이지 않냐, 증거가 ’강간당했다‘는 피해자 주장과 ’합의하에 했다‘는 피고인 진술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사건 후 피해자, 피고인들의 행동을 보고 판단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덧붙였다.
피해자와 합의를 못할 경우에는 ’공탁‘을 활용한다. 피해자와 합의를 하기 위해 돈을 마련해 놨다면, 법원에 공탁금을 내는 것.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합의를 시도하고 있다’는 의사를 재판부에 전달해 양형에 다소라도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다.
징역 5년 이상 나오는 양형이 높은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고통이 심한 경우’가 많다는 게 법원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앞선 판사는 “미성년을 상대로 한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들의 고통이 클 뿐더러, 특별법에서 정한 기본 양형이 높기 때문에 처벌 수위가 높을 수밖에 없다”며 “그 외에는 범행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오랜 기간 지속해 고통을 줄수록 양형이 올라간다”고 말했다.
같은 범행이라도 피고인의 나이가 어릴수록 가벼운 형을 받기에 유리하다. 개선 여지가 크다고 보기 때문. 앞선 #3 사건 피고인 역시 강간죄의 권고형량은 징역 5년에서 8년이지만, 재판부는 이보다 적은 징역 3년을 선고하며 “’피고인은 범행 당시 18세로 비교적 어린 나이였고, 현재도 만 19세로 적절한 교화를 통해 사회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언론이나 네티즌들은 법원 양형이 들쭉날쭉하다고 비판하지만, ▲피해 정도 ▲피해자 처벌 의사 및 합의 여부 ▲고의·우발성 여부 ▲범행의 악의성 ▲피고인 개선 가능성 등을 고루 판단해 형을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건을 수사해 기소하는 입장의 검찰에서는 여전히 볼멘소리가 나온다. 재판부의 재량권이 너무 크기 때문에 들쭉날쭉한 양형 판단이 나오고, 그러다보니 국민법감정과 거리가 먼 양형도 발생한다는 것. 앞선 사건을 수사했던 한 검찰 관계자는 “기존 형법으로 충분히 엄하게 처벌할 수 있는데 법원에서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재판관 재량권을 이용해 권고형량보다 낮게 처벌해오다 보니 이를 막기 위해 권고형량 자체를 높인 특별법을 만들게 된 것 아니냐”며 “한 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법률이 두 개가 된 것은 낭비”라고 지적했다.
판사 출신 변호사 역시 “딸을 둔 판사를 만나면 양형이 높게 나오고 아들만 가진 판사를 만나면 양형이 상대적으로 낮아진다고 하는데, 실제로 총각 때 재판하던 때와 다르게 결혼을 하고 딸을 낳은 뒤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성범죄자들을 보면 더 분노가 차올라서 양형이 높아진다고 느낀 적이 있다”며 양형 과정에 사적인 감정이 담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렇다면 판사들의 진짜 고민은 뭘까. 판사들은 성범죄 처벌 양형만 자꾸 올라가는 것에 대한 우려감이 팽배하다. 사회적인 요구 탓에, 법원행정처 양형위원회에서는 권고형량을 올렸지만 다른 범죄는 그만큼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특수강간치상의 경우 보통의 살인 행위보다 무거운 처벌을 받도록 돼 있다. 주거침입 등 강간과 특수강간·치상의 가중영역 형량범위는 12∼16년으로, 보통 동기 살인인 10∼16년보다 형량이 세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피해자들이 충격과 공포를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만큼, 인격을 살인한다는 점에서 성범죄도 살인만큼 중한 범죄인 것은 맞지만 살인보다 양형이 더 높은 게 과연 합당한가 라는 의구심이 든다”며 “살인에 대한 양형을 올리는 고민도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서환한 기자 brigh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