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 위’ 일본과 ‘한 수 아래’ 대만 사이에 낀 한국 이번 대회서 능력과 한계 실감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은 올해 신설된 대회다. 지난해 5월 KBO의 제안으로 창설 논의가 시작됐고, 3개국 프로야구 협회가 모여 “2013년을 끝으로 중단된 아시아시리즈를 대체할 국가대항전을 만들자”는 취지에 공감했다. 그러나 각 리그 우승팀끼리 겨루던 아시아시리즈와 달리 이번 대회는 국가대표팀이 참가하는 국가대항전으로 치러졌다. 단 24세 이하 또는 프로 입단 3년차 이하 선수로 참가 자격에 제한을 뒀다. 차세대 국가대표 주전으로 활약할 만한 선수들을 발굴하고, 이들에게 국가대항전을 경험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세 국가는 이 대회에서 각자의 능력과 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한 수 아래’ 대만은 왜 ‘숙적’이 됐나?
한국, 일본, 대만은 오랜 시간 야구로 질긴 인연을 맺어왔다. 특히 객관적인 전력 면에서 가운데에 위치한 한국은 ‘한 수 위’ 일본과 ‘한 수 아래’ 대만 사이에서 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해야 했다. ‘라이벌’이라는 관계는 무척 신비하다. 한국은 늘 일본과 만날 때마다 실력 이상의 경기를 펼쳤고, 대만 역시 한국만 만나면 기량 이상의 경기력을 보여줬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도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두 배로 긴장했다. 일본과 대만 양국이 모두 “한국은 무조건 꺾는다”는 출사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 공식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나바 아쓰노리 일본대표팀 감독, 훙이중 대만대표팀 감독, 선동열 감독. 연합뉴스
국제무대에서 한국과 일본의 ‘숙적’ 관계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순간마다 장군과 멍군을 주고받으며 팽팽한 라이벌전을 펼쳤다. 그러나 대만은 한국이 드러내 놓고 ‘라이벌’이라 표현하지 않았을 뿐, 늘 빼놓지 않고 신경 써야 하는 ‘난적’으로 여겨졌다.
한국은 프로 선수가 참가하기 시작한 1998 방콕아시안게임부터 올해 초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까지 대만과 총 36경기를 치러 23승13패(승률 0.639)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 프로 최정예 멤버가 참가한 국가대표 경기로 범위를 좁히면 17경기 15승 2패(승률 0.882)가 된다. 압도적인 승률을 자랑한다. 특히 2007 베이징올림픽 최종예선 이후에는 9연승을 달렸다.
그러나 대만전을 앞두고 한국 선수단은 늘 긴장한다. 몇 안 되는 패배가 한국에게 큰 충격을 안겨서다. 특히 2003년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한국은 예선 1차전에서 대만을 만나 연장 10회 접전 끝에 4-5로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그 결과 2004 아테네 올림픽 티켓을 놓쳤다. 또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예선에서 대만에 2-4로 패하면서 금메달 전선에 이상이 생겼다. 두 대회는 한국 야구 국가대표 역사에서 ‘참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끝내 승리로 이어지긴 했어도 내용상 진땀을 흘린 경기도 많았다. 특히 프로 선수들의 병역 대체 복무 혜택이 걸린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주로 그랬다. 한국은 1998년 방콕 대회와 2002년 부산 대회 결승전에서 대만을 상대로 1점 차 힘겨운 승리를 따냈다. 안방에서 열린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결승에서도 마찬가지. 경기는 6-3으로 끝났지만 7회까지 2-3으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심지어 7회에는 무사 만루 위기를 무실점으로 간신히 막고 넘어가기도 했다. 8회초 역전 드라마가 펼쳐지지 않았다면 금메달이 날아갈 뻔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선 1회 7점을 뽑고도 6회 8-8 동점을 허용하며 망연자실하기도 했다. 결국 9-8 한 점 차로 겨우 이겼다.
대만은 기본적으로 ‘타도 한국’을 외친다. 한국이 “한일전에서는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된다”는 각오로 일본과 맞선다면, 대만이 한국을 상대로 비슷한 마음을 품는다. 이번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에서도 한국은 대만에 1-0으로 신승했다. 한 방이 있는 국가라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을 때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승부였다.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에서 우승한 일본대표팀이 이나바 감독을 헹가래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전력 차 실감한 일본전, 희망 찾은 이유는?
일본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아시아 프로야구 최강국이다. 한국과 첫 경기에선 예상 외로 마운드가 무너지면서 8-7로 겨우 이겼지만, 결승전에선 투타 모두 비교할 수 없는 우위를 뽐냈다. 일본 대표팀 에이스라 여겼던 이마나가 쇼타를 피했는데도 결승전에 나온 다구치 가즈토의 칼 같은 제구력에 꼼짝도 못했다. 투지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전력 차가 확연했다.
선동열 한국 야구대표팀 감독은 “선수들이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지만, 결승전이 현재 한국 야구의 냉정한 현실이라는 점은 알아야 한다”며 “선수들도 경기를 치르면서 깨달은 부분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소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다만 한국에게는 확실한 ‘명분’이 존재했다. 결승전에서의 선수기용이 한국 대표팀의 참가 목적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한국은 불펜 필승조 대신 예선 두 경기에 등판하지 않았던 심재민, 김명신, 김대현을 줄줄이 내보냈다. 일본전 첫 경기에서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긴 김윤동과 구창모도 다시 마운드에 올라 만회할 기회를 얻었다. 승부가 기운 9회에는 장승현이 마지막 포수로 마스크를 썼다. 대표팀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선수 25명이 모두 출전 기록을 남겼다.
선 감독은 대회 기간 내내 수십 차례 ‘경험’의 중요성을 주창했다. 3개국 가운데 유일하게 와일드카드를 쓰지 않았다. 대만은 가장 먼저 천관위(27) 천위신(28) 양다이강(30)과 같은 베테랑 선수들을 와일드카드로 뽑았다. 일본도 당초 계획을 바꿔 투수 마타요시 가쓰키(27) 포수 가이 다쿠야(25) 내야수 야마카와 호타카(26)를 대표팀에 포함시켰다. 그래도 선동열 감독은 “우리 젊은 선수들 가운데 도쿄돔을 경험해본 선수가 한 명도 없다. 젊은 선수들에게 한 번이라도 더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낫다”고 와일드카드 포기를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양국은 와일드카드 덕을 톡톡히 봤다. 일본은 마무리 투수와 주전 포수 그리고 4번 타자가 모두 와일드카드였다. 어깨가 좋은 포수 가이는 ‘기동력’을 팀 컬러로 내세운 한국 선수들의 발을 묶었고, 4번 야마카와는 한국과 첫 경기서 1-4 스코어를 3-4로 좁히는 2점 홈런을 때려냈다. 대만은 아예 와일드카드 천관위를 한국전 표적 선발로 내세웠다. 천관위는 5⅔이닝 1실점으로 한국 타선을 괴롭혔다.
반면 한국은 오로지 대회 취지에 맞는 선수들로만 팀을 구성했다. 특히 투수진은 선발부터 마무리까지 모두 국가대표를 처음 경험하는 선수들로 채웠다. 결과는 ‘일본전 2패’로 끝났지만 태극마크에 대한 의욕과 자부심에 가득 찬 선수들을 보면서 큰 희망을 얻었다. 선 감독은 “선수들의 열정에 비해 마지막 경기 결과가 좋지 않아 아쉽다”고 했다.
반면 일본은 결승전에서 이기기 위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다. 선발 다구치가 7회까지 던졌고, 한 점을 뽑기 위한 작전도 시도했다. 이나바 다쓰노리 일본 대표팀 감독은 “2년 전 프리미어12 결승전에서 역전패한 기억을 되살렸다. 어떻게 해서든 점수를 내려 했다”며 “마지막까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다”고 했다.
3개국 가운데 최강 전력을 자랑하는 일본이 와일드카드를 모두 사용한 데 대해서도 “이기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설명했다. “이번엔 꼭 이기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래서 이기는 팀을 구성해야 했다. ‘사무라이 재팬’이라는 이름을 달게 된 이상, 승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애초에 한국와 일본은 대회에 참가한 목적이 달랐던 셈이다. 일본과의 기량 차이를 실감한 가운데서도 한국이 희망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다.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 한국과 대만의 경기에서 대만 대표팀 선발 천관위가 공을 던지고 있다. 연합뉴스
# 대만 야구 성장을 경계하라
물론 대만 야구의 성장은 확실히 염두에 둬야 할 부분이다. 한국은 타격전을 예상했던 대만과 의외의 투수전을 펼쳤다. 대만은 오랜 시간 한국에 “투수력과 수비가 약하고 타격의 정교함이 떨어지는 대신 큰 것 한 방이 있는 팀”이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대만에 대한 전력분석 역시 “중심 타선의 화력을 경계해야 한다”는 쪽에 모아졌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 보니 대만 마운드는 이전에 예상했던 것보다 높았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을 상대로도 경기 중반까지 팽팽하게 버텼다.
특히 한국전에 자주 등판한 에이스 천관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뽐냈다. 한국은 천관위가 내려간 뒤에도 왕홍청, 펑스잉, 왕야오린을 상대로 2⅓이닝 동안 안타 1개와 볼넷 2개를 얻어내는 데 그쳤다. 선동열 감독과 대표팀 코칭스태프는 “대만의 투수력이 이 정도로 좋아졌는가”라고 놀라워했다.
물론 아직은 한국과 일본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홍이중 대만 대표팀 감독은 “준비가 부족하고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대만도 전력을 다해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려고 한다”며 “선수들에게 ‘이번 대회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달라’고 주문했다”고 했다.
대만 언론도 ‘2패’라는 결과에는 실망감을 표현했다. 다만 대만 리그 최강인 라미고 선수들(홀드 1위 왕야오린, 세이브1위 천위쉰, 2년 연속 4할 타자 왕보룽)과 일본에서 뛰고 있는 양다이강, 한국전 선발 천관위의 활약에서 희망을 찾았다. 라미고는 올해 대만 시리즈에서 중신을 4승 1패로 가볍게 꺾고 우승한 팀이다. 최근 4년간 세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지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는 라미고 선수들이 참가하지 않아 대만 전력이 유독 약했다는 분석이 나왔을 정도다. 이나바 일본 대표팀 감독이 직접 라미고의 경기를 보러 갔을 정도로 대만 대표팀 전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만 선수들 스스로도 “앞으로 더 성장해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대만 대표팀 최고참이자 주포였던 양다이강은 대회가 끝난 뒤 자신의 SNS에 남긴 글에서 “이번 대회에선 한국 선수단과 격차가 크지 않았지만, 한국이 와일드카드를 사용했다면 훨씬 강해졌을 것”이라며 “만족하지 말고 2020년을 바라보자”는 메시지를 던졌다.
어차피 세 국가의 최종 목표는 2020년 도쿄 올림픽이다.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은 올림픽을 준비하는 전초전에 불과하다. 3년 뒤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릴 한국, 일본, 대만은 이번 대회에서 미래 야구 국가대표팀의 방향성과 현실을 엿봤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도쿄올림픽까지…선동열과 이나바 ‘3년 전쟁’ 시작 선동열(54)과 이나바 아쓰노리(45). 앞으로 3년간 한국과 일본 언론에 수없이 함께 오르내릴 이름들이다. 두 감독은 최근 일본 도쿄에서 끝난 2017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에서 국가대표 사령탑으로 첫 맞대결을 펼쳤다. 두 감독 모두에게 국가대표 감독 데뷔전이자 첫 한일전이었다. 선 감독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한국 야구 사상 첫 국가대표 전임 사령탑으로 선임됐다. 24세 이하 또는 프로 3년차 이하 선수들이 출전하는 이 대회를 시작으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2019 프리미어12, 2020 도쿄 올림픽까지 야구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는다. 선 감독은 삼성과 KIA 사령탑 시절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로 유명했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 투수라는 화려한 경력이 그 권위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3년 만에 다시 현장 지휘봉을 잡은 그에게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선 감독과 대표팀에서 처음 만난 코치들과 선수들은 “감독님이 외부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온화하다”고 입을 모았다. 프로야구 레전드 출신들로 코칭스태프를 꾸릴 때, 선 감독이 가장 강조한 부분도 ‘소통’이었다. 선수들에게 채찍질하기보다 눈높이를 맞춰 격려하는 쪽을 택했다. 일본 대표팀 훈련을 지켜보고 있는 이나바 아쓰노리 감독. 연합뉴스 이나바 감독 역시 올해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전임 감독으로 새로 뽑혀 도쿄 올림픽까지 ‘사무라이 재팬’을 이끌게 된다. 고쿠보 히로키 전 감독이 2015 프리미어12와 2017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우승에 실패한 뒤 일본 야구의 ‘구원 투수’로 낙점됐다. 이나바 감독은 이를 의식한 듯 ‘어떤 야구를 하겠느냐’는 일본 취재진 질문에 “이기는 야구”라고 외쳤다. 실제로 각국의 ‘미래’를 점검하는 이번 대회에서도 승리를 향한 열망을 드러냈다. 두 감독은 과거 일본에서 현역 생활을 함께했다. 선 감독이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주니치 마무리 투수로 활약한 덕분이다. 이나바 감독은 1995년 야쿠르트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주니치와 야쿠르트는 모두 센트럴리그 소속이다. 각 팀 주축 선수였던 두 감독이 맞대결할 기회가 적지 않았다. 선 감독은 “그때 이나바 감독이 내 공을 아주 잘 쳤다. 빠른 공을 잘 치는 스타일이었다”고 웃으며 “콘택트 능력이 좋으면서도 중장거리 타구도 잘 쳤다”고 떠올렸다. 또 “공수주에 모두 능했던 선수로 기억한다”며 “선수들과 우애도 깊은 선수였다고 들었다. 그때부터 리더십이 있는 선수였다. 나중에 주장도 오래 했다”고 설명했다. 이나바 감독도 선 감독의 명성을 잘 알고 있다. 일본 언론과 인터뷰에서 “예전에 선동열 감독과 맞붙은 기억이 난다”며 “정말 강한 공을 던지는 투수였다. 타자를 압도했던 두려운 투수였다”고 회상했다. 공식 기자회견에서 “선동열 감독이 대표팀을 맡았으니 투수 쪽 능력이 많이 강화됐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덕담도 했다. 선 감독과 이나바 감독은 2015년 프리미어12에서도 각각 한국과 일본 더그아웃을 지켰다. 선 감독은 한국 투수코치, 이나바 감독은 일본 타격코치였다. 2017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에도 둘 다 코치로 합류했지만, 한국이 1라운드에서 탈락하면서 일본과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3년간 감독으로 서로 창을 겨눌 사이가 된 것이다. 한국과 일본 모두 도쿄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한다. 마지막 올림픽인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 일본을 두 차례나 꺾고 금메달을 딴 한국은 12년 만에 재개되는 올림픽 야구 금메달을 다시 가져오고 싶다. 안방에서 올림픽을 치르는 일본은 당연히 그때의 굴욕을 되갚고 아시아 야구 정상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선 감독과 이나바 감독의 어깨에 걸린 기대가 그만큼 무겁다. 2019 프리미어12에서 최정예 전력을 이끌고 다시 만나게 될 두 감독은 또 어떤 승부를 펼칠까.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