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은 통크게, 질타는 엄하게…관중 넘어 감독 역할까지
이 사태는 아이돌이 점령한 가요계에서 한층 견고해진 팬덤의 힘을 보여준 것이라 볼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해당 쿠션을 불순한 의도(?)로 활용하려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굿즈 중 하나로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팬들이 먼저 나서서 지지하는 그룹의 이미지를 보호하기 위한 집단행동 조짐을 보이자 소속사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한 가요계 관계자는 “아이돌을 유지시키는 근간이 바로 팬덤이다. 이는 과거 개별적으로 좋아하는 스타를 좇던 팬 문화와는 확연히 다르다”며 “정보 유통이 빠르고 집단화도 용이하기 때문에 소속사나 스타 역시 팬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바야흐로 팬이 스타의 위상을 결정하는 시대가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문제가 된 여자친구 굿즈
# 스타의 위상을 바꾸는 팬덤
지난 12월 초 미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뉴욕의 타임스퀘어 광장에는 국내 팬들에게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한 대형 전광판에 Mnet <프로듀스 101 시즌2>가 배출한 보이그룹 워너원의 멤버 강다니엘의 모습이 담긴 광고가 송출됐다. 이는 12월 10일 강다니엘의 생일을 앞두고 팬들이 준비한 특별한 이벤트였다. 세계에서 가장 광고단가가 비싸다고 알려진 타임스퀘어에는 무려 일주일 동안 강다니엘이 등장하는 광고가 노출됐다.
이 광고는 주한미국대사관까지 주목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광고가 처음 등장한 다음날인 12월 5일 공식 SNS에 이 광고 영상에 대해 언급하며 “역대급 생일 축하 선물”이라고 적었다.
뉴욕의 타임스퀘어 광장에 등장한 워너원의 멤버 강다니엘의 모습이 담긴 광고를 언급한 주한미국대사관 트위터.
가장 큰 한류시장이라 불리는 중국에서도 ‘통 큰’ 팬들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중국판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후 일약 스타덤에 오른 가수 황치열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가 지난 6월 발매한 첫 미니앨범 <비 오디너리(Be ordinary)>는 지난해 11월까지 21만 9622장(가온차트 기준)이 팔려 2017년 앨범을 발표한 솔로 가수 중 최다 판매량을 기록했다.
황치열 열풍을 주도한 이들은 중국 팬덤이었다. 황치열을 응원하는 중국 팬들은 그의 생일인 12월 3일을 약 1주일 앞둔 11월 28일 앨범 8만 장을 한꺼번에 구매했다. 그 금액만 약 9억 원이었다. 황치열의 앨범을 한꺼번에 사들인 팬들은 구매 영수증을 찍은 ‘인증샷’을 SNS에 공개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 스타 솎아내는 팬덤
팬들이 스타를 무조건 추종하고 옹호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듯, 과거에는 스타의 부적절한 처신에 실망한 팬들이 먼저 마음을 접었다. 하지만 요즘은 반대다. 팬들이 ‘탈덕’(지지를 거둬들인다는 뜻)하는 대신 문제를 일으킨 스타에게 당당히 ‘탈퇴’를 요구한다.
지난해 장수 아이돌그룹 슈퍼주니어의 대표적인 팬커뮤니티인 디씨인사이드는 멤버 성민과 강인의 퇴출을 요구한 바 있다. 음주운전과 폭행 사건에 잇따라 휘말린 강인에게 “팀을 떠나라”고 외친 데 이어, 팬들을 기만했다는 눈총을 받은 성민을 향해서도 “슈퍼주니어 갤러리는 더이상 이성민의 팬 기만행위와 팀을 고려치 않은 독단적 행동을 지켜볼 수 없다. 이성민 퇴출을 요구한다”고 외쳤다.
그룹 아이콘의 경우는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보이콧을 선언했다. 아이콘의 국내 활동보다 국외 활동에 치중하고 활동 계획 등을 번복해 팬들을 기만했다는 이유로 YG에서 판매하는 모든 아이콘 관련 굿즈의 불매 운동을 하겠다는 입장을 냈다.
원조 아이돌 그룹 HOT의 멤버 문희준 역시 팬들의 질타를 받았다. HOT 시절부터 가장 끈끈하고 절대적인 지지 의사를 밝혔던 것으로 유명한 문희준의 팬들은 그가 성의 없이 콘서트를 진행하고 HOT 재결합과 관련해 경솔한 언행을 반복하며, 아내인 가수 소율의 혼전 임신 사실 등을 두고 거짓말을 한 것으로 원성을 샀다. 이외에도 보이그룹 비스트의 전 멤버였던 장현승 역시 무성의한 무대를 보이고 불성실한 태도로 팬들이 등 돌리게 만들었다.
팬들이 지지하던 스타를 공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또 다른 멤버와 그룹을 지키기 위해서다. 여러 멤버로 이뤄진 그룹은 특정 멤버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전체가 활동을 하지 못하거나 해체 위기에 직면하기도 한다. 또 다른 가요계 관계자는 “사회적으로 큰 잘못을 저지른 스타들의 퇴출 사례가 늘면서 팬들은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스타들을 먼저 떼놓고 가자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며 “팬덤이 아이돌 그룹을 지탱하는 원천인 만큼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못하지만, 소속사 입장에서는 팬들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커지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