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판도라 상자 열려…“추가 확인해야” 다수 찬성론에 “이쯤에서 봉합” 소수 목소리
전체 판사 가운데 10%도 채 안 되는 대법원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는 판사들은 ‘원래 행정처 역할이 그런 것이다. 납득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하지만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없는 90% 이상의 판사들 대부분은 ‘어떻게 대법원이 판사 개개인의 성향을 확인할 수 있냐’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자연스레 ‘분위기를 추스르기 위해서라도 대법원이 나서 추가로 더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출근길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번이 첫 조사는 아니었다. 대법원은 지난해 4월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 지시로 1차례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를 꾸렸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은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부장판사)를 만들면서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는 두 차례 조사를 받았다. 결론은 비슷했다. 이인복 전 대법관이 진행했던 1차 조사위원회와 민중기 고등부장판사가 맡았던 2차 조사위원회 모두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2차 조사위원회는 ‘새로운 의혹이 있다‘며 ’여지’를 남겼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 당시 법원행정처가 재판장의 동향을 파악한 내용이 있었다고 공개한 것. 또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회의 의장에 출마한 판사 성향을 분석하거나, 현직 판사들이 비밀리에 운영해 온 포털 사이트 카페 내용을 보고한 정황도 2차 조사위 조사 결과 드러났다.
사건을 잘 알고 있는 법조계 관계자는 “앞서 1년 동안에는 ‘리스트 존재 여부’가 유일한 관건이었다면, 이번에는 리스트 존재 여부가 아니라 다른 의혹들도 함께 제기됐다”며 “추가로 열린 판도라의 상자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전체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고 귀띔했다.
일부 법원행정처 출신 판사들은 ‘원래 업무가 그랬다’고 설명한다. “개별 재판부의 개성을 존중해 돌아가는 것이고, 당시 대법원이 추진하던 상고법원 도입과 관련, 대법원과 다른 입장을 가진 판사들이 누구인지 확인하려 한 수준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실제로 인사 등의 불이익이 있거나, 제재는 없었다는 것.
당시 대법원이 추진하던 상고법원 제도를 놓고, 청와대의 도움이 절실했던 상황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행정처 출신 판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가 필요했던 상황에서, 우병우 수석이 이끌던 민정수석실을 통해 분위기를 알아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며 “공개된 내용들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 법원행정처는 미리 결과를 몰랐지 않냐”라며 “먼저 자료를 건넨 적도 없고 재판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명백히 드러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판사들은 이번 조사 결과를 놓고 ‘처음 알았다’는 반응이다. 법원에서 20년 넘게 재직한 한 판사는 “법원행정처로부터 주요 재판을 진행할 때 한 번도 개입을 받은 적은 없다”면서도 “이번 결과를 놓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몸담은 조직이 이처럼 성향을 확인하고 분석했다는 데 놀랐다”고 속상함을 털어놨다. 행정처 출신의 판사 역시 “사실 재판에 관여하지 않는 선에서 어떤 스타일의 판사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판사들이 활동하던 카페까지 조사를 한 것을 보고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대부분의 판사들이 납득하지 못하다보니 법원이 시끄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어쩔 수 없지 않냐, 지금은 추가 조사밖에 답이 없어 보인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역시 이 같은 분위기가 팽배한 점을 감안, 추가 조사와 조직 개혁을 진행하겠다는 방침이다. 후속 인사 조치도 단행했다. 법원행정처 조직 개혁을 위한 인적 물갈이의 신호탄으로 김소영 법원행정처장을 대법관으로 복귀시키기로 결정했다. 김소영 처장 후임으로는 안철상 대법관을 임명했다. 김 처장은 임종헌 전 차장의 PC 제출에 거부한 것에 대한 책임성 인사로 풀이되는데, 이번 결정으로 김소영 법원행정처장은 7개월 만에 처장 직을 내려놓게 됐다.
이제 관심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를 얼마만큼 구체적으로 조사할 것인지 여부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관련 동향 보고의 정점에 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조사할 것인지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구체적인 답은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라며 조사 가능성만 암시했다. 또 암호 파일 조사가 이뤄질 것인지에 대해선 “나중에 기구와 긴밀히 의논하겠다”고 말해 기구를 꾸리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도 피력했다.
추가 조사에서는 앞선 두 차례 위원회들이 열지 못한 700건이 넘는 각종 암호 파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컴퓨터 등을 조사할 것으로 보인다. 임종헌 전 차장의 컴퓨터는 아직 공개된 적이 없다. 따라서 3차 조사에선 임 전 차장 PC가 조사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법관 13명 전원이 성명을 내는 등 파장을 일으킨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항소심 재판부 동향 파악, 대법원 정책 비판 판사들 성향 파악 등의 배경도 조사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 상황에서는 최선의 조치라고 하지만 후폭풍도 적지 않다. 행정부, 입법부와 함께 독립된 삼권인 사법부 스스로가 ‘정치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는 양심 선언을 한 셈이기 때문. 그동안 이런 의견을 공개적으로 피력했다가 제재를 받아왔던 일부 판사들의 ‘목소리’도 거세지고 있다. 지방의 한 부장판사는 원세훈 전 원장의 정치 개입 1심 판결과 관련해 비판적인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혔다가 징계를 받은 김동진 인천지법 부장판사(사법연수원 25기)에 대한 당시 징계를 취소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다.
법원 게시판에서 의견 다툼도 벌어졌다. 판사들끼리 구체적으로 실명을 거론하며 일련의 과정에 대해 잘잘못을 지적한 것. 해당 글은 26일 오전 현재 삭제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놓고 “기구를 자꾸 만들기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봉합하는 게 필요할 것 같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법조인은 “스스로 정의롭게 나아겠다고 선언한 것일 수는 있어도, 사법부는 독립된 삼권의 한 축“이라며 ”법원 스스로가 앞선 법원의 권위를 부정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법원의 권위도 함께 무너진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앞선 대법원장들과 달리 청와대, 국회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법리로만 판단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서환한 기자 bright@ilyo.co.kr
검찰, 법원 수사 착수?…‘칼’ 뽑을 가능성 낮아 예상된 흐름대로 흘러가고 있다. 시민단체는 법관대표회의 내 ‘법관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소위원회 조사발표 관련, 의혹이 제기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 재판부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을 추가로 고발했다. 이미 지난해 6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 전 법원행청처장, 임종헌 전 차장 등 전현직 법관들이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고발된 상태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실제 수사 가능성은 낮다’고 입을 모은다. 검찰이 ‘법원’을 건드리는 게 부담스럽고, 김명수 대법원장이 ‘우리끼리 해결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당초 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1차장검사 산하 형사1부(부장검사 홍승욱)에 배당했다가 최근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 산하 공공형사수사부(부장검사 김성훈)에 재배당했다. 때문에 재배당 발표 초기만 하더라도 검찰이 제대로 수사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은 검찰의 사건 재배당 이후 ‘내부기구’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김 원장은 법원 내부망에 올린 글에서 “필요한 범위에서 조사결과를 보완하고 공정한 관점에서 조치방향을 논의해 제시할 수 있는 기구를 조속히 구성하겠다”며 “법원 스스로의 힘으로 이번 사안이 여기까지 밝혀졌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를 통해 검찰에게 ‘수사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셈이다. 이를 인지한 검찰 역시 한 발 뒤로 빠지는 모양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본격적인 수사 착수는 아니며 향후 관련 사건의 진행 추이를 지켜보면서 수사 진행 여부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는데, 이를 놓고 해당부서 관계자는 “법원 수사를 하기에는 지금 적폐 수사 등 할 것도 많고 무엇보다 법원을 수사하려면 정부 차원의 판단이 필요한데 행정부가 사법부를 건드리는 모양새라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재배당 역시 법조계 인맥 때문일 뿐, 본격 수사 착수가 아니라는 설명도 나온다. 원래 사건이 배당됐던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를 지휘하는 1차장검사(윤대진 차장검사)의 부인 최은주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가 이번 블랙리스트 사건의 법원 추가 진상 조사위원이었기 때문. 한 법조인은 “구속영장 실질심사 결과부터, 주요 사건 재판 결과까지 검찰이 법원의 치부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돌려받을 후폭풍이 너무 크다”며 “법원 스스로가 ‘잘못한 A만 처벌해달라’고 하지 않는 한, 검찰이 법원을 수사할 일은 없다고 봐도 된다”고 설명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