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 무대 오른 파나마...그들의 기적은 이미 준비된 기적이었다
2018월드컵 북중미 조별예선 코스타리카와의 최종전에서 골을 기록한 파나마의 토레즈 선수. 파나마는 이 경기를 잡으며 미국을 밀어내고 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지었다. 사진=연합뉴스
[일요신문]축구는 참 묘한 놈입니다. 축구는 참 단순합니다. 거두절미하고 공 하나를 두고 서로 엉켜 상대 골문에 차 넣기만 하면 됩니다. 그 공에 전 세계 사람들이 열광합니다. 특히 나라와 나라가 맞붙는 국가대항전은 전쟁을 방불케 합니다. 혹자는 축구를 ‘민족주의’와 가장 잘 결합된 스포츠라 분석하기도 합니다.
그 정점이 월드컵입니다. 월드컵 본선 행 티켓 한 장 때문에 온 나라가 울고 웃습니다. 각 대표팀의 경기 결과와 성적은 그 나라 정치와 사회 문제 만큼이나 중요한 시사 문제로 다뤄집니다. 당장 월드컵 본선 행을 확정 지었지만, 기대 이하의 경기력으로 질타를 받고 있는 우리 대표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전 세계에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단 한 번이라도 밟아본 나라가 지난 월드컵까지 딱 78개국(분리 독립 후 처녀 출전국 포함)이란 사실을. 피파 가입국이 208개국인 것을 감안한다면, 전 세계 국가 중에선 아직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지 못한 국가가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월드컵이 얼마나 소중한 무대인가를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1년 앞으로 다가온 2018 러시아 월드컵에도 본선 행을 확정 지은 국가 중 처녀 출전국들이 있습니다. 바로 유럽의 소국 아이슬란드와 북중미의 파나마입니다.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있어서 아이슬란드는 이미 지난 2016 유로 대회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한 파나마 대표팀 선수가 ‘파나마와 러시아 월드컵’이 새겨진 기념 티셔츠를 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변방에 자리한 북중미의 파나마는 한마디로 세계 축구계에서 ‘듣보잡’이나 다름없습니다. 최근 지구 반대편에서 전해진 파나마의 월드컵 본선 행 확정 소식은 쇼킹한 뉴스 중 하나였습니다.
더군다나 북중미는 전통적인 강호 내지는 다크호스로 분류되는 멕시코, 미국, 코스타리카 3국의 독무대였습니다. 파나마는 이번에 단골손님 미국을 밀어내고 지역예선 3위로 당당히 본선 행 티켓을 거머쥐었습니다.
자국의 월드컵 본선행에 열광하는 파나마 축구팬들. 사진=연합뉴스
특히 10월 11일 열린 마지막 경기는 백미 중 백미 였습니다. 코스타리카와 최종전 직전까지 4위에 머물렀던 파나마는 선제골을 내주고 끌려 다니다 경기 막판 내리 두 골을 성공시키며 역전에 성공했습니다. 반면 최종전 직전 3위였던 미국은 최약체 트리니다드 토바고에 1-2로 분패하면서 다 잡았던 본선 행 티켓을 파나마에게 내주게 됐습니다.
파나마 야구의 상징 마리아노 리베라. 파나마의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야구다.
사실 파나마는 ‘야구의 나라’입니다. 북중미 대륙에 속한 중미 국가 중 니카라과와 함께 야구에 살고 야구에 죽는 나라로 유명합니다. 자체 프로리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많은 메이저리거들을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메이저리그 최다 세이브(652세이브)를 기록하며 뉴욕양키즈의 전설로 추앙받는 마리아노 리베라가 바로 파나마 출신입니다. 파나마 야구 대표팀은 과거 야구 월드컵에서 자주 4강권에 오른 강팀이기도 합니다.
그런 ‘야구의 나라’ 파나마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입니다. 공교롭게도 파나마 축구 발전의 단초를 마련한 것은 미국의 프로축구(메이저리그사커_MLS)입니다. 이번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파나마가 그런 미국을 제치고 올라섰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북중미의 강호 미국은 파나마에 밀려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파나마 축구의 근간은 미국의 MLS와도 무관치 않다. 사진=연합뉴스
MLS는 2000년대 들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리그입니다. 아직 미국의 기존 4대 스포츠(야구, 농구, 미식축구, 아이스하키)에 비할 바는 안 되지만 자국 대표팀의 선전, 새로운 스포츠 시장으로서의 잠재적 가능성 탓에 자본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데이비드 베컴, 안드레아 피를로, 다비드 비야, 디디에 드록바, 프랑크 람파드 등 슈퍼스타들이 MLS에서 선수생활을 경험했거나 현역으로 활동 중입니다.
이러한 MLS의 발전에 가까운 중남미 국가들의 자원 역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파나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파나마의 젊은 자원들이 MLS의 부름을 받아 자국 대표팀의 근간을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근간으로 파나마는 지난 2003년 U-20월드컵 첫 진출을 시작으로 지난 2015년 대회까지 본선무대에 연속으로 올랐습니다. 이러한 젊은 자원들의 성장은 곧바로 성인 무대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파나마 대표팀의 심장으로 일컬어지는 블라스 페레즈(좌)와 루이스 테하다(우) 선수.
파나마의 두 슈퍼스타가 등장한 것도 이 때 즈음입니다. 바로 팀의 두 포워드 블라스 페레즈(36)와 루이스 테하라(35)입니다. 2001년에 나란히 A매치에 데뷔한 두 선수는 각각 133경기 42골, 98경기 43골을 기록하며 현재까지도 파나마의 공격을 이끌고 있습니다. 어느덧 은퇴를 바라보고 있는 두 백전노장은 그라운드를 떠나기 전 ‘월드컵’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셈입니다.
사상 처음으로 준우승을 차지했던 2005년 골드컵 당시 파나마 대표팀 멤버들. 출처=www.panamericanworld.com
파나마가 실제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2005년 골드컵 무대입니다. 골드컵은 북중미 메이저 지역대회입니다. 이전까지 파나마는 골드컵 본선무대를 밟은 적이 딱 두 번(1963,1993) 밖에 없습니다. 그마저도 조별예선 광속 탈락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MLS에 진출한 유망주들의 활약, U-20월드컵 본선무대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성장한 파나마는 전혀 다른 팀이 됐습니다. 2005년 골드컵에서 파나마는 사상 처음으로 조별예선 통과는 물론 파죽지세로 결승전까지 올랐습니다. 결승에서 개최국 미국에 석패했지만, 골드컵에서 그들이 기록한 ‘준우승’ 성적은 기적에 가까웠습니다.
파나마의 깜짝 준우승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파나마는 이후 개최된 골드컵에 모두 본선에 올랐으며 최소한 8강 이상의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2011년 대회와 2013년 대회에는 각각 4강과 준우승을 기록하며 ‘파나마’는 더 이상 북중미의 약체가 아닌 강호가 됐음을 단단히 증명했습니다. 미국에서 열린 ‘2016 코파 아메리카’에 처음 출전한 파나마는 비록 조별예선에서 탈락했지만, 남미의 다크호스 볼리비아를 2-1로 잡아내며 1승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파나마를 월드컵 본선 무대로 이끈 에르난 다리오 고메즈 감독. 사진=연합뉴스
어쩌면 파나마의 이번 동화 같은 기적은 준비된 기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1998년 월드컵 무대에 처음 오른 크로아티아는 4강이란 기적을 쏘아 올렸습니다. 역시 처음 월드컵 무대에 데뷔하는 파나마...그들은 본선에서 또 다른 기적을 쏘아 올릴 수 있을까요? 지켜볼 대목입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