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상회, 벌집 등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 ‘체험기’
일요신문 고성준 기자 = 10일 오후 서울 금천구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 전경. 2017.10.10
[일요신문] 1936년 찰리 채플린은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끊임없이 나사를 조이는 작업을 합니다. 컨베이어 벨트는 찰리에게 휴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결국 정신병이 걸린 찰리는 너트와 비슷한 모양의 사물을 무작정 조여야 하는 정신병에 걸립니다. ‘모던타임즈’는 컨베이어 벨트 장면을 통해 산업화의 영광에 가려진 노동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영화는 현실의 거울입니다. 1970~80년대 대한민국 서울에서도 가리봉동을 중심으로 영화와 같은 현실이 펼쳐집니다. 이곳의 주인공은 찰리가 아닙니다.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벌어보겠다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늦은 밤까지 파김치가 되도록 일한 여성노동자들은 구로공단에 터를 잡았습니다. 전 세계가 찬사를 보낸 ‘한강의 기적’ 속엔 이른바 ‘공순이’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일요신문i>는 구로공단 ‘여공’들의 흔적을 찾아 나섰습니다. 가리봉동은 멈추지 않는 라인 앞에서 쏟아지는 졸음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손으로 꼬집었던 수많은 여공들의 땀과 눈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중에서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금천 순이의 집(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은 여공들의 열악한 생활상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체험관입니다.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 전경. 고성준 기자
10월 10일 기자는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을 찾았습니다. 1970~80년대의 생생한 노동현장을 담은 현장사진과 신문과 구로공단 여성 노동자들의 주거시설인 ‘벌집’이 있는 공간입니다.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에 기여한 여공들의 공로를 미래 세대에 전할 목적으로 설립됐습니다.
벌집 설계도. 고성준 기자
체험관 2층 기획전시실에 들어선 순간 여공들이 살았던 ‘벌집’의 설계도가 보였습니다. 저렴한 사글세를 감당하기 힘들었던 여공들은 두 평 남짓한 쪽방에서 5~6명이 살았습니다.
벌집 사진. 고성준 기자
쪽방은 빨간 벽돌이 벌집 모양처럼 붙어 있는 50~100평 넓이의 주택입니다. 넓은 공간처럼 보이지만 빨간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면 쪽방 수십 개가 등장했습니다.
디오라마 사진. 고성준 기자
8개의 디오라마는 쪽방의 모습을 세밀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생활 체험관 관계자는 “당시 여기서 일했던 노동자의 80% 이상이 여성이었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온 분이 많았지만 공장 기숙사는 10명 중 7명 정도밖에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공장 근처 벌집에서 쪽방살이를 시작한 이유입니다”라고 전했습니다.
기획전시관 사진. 고성준 기자.
왼쪽 위편의 사진이 보이시나요? 명절 때가 되면 여공들은 월급봉투를 들고 ‘고향 앞으로’ 귀향버스를 줄지어 기다렸습니다. 명절은 격무를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가운데 사진은 구로공단 1단지 기공식 당시 노동자들이 운집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기획전시관 사진
가운데에 있는 대우어패럴 노동자의 모습이 보이시나요? ‘구로동맹파업’은 노동 운동의 전기를 마련한 사건입니다. 1985년 6월 24일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은 당시 미싱사로 일하던 심상정 등의 주도로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선일섬유,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등 등 구로공단의 많은 노동조합이 파업에 동참했습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수출업체는 여름에 겨울옷을 만드는데 먼지가 너무 많아 선풍기도 틀지 못하게 했습니다. 12살 정도의 시다들은 어리광 부릴 나이에 산업체 특별학교가 끝나면 쉬지도 못하고 프레스로 카라를 고열에 넣고 빼는 일을 했습니다. 잠깐이라도 졸면 손을 넣었다가 빼지 못해 오징어처럼 눌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구로공단파업은 그해 6월 29일까지 6일간 계속됐습니다. 물과 전기가 끊긴 상태에서 굶주린 채로 버틴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작업장 벽을 뚫고 들어온 경찰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했습니다.
순이네 방 전경. 고성준 기자
기획전시관에는 순이의 방, 희망의 방, 공동세면장, 비밀의 방이 있습니다. 먼저 순이네방입니다. 여공들은 화학약품 냄새와 뿌연 먼지가 가득한 작업장에서 12시간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쪽방에서 칼잠을 잤습니다. 비키니 옷장과 어지러이 걸려있는 옷들 속에서 여공들의 애환이 느껴졌습니다.
공동세면장. 고성준 기자
기자는 순이네방에서 추리닝으로 옷을 갈아입고 공동세면장으로 향했습니다. 잠시라도 그 때 그 시절, 여공의 일상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아침 5시 반, 졸린 눈을 비비며 쪽방을 나온 여공들은 공동세면장을 이용했습니다. 약 50명이 넘는 여공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공동세면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모형 연탄(좌)과 본지 기자가 연탄 갈이를 하는 모습. 고성준 기자
여공들은 연탄불로 데운 물로 5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세수를 했야 했습니다. 화장실은 운이 좋아야 갈 수 있었습니다. 단 두 개 밖에 없는 공용화장실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일상이었습니다.
희망의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본지 기자. 고성준 기자
고된 삶이었지만 여공들은 희망의 방에서 꿈을 꿨습니다. 피곤함이 몰려와 잠이 쏟아져도 ‘야학’을 이어가면서 미래를 그렸습니다. 방직기계의 소음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에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훗날 야학은 노동운동과 민주화의 중추 세력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비밀의 방 전경. 고성준 기자
비밀의 방은 구로동맹파업과 노동운동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장소입니다. 1970년대 구로공단의 노동운동은 임금인상을 비롯한 노동 조건의 개선, 조합 결성 등의 요구가 중심을 이뤘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유신정권의 붕괴 이후 어용 노조 퇴진, 노조 민주화 등 더욱 적극적인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가리봉상회 전경. 고성준 기자
노동자 생활 체험관 옆 건물에는 ‘가리봉상회’가 있습니다. 가리봉상회는 1960~80년대 추억의 먹거리를 볼 수 있도록 재현한 곳입니다. 고된 노동에 시달린 여공들은 가리봉상회를 허기를 달래면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가리봉 상회 내부 전경. 고성준 기자
가리봉상회에는 X파치, X기차 콘 등 추억의 불량식품이 가득했습니다. 고무줄과 축구게임은 물론 황제 아리랑 등 ‘그 때 그 시절’을 풍미했던 담배들도 보였습니다.
추억의 달고나(좌)와 딱지. 고성준 기자
‘달고나’ 국자가 보이시나요? 1980년대 당시 뽑기 장수는 달고나를 만들어 모양을 찍어 뽑기 과자를 팔았습니다.
벌집촌 전경. 고성준 기자
기자는 지하 1층에 있는 쪽방 재현관으로 향했습니다. ‘벌집’들이 보이시나요? 1970~80년대 당시 구로 1단지와 2단지를 가르는 공단로 양쪽에는 벌집 닭장집이라고 불린 다가구주택이 많았습니다. 가리봉동에만 1779개(1982년 통계)동이 몰려 있었는데 전체 벌집의 64%였다고 전해집니다.
패션방 내부 전경. 고성준 기자
쪽방 재현관은 패션방 공부방 문화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패션방 벽면엔 오래된 패션 잡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옷걸이에는 가방이 걸려 있고 부엌 쪽에는 하이힐, 예쁜구두 등 온갖 신발이 널려 있었습니다. 여공들의 생활상이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패션방 앞 신발. 고성준 기자
공부방에는 교과서, 잡지, 소설등 오래된 책들이 많았습니다. 지치고 또 지쳐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은 여공들의 열정이 느껴지는 방입니다.
공부방에서 공부하는 본지기자(좌)와 서적. 고성준 기자
수십년이 흐른 지금, 구로구 가리봉동 일대는 마리오아울렛 등 고층 빌딩이 즐비합니다. 가리봉동은 산업화시대 수출 한국의 제1 전선이었지만 점차 디지털시대 벤처산업 밀집 지역으로 진화했습니다.
마리오 아울렛 신관 전경(연합뉴스)과 구로공단 역사 기념 굴뚝(고성준 기자)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난 장소인 마리오아울렛 앞에는 구로공단의 역사성을 기억하기 위한 굴뚝 세 개가 세워져 있습니다. 관리자들의 앙칼진 잔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낸 노동자들을 기념하기 위한 조형물입니다.
열여섯에서 스무살까지 4년동안 구로공단 여공으로 살았던 작가 신경숙씨는 소설 ‘외딴방’에서 이같이 밝혔습니다.
“거기였다. 서른일곱 개의 방 중의 한, 우리들의 외딴방…. 왜 내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방을 생각하면 한없이 외졌다는 생각, 외로운 곳에, 우리들, 거기서 외따로이 살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인지….”
구로공단 벌집 소녀들의 눈물과 땀이 담긴 역사를 결코 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