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총액 비공개 심사받지만 미·영은 ‘투명한 감시’ 과정 거쳐
지난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 취임식에서 박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함께 걸어나오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문고리 3인방으로 불렸던 안봉근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과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은 매월 1억 원가량의 국정원 특활비를 수수한 혐의로 지난해 11월 3일 구속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은 자신들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선을 그었지만 검찰은 지난 2월 5일 이 전 대통령의 집사인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도 같은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검찰은 김 전 기획관을 재판에 넘기면서 뇌물수수 ‘방조범’이라고 표현했고, 주범은 이 전 대통령이라고 명시했다.
특활비는 국정원뿐만 아니라 국방부, 검찰, 경찰 등에서도 사용한다. 1년에 배정되는 전체 기관 특활비가 8000억 원가량인데 이 중 국정원은 절반이 넘는 4000억 원가량을 배정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정원은 정보기관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특활비 배정에 있어 여러 가지 특혜를 받고 있다. 다른 부처들의 경우에는 전체 예산에서 1% 내외를 특활비로 배정받지만 국정원은 예산 전체가 특활비다.
사무용품 구입비나 일반 경비까지도 모두 특활비로 처리된다는 것이다. 예산 심사 과정에서도 일반 부처는 기획재정부에 구체적인 예산안을 내고 국회 상임위와 예결위에서 심사를 받지만 국정원은 총액만 제출한 후 국회 정보위에서 한 번만 비공개로 심사를 받는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선 국정원 직원이 받는 급여 내역조차도 비밀이다. 지난 2009년 국정원 직원이 이혼하는 과정에서 부인은 정확한 재산분할을 위해 남편의 현금급여 및 월초수당을 밝혀달라고 법원에 요구했지만 대법원은 “국정원의 현금급여 및 월초수당 등에 관한 정보가 비공개대상정보에 해당한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청와대 역시 매년 200억 원가량의 특활비가 배정되지만 굳이 국정원의 특활비를 가져다 쓴 것은 이 같은 국정원의 특수성 때문이다. 청와대를 비롯한 다른 기관은 특활비 대부분의 용처가 이미 정해져 있고 감시도 받지만 국정원 특활비는 다른 용도로 쓰는 데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전직 국정원 직원은 “최소한 김영삼 정부 시절까지는 국정원 특활비를 청와대나 검찰, 경찰, 법무부 등 각 기관에 나눠주는 것은 관행이었다. 매년 어느 기관에는 얼마를 줘야 한다는 항목이 미리 다 짜여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국정원 돈 끌어 쓰기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에는 있었으나 김대중 대통령 때는 안 받았다”고 주장했다. 박 의원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께서 ‘어떠한 경우에도 산하 연관기관에서 일체 돈 받지 마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지낸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과거 일요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최소한 제가 원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던 시절에는 특활비든 어떤 예산이든 국정원에서 청와대에 돈을 보낸 적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김 전 원장은 “청와대로부터 특활비를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도 없었고, 줘야 한다는 규정도 없었다. 준 것이 사실이라면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앞서의 전직 국정원 직원은 “정말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국정원이 특활비를 다른 기관에 배분하는 관행이 없어졌다면 그만큼 국정원 예산이 줄었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없다. 김대중, 노무현 시절에도 관행이 이어졌거나 다른 기관으로 가야 할 특활비를 누군가 착복한 것은 아닌지 의심 된다”면서 “청와대 외에도 국정원 자금이 정치권에 유입되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는 청와대가 국정원 돈을 끌어다 정치권에 뿌리는 일이 공공연하게 있었다. 문민정부 등장 이후에도 국정원 자금이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간 사실이 몇 차례 확인된 바 있었다. 2001년 대검 중수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 차남 김홍업 씨를 수사할 때 임동원, 신건 전 국정원장이 총 3500만 원을 김 씨에게 줬던 사실이 밝혀졌다. 국정원장들은 ‘개인 돈으로 떡값을 준 것’이라고 해명했고 검찰은 이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2004년에는 권노갑 전 의원에게 국정원 수표가 일부 흘러들어간 것으로 드러났지만 역시 수사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국정원 직원들은 특활비를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을까. 전직 직원은 “국정원 직원은 활동비 명목으로 매달 정해진 금액을 받고 특활비는 추가로 따로 받는다. 예를 들어 정부에 비판적인 어떤 사람을 만나서 설득도 하고 순화도 해야겠다고 상부에 보고하면 어느 정도 금액을 지급할지는 결재라인에서 결정한다. 그런 인물을 만나서 식사도 하고 100만 원 단위로 현금을 직접 전달하며 순화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위에는 돈을 지급했다고 보고하고 직원이 착복할 수도 있는 구조가 아니냐고 지적하자 전직 직원도 그 부분은 인정했다. 전직 직원은 “특활비를 쓰겠다는 계획서를 내면 거의 다 결재가 됐다. 마음만 먹으면 개인적으로 착복하는 돈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구조다”라고 말했다.
최근 국정원 직원이 이런 방식으로 특활비를 착복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발견되기도 했다. 한국 홍보 전문가로 유명한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지난해 국정원 사이버 댓글 외곽팀장으로 활동했다는 의혹을 받고 검찰 조사를 받았지만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검찰은 국정원이 지난 2011년 9월 30일과 같은 해 11월 2일 각각 200만 원씩 총 400만 원을 서 교수에게 지급한 흔적을 찾아냈지만 서 교수는 돈을 받았다는 시각에 다른 곳에서 개인 업무를 보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직 직원은 “과거 모 국정원장은 원장으로 취임하기 직전 사기를 당해 재산을 탕진하자 취임 후 특활비를 몰래 가져가 자기 재산 불리는 데만 관심을 가졌다는 소문도 있었다”며 “국정원장은 일반 직원들처럼 결재 받고 몇 푼 쓰는 정도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이 어마어마하다”고 말했다.
전직 직원은 “일부 특활비가 주먹구구식으로 쓰여진 것은 맞지만 특활비는 꼭 필요하다”면서 “국정원은 누구를 만나든 절대로 밥을 얻어먹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밥을 얻어먹는 입장에서 어떻게 정보를 수집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강석호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특활비 폐지에는 반대했다. 강 위원장은 “폐지보다는 쓰임새를 좀 더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정보원들에게 특활비란 생명줄과 같은 것인데, 공작금을 없앤다? 대통령이 무식하게 갖다 썼다고 이것을 없애자는 것인가. (만약 특활비를 폐지하면) 국정원은 어떻게 정보활동을 할 수 있을까. 좀 더 투명하게 운영하고 권력으로부터 보호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특활비를 아예 폐지시킬 수는 없겠지만 국정원 개혁위에서는 국회 예산 심사를 강화하거나, 중대한 기밀이 아닌 돈에 대해서는 감사원 감사를 받도록 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 개혁위의 이 같은 제도개선 추진에 신현수 국정원 기조실장도 상당 부분 동의하고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국정원 특활비에 대한 지나친 감시 강화는 정상적인 정보활동에도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러나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미국의 경우는 정보기관이 예산심사 과정에서 의회에 각 사업의 목적과 금액을 세세하게 적어 내도록 하고 있고, 영국은 예산의 총액만 의회에 제출해 예산 심사를 받는 것은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매년 사용예산에 대한 감사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나라 모두 정보기관 역량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 국가들이다. 특활비 사용을 투명하게 한다고 해서 정보기관 활동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국정원 출신으로 국회 정보위 간사인 김병기 민주당 의원은 특활비 개혁 방안에 대해 “다각적인 견제, 관리감독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제3의 기관에 의한 감사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그렇다고 너무 강하게 특활비를 제재하면 아무도 일을 안 한다. 정보활동을 하다보면 상대방에게 속을 수도 있는 것이고 예산 낭비적인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면책을 해주는 등 보완책도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